이용우 시조집, 『어머니의 창』, 초록숲, 2010.
□ 1942년 경주시 안강읍에서 태어나 안강초등, 경주중,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월간문학 시인상>(2001년)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19년 4월 21일 별세.
어머니의 창(窓)
감빛으로 물이 드는 가을 황혼 사룬 초가
다 낡은 소반에다 차려 덮은 저녁상에
돌아올 외아들 생각 창을 열고 앉았다.
비 그친 아침나절 바람 따라 떠나간 뒤
깜깜한 그믐밤에 더 초롱한 별을 잡고
정화수 맑은 심사로 창을 밝혀 샜더니….
하현달 추녀 끝에 하얗게 찾아오면
수심 잣던 물레질도 은하 저편 건너가고
성에 낀 어머니의 창 섬이 되어 떠 있다.
<조동화 해설>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각별한 존재였다. 여기에 나타난 그림은 아마도 시인의 결혼 전의 장면인 듯하다. 아침에 아들이 출근하면 어머니께서는 이른 저녁을 지어 상을 차려놓고 밥은 따뜻한 아랫목에 넣어준 채 아들을 기다린다. 아들은 그날따라 외근이었는지, 혹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한 잔 하는지 깜깜한 그믐밤 별들이 더욱 초롱초롱해져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이윽고 하현달이 추녀 끝에 뜨고 수심잣던 물레질도 끝이 났건만 성에마저 낀 어머니의 창은 빤히 볼 켜진 섬이 되어 긴긴 겨울밤을 건너간다. 이 장면은 아무래도 지나간 농경시대 막바지의 처절하도록 외로우면서도 못내 그리운 한 장의 스냅사진이다. 또 한 장의 스냅사진인 만큼 이것은 불가불 지난 삶의 한 부분 조명일 수밖에 없겠다.
이순(耳順)의 날들(1)
산 위에서 바라볼 땐
이마 치던 저 수평선
가까이 와서 보니 가마득히 멀어 뵈어
밟아온 이순의 길도
가물가물 다 잠긴다.
하루는 산이 되어 듬직이 앉고 싶고
또 하루는
가슴 풀고 들판처럼 퍼졌다가
어떤 땐 강줄기처럼
굽이치고 싶어라.
바람 탄 갈대처럼 서걱이며 흔들리고
피어나는 안개 속에 가슴을 적실 때면
산등 위 청솔 그 향기
붙잡으러 또 간다.
<조동화 해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화자는 이순의 언덕에 다가라 넉넉한 마음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젊은 날 산 위에서는 이마를 치던 수평선이 이미 가마득히 멀어져 있다. 실로 가물가물한 여정이다. 나이는 다소 먹었을망정 가슴 속에 이는 기개를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하루쯤은 산이 되어 듬직이 앉고 싶고, 또 하루쯤은 가슴을 풀고 들판처럼 누워도 보고 싶다가, 때로는 강줄기처럼 불현 듯 굽이치고도 싶다. 이미 갈대꽃 같은 백발은 와서 늦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데 피어나는 안개 속에서 새삼 덧없음이 가슴을 적실 때가 있다. 그런 때 화자는 산등 위에 선 푸른 청솔을 닮고 싶어 찾아가곤 한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얼마간 길어지긴 했어도 이순의 날들은 이미 해가 그리 마디게는 남지 않은 연륜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시방 그 이순의 언덕 위에 서서 지나온 길을 가마득히 돌아보고 있다. 삶의 거시적 조명일 수밖에 없는 한 장면이다.
지명(知命)의 갈을 건너
풀잎 끝 이슬처럼 반짝이고 말 것인가
산등성 푸른 솔은 바람 불러 세우는데
속심을 다지고 다져 띄워보는 방패연.
하루는 황망(慌忙)하고 또 하루는 막막(寞寞)하고
저무는 과녁빼기 지칫대는 아쉬움에
놀 비낀 고샅길 어름 고개 들고 서성인다.
지명의 강을 건너 오르는 이순(耳順) 언덕
강바닥 얕아지고 흐르는 물 세류(細流)되어
굽이친 물이랑 따라 모래톱만 쌓는다.
가을 1
창공이 높아지면 산과 들은 야위어져
밤하늘 기러기 떼 북천(北天)을 가로 날아
앞뜰에 늙은 감나무 하늘 불을 지른다.
꽃씨 한 톨 심어놓고 구름 잡아 나는 계절
바람이 건들 불어 알맹이들 거둬간 뒤
쓸려간 빈 그루터기 하늘 한 장 안는다.
활활활 타던 불꽃 된서리로 잦아들고
마지막 잎새 같은 기다림은 목에 걸려
파랗게 높은 하늘에 방패연을 띄운다.
아내
검은 머리 희어지게 빗질한 여정 속을
까치둥지 설운 삶이 치마폭에 얼룩지고
맞잡은 손끝 마디에 앙금 앉아 굳었다.
인고의 시간들이 손등에 골을 내고
웃어른 받들기에 솔가지로 푸르러도
빈지 틈 넘나든 세월 굽은 등이 서럽다.
가꿔온 정든 꽃밭 갈바람이 쓸어 가고
서리 빛 내린 머리 질정 없이 흔들려도
손 모아 지는 날까지 연꽃으로 피고 있다.
(빈지 : ‘널빈지’의 준말, 널:빈지 한 짝씩 끼웠다 떼었다 하게 만들어진 문(흔히 가게에서 문 대신 씀).
형산강
오늘도 말없이 거친 숨을 삼키며
찬란한 그 영화며 처절했던 아픔도
흐르는 물굽이 속에
말끔하게 헹궈낸다.
산과 들 굽이굽이 청복(淸福)으로 감싸 안고
성처 난 가슴패기 자성(自省)으로 아물리며
그리매 흔들릴 때면
푸른 등을 추스른다.
청고(淸高)한 하늘빛도 물속에 내려앉고
형산 위 뻗는 햇살 누리를 싸안으면
강둑의 풀꽃 씨방들
또 비상을 서두른다.
초승달
한 달 내
붉은 햇살
무쇠를
달구고 달궈
서산 위
하늘가에
시우쇠로
벼린 칼
겨울 밤
한 입 베어 문
동치미의
하얀 맛.
연화도(蓮花島) 뱃길
잔잔한 남해포구 등대 하나 깜박 졸고
새하얀 포말 위로 뱃고동이 길게 울면
바다는 하늘만큼이나 푸르게만 깊어간다.
헤쳐 가는 뱃머리로 넓게 펼친 남해바다
산들도 고물 뒤로 머리끝을 낮출 때면
작은 섬 고개 내밀고 알은체를 먼저 한다.
물길 따라 날아들며 재주넘는 재갈매기
전후로 멀어지는 풍광명미(風光明媚) 작은 섬들
햇살도 은비늘 털며 뱃전 위에 앉는다.
어머님 생각
아버님 옆자리에 모신 지 달포 여에
누우신 잠자리는 침수 고이 드시는지
엎으신 새 이불깃이 못내 마음 아립니다.
가냘픈 내 한생에 너희들이 꽃밭이라
손잡고 이른 말씀 귓에게 맴을 돌아
밤마다 베갯머리에 눈 이슬로 맺혀지고….
눈 깜박 쉬어가는 쉼터의 인생길에
낙엽이 떨어지듯 그렇게 가는 거라고
마음을 추슬러 봐도 가시잖은 그림자.
허허한 마음으로 기웃대는 텅 빈방에
눈감고 곧추앉아 경(經) 외시던 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내려 눈에 삼삼 잠깁니다.
<조동화 해설>
이 작품은 가신 어머님에 대한 슬픔을 가까스로 추스르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키워 기울어가던 한 집안을 온전히 일으키신 어머님, 그 어머님의 주검을 아버님 옆에 묻고 생사처럼 침수를 고이 드시는지 염려하는 아들의 마음이 절절하기 이를 데 없다. 어머님께서는 생전에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들을 너희가 내 꽃밭이라며 사랑해주셨다. 그리고 건너편 방에서 눈감고 꼿꼿이 앉아 낭랑히 경을 외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들의 눈에는 지금도 생시처럼 보이는 것만 같다. 참으로 가슴 저려오는 사모곡(思母曲)이다.
활쏘기
활시위 당겨놓은 출산(出産)전 산실(産室)여인
응시한 시공 넘어 초점은 떨고 있어
하늘도 숨을 죽이고 과녁만을 노린다.
당긴 시위 놓은 순간 열어젖힌 한 하늘
억척 떤 생의 그림자 발길도 재우쳐도
홀연히 아린 기억만 풀잎 끝에 맺힌다.
태어나 허공 가르며 날아가는 영욕의 시간
만 갈래 노정(路程) 위에 착‧부실(着‧不實)로 달려가서
어느 날 과녁에 꽂혀 영면(永眠)하는 그 화살.
<조동화 해설> 이 작품을 보면 매우 거시적으로 삶을 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수에서 출산 전 어머니의 모습을 ‘산실 여인’으로 설정하여 막 아기를 낳으려는 순간을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조준하는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둘째 수는 화살이 시위를 떠나 인생이 시작되어 아등바등 억척스럽게 한평생을 살아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마지막 셋째 수에서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의 비행(飛行)을 영욕의 시간이라 하고, 그렇게 삶을 시작하여 제각기 살아가는 인생의 전 과정을 ‘만 갈래 노정 위에 착‧부실로 달려가는’ 것으로 묘사한 다음, ‘어느 날 과녁에 꽂혀 영면(永眠)하는 그 화살’로 인생의 끝을 파악하고 있다. 화살은 짧은 시간 동안 날아가 그 과녁에 꽂히거나 엉뚱한 곳에 떨어지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느끼고 있는 삶이란 매우 짧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시인의 이러한 인식이 다름 아닌 ‘인생은 덧없다’는 전통적 사고에 닿아 있음을 또한 확인하게 된다. 다만 궁도장의 활쏘기에서는 화살의 운명이 궁수(弓手)의 손에 달려 있게 마련인데 반해, 이 작품 속에서의 화살은 그 운명이 많이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다른 점이라 하겠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먼 이역 떠돌았던 민족의 아픈 역사
낡은 계단 층층마다 삐걱이며 남아 있어
찾는 이
가슴 가슴을
전율인 양 뒤흔든다.
빛바랜 모습으로 늘어놓은 그때 흔적
비좁은 이삼층 방 지키고 앉았지만
끝끝내
내 것이기에
더워오는 눈시울.
하늘빛 흐릿해도 빛나는 임들 안광
그날 그 다지신 뜻 주저리로 여물리어
이국땅
시린 하늘밑
혼불로나 타고 있다.
<해설>
삶에 대한 사랑과 순례자의 노래
조동화(시인)
1.
이용우 시인은 2001년 제 95회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여 젊은 날부터 간절히 소망해왔던 문단 등단에의 꿈을 이룩한 늦깎이 시인이다.(중략)
우선 시인 자신이 80편의 작품을 선정하기를 기다려 다시 원고를 넘겨받아 정중히 일독(一讀)을 했는데, 첫시조집에 수록한 작품집에 비해 한결 뿌듯한 느낌들을 받았다. 이것들을 간단히 뭉뚱그려보면 작품들이 한결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는 것, 소재나 주제 면에서 더욱 폭이 넓어졌다는 것, 기교나 수사 면에서도 더욱 능숙하고 정교해졌다는 것 등이었다.
2.
이용우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경향 가운데 첫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4.
이상으로 이 용우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의 시편들을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살펴본 셈이다.
다만 주마가편 격으로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의 첫 시조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조집에서도 사전을 찾아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한자어가 얼마간 등장하고 있다는 점인데,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가 곧 우리말의 정수(精髓)임을 감안할 때 이 점은 어떻게든 보완하는 편이 그의 시의 내일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이 일은 젊은 한글세대와는 달리 시인의 언어체계가 그쪽으로 더 익숙해져 있음으로 빚어지는 일이니만큼 하루아침에 안개 걷히듯이 시정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이 같은 점에 대해 평소 창작에 임할 때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의 시에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되어 예상외의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