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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역 행사 & 축제홍보 스크랩 소백산 죽계구곡에 대한 고찰 ( 한 병 태 )
권화자 추천 0 조회 78 10.05.05 23:2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소백산(小白山)  죽계구곡(竹溪九谷)에 대한 고찰

(죽계구곡의 명명자와 그 명칭을 중심으로 고찰)

                                                                 작성자 : 한  병  태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산 소백산의 등산코스를 집중 탐색하고 사료를 산행기로 정리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이 산행기는 앞으로 소백산을 찾는 분들께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조금이라도 안전하고 쾌적한 산행이 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1) 1978-1981년 3년간 고등학교 과학반 학생을 지도하면서 소백산 일대 식물상 조사를 하여 과학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소백산 일대 식물상을 처음 조사하고, 정리하여 과학전람회에 발표하였다. 개인적으로 큰 영광을 얻기도 했지만 우리지역의 식물상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고. 또한 소백산 국립공원 발족 시 계획서에 게재되어 큰 보람을 느꼈다. 당시 3년에 걸쳐 일요일마다 소백산에서 식물채집을 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구석구석을 많이 보았다 할 수 있다. 정상에도 지금까지 100여 회 이상 등정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토대로 등산객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와 볼거리를 제공하려고 한다..

2) 웹상에 떠도는 소백산의 정보가 너무나 잘못된 정보들이 많아 소백산을 찾는 등산 객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 따라서 경관이 좋은 곳으로 등산로를 개발하고, 등산 객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는 현재의 시설물 (표지판, 등산로, 안내 설명문 등)을 소백산 국립공원과 영 주시에 건의하여 빠른 시일 내에 시정 보완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죽계구곡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하면 80여 개의 사이트가 나타나는데 웹에 떠있는 정보가 너무나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특히 영주시 문화 관광과, 소백산 국립공원 , 선비촌, 여행 정보지, 투어월드 등의 웹에는 명명자가 퇴계 이황으로 되어 있고, 한국의 산하 등산 전문 사이트와 조선일보 travel 등에는 신필하로 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곳에는 안축과 주세붕이라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죽계구곡의 아래 명칭도 실제로 문제가 있다. 이곳에 들어가보면 9곡부터 이정표가 붙어 있는데, 좀 과장된 느낌도 있고, 실제 경관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곳도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러 사료를 조사하고, 현장을 탐색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바로 잡고자 한다.

.연구배경

죽계구곡의 명명자가 누구이며 현재 사용되는 명칭이 정확한지를 알아보기위하여 초암계곡(草庵溪谷)과 죽계구곡(竹溪九谷)의 개요를 알아보고 죽계구곡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순흥지와 흥주지,영주.영풍향토지를 참고로하고 또 퇴계 "유소백산록"과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이 중국의 주회암(朱晦庵 주자)의 관계등 여러 사료를 조사하고, 현장을 탐색하여 사진을 촬영하여 명칭과의 관계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죽계구곡의 명명자와 명칭이 정확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초암계곡(草庵溪谷)과 죽계구곡(竹溪九谷)의 개요

죽계
 
(竹溪)란 순흥 읍내에서 동편에서 소수서원을 거쳐 배점과 초암에 까지 냇물을 말한다. 이 물은 국망봉 서쪽 아래 석륜(石崙)골에서 나오는 물과  비로봉 동쪽 하가동(下伽洞)에서 나오는 물이 중봉(中峰) 아래에서 합류하여 초암사 부근에서  죽계가 시작된다. 죽계 계곡은 소백산의 여러 계곡 중에서 가장 구역이 넓으며, 수량도 많고, 경사가 심하여 물의 흐름이 빠르다.. 또한 기암괴석(奇岩怪石)과 넓은 반석(盤石)이 많다. 이 계곡을 누비며  떨어진 물이 폭포를 만들고 바위에 부딪쳐 돌아 징담(澄潭:맑은 못)을 만든다.  "산에 물이 없으면 산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 돈다" 이러한 곳을 좋은 산이라고 한다. 소백산은 계곡과 물이 있어 천상화원을 만들고 나무들이 잘 자라 수려하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이 기암괴석을 감아 돌아 운치를 더해 주고 있어 명산이다.

2. 순흥지(順興誌)에 수록된 죽계구곡

1)
주신재(주세붕). 이퇴계도 무척이나 죽계의 천석을 애상(愛賞)하였다. 계곡(溪谷)에 들어가면 기이한 경치를 볼 수 있고, 산 굽이를 돌아 솟구치는 물의 흐름과 소리를 듣고, 감흥 받아 시로 읊고, 이름을 붙여 깊숙이 숨은 절경(絶景)을 세상에 알려지게 했다. 중국의 주회암(朱晦庵 주자)의 시로 인하여 무이구곡이 크게 알려진 경우와 일반이라."라고 했다.

2
) 죽계구곡은 초암 앞에서 제1곡으로 시작되어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 삼괴정(三塊亭:아까마골이라 하는 작은 마을) 앞의 구곡에 이르기까지 약 5리 사이에 배포되고 있다. 암벽으로 쏠리고 물줄기가 몇 단으로 꺾여 절벽 밑 깊은 소에 내려 꽂혀 수정구슬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솟구쳐 소용돌이 치다가 검푸른 못 한복판에 바위에 다시 부딪쳐 마치 안개 구름을 머금고 토하는 용의 모양 같다고 하여 용추(龍湫)라고 일컫는 제4곡이 있다. 가뭄에 여기에 빌면 곧 영험이 있어 비가 온다"고 전한다.

3
) 이 계곡은 깊고 굽이가 많아서 볼만한 곳을 택한다 해도 더 많을 텐데, 새겨져 있는 구곡은 너무 거리를 짧게 잡은 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谷)은 동구(洞口:시작점) 1곡이 되고 거슬러 들어가며 배정했는데 죽계구곡은 반대로 위에서부터 내리 배정되었다."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소수서원 앞)를 1곡으로, 금성반석(金成盤石)을 이곡으로, 백자담(栢子潭)을 3곡으로, 이화동(梨花洞)을 사곡으로 목욕담(沐浴潭)을 오곡으로, 청련동애(淸漣東崖)6곡으로, 용추비폭(龍湫飛瀑)을 칠곡으로, 금당반석(金堂盤石) 팔곡으로, 중봉합류(中峯合流)를 구곡으로 함이 어떨까"라고 했다.  이 계곡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단순한 계곡이 아니라 산굽이를 돌 때마다 천하의 절승(絶勝)을 이루며 소수서원 앞 백운동에 와서는 그 절정(絶頂)을 이루었다. 이 계곡의 굽이를 헤아려 죽계구곡(竹溪九曲)이다.

3
흥주지(興州誌)에 기록된 죽계구곡

1곡은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이고 2곡은 금성반석(金成盤石)이며 3곡은 백자담(栢子潭) 4곡은 이화동(梨花洞) 5곡은 목욕담(沐浴潭) 6곡은 청련동애(淸漣東崖) 7곡은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은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은 중봉합류(中峯合流)로 이 모두가 퇴계 선생이 소백산과 죽계계곡의 풍치(風致)에 심취(心醉)되어 산유(山遊)를 즐기면서 이름 붙인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4.
영주.영주 향토지에 기록된 죽계구곡

'
영주.영풍 향토지'저자 송지향 선생님은 한문실력이 뛰어나 순흥지(順興誌)와 흥주지(興州誌)에 기록된 향토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현장을 답사하여 사진을 촬영 수록한 향토지를 사비로 편찬하여 영주시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필자도 흥주지(順興誌)와 순흥지(順興誌)에 기록된 죽계구곡의 내용을 모두 인용하였다.  송지향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연구과제


1.죽계구곡(竹溪九谷)의 이름을 누가 붙였나?

가.
세붕은 주희( 朱熹 1130~1200) 주자)의 영향을 받아 죽계구곡의 이름을 명명하고, 후세에 와서 영조(英祖)[1694~1776]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竹溪一谷 , 二谷靑雲臺, 三谷, 四谷,..... 竹溪九谷 이라 써서 바위에 석각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사료된다.

1)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고려시대의 명유(名儒) 안향(安珦, 安裕)이 옛날에 거처하던 곳에 백운동(白雲洞)에 사원(祠院)을 세우고,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택하여 학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며 그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고 명명하고, 학문진흥에 힘썼다. 서원 입구에 있는 죽계 건너편의 커다란 바위에 '敬'자를 음각했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서이다. 후 일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는 다음해에 이곳에다 송백(松柏)과 죽(竹)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짓고, 또 '敬'자 위에 '白雲洞'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주세붕은 무릉잡고, 죽계지, 동국명신언행록, 심도설, 심경심학도를 저술하였다.

2)
남송시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주희(朱熹) 주자(朱子)는 무이구곡가에서 무이산(武夷山) 9곡(九曲)을 이상 세계인 무릉도원이라 극찬했다. 국의 절경 계림이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는 여성스러운 멋이 있다면 무이산은 웅장하고 호방한 남성미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무이구곡의 유람은 상류인 구곡에서 대나무 뗏목을 타고 유람을 시작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일곡에 이른다. 그러나 죽계구곡은 상류에서 부터 1곡이 사작되어 하류 삼괴정에서 9곡으로 되어 반대로 끝난다.

3) 무이산(武夷山) 9곡(九曲)은 다음과 같다.
9곡은
백운암( 바위 두 개가 포개진 모양의 맷돌바위) 있다
8곡은 산이 높아 물살이 빠르고, 각종 동물 모양의 바위가 많다. 고루암 아래에는 옥황상제 부인 젖가슴 별명을 갖은
쌍유봉(雙乳峰), 코끼리 코바위 사자모양을 한 바위도 있고, 거북 모양을 바위,.
7곡에서는 도교의 이상세계인
도원동(桃源洞)으로 들어가는 산문을 볼 수 있다
6곡은 병풍처럼 둘러처진 절벽
천유봉(天遊峰)
5곡 무이산의 제일의 바위산
쇄포암
4곡은
선조대(仙釣臺)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곳
2곡은 무이산 최고의 각선미를 자랑한다는
옥녀봉(玉女峰)이 있다.
1곡은
대왕봉(大王峰) 제일 높게 솟은 산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읊어졌다. 무이구곡가로 인해 무이산의 구곡은 더욱 유명해졌다.


나.
퇴계(退溪)이황(李滉)1501~1570] 유소백산록에 (遊小白山錄 기유년 1549년) 초암(지금의 초암사)의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내려오다가 고여서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는 제법 평평한 자리로 이루어져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만하였다. 그곳에 앉아서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며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비할 데 없는 운치가 느껴졌다. 옛날 주경유(周景遊, 경유는 주세붕의 字)는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근처에는 기왕에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백(白)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 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퇴계(退溪)이황(李滉)1501~1570]의 48세 때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보면 주경유(주세붕 (周世鵬) [1495~1554]가 명명(名銘)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다. 근제안촉(謹齋 安軸)(1
287-1348고려 말기의 문신) 죽계별곡 (竹溪別谷)의 5장주에 1장에서 죽계지역의 위치와 경관을 노래하였으며, 2장에서는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을 노래하였지 죽계구곡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다. 고로 근제안촉(謹齋 安軸)이 명명하지 않았다.
 
죽계별곡 (竹溪別谷) 5장 요약
 

1장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

2장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

3장

향교에서 공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현을 뜯는 모습

4장

천리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

5장

성대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


2. 죽계구곡(竹溪九谷)의 아래의 명칭이 정확한가?

 곡

흥주지

순흥지

 국립공원 소백산

1곡

백운동취한대(白雲洞 翠寒臺)

 

금당반석(金堂盤石)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금성반석(金成盤石)

청운대(靑雲臺)

3곡

백자담(栢子潭)

백자담(栢子潭)

 

4곡

이화동(梨花洞)

이화동(梨花洞)

용추비폭(龍湫飛瀑)

5곡

목욕담(沐浴潭)

목욕담(沐浴潭)

목욕담(沐浴潭)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청련동애(靑蓮東崖)

 

7곡

용추(龍湫),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금동반석(金堂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

중봉합수(中峯合流)

이화동(梨花洞)

1곡

 

백운동취한대(白雲洞翠寒臺)

(소수서원)

위의 이름이 조금식 다르고 또 현장에서 보는 형태와 분위기로 보아 상이한 곳이 있다. 또 웹상에도 흥주지를 무작정 인용한 것이 제일 많고 다음이 순흥지를 인용하였다.. 흥주지나 순흥지를 편찬할 때 이름과 현장을 관찰하지 않고 발간한 것 같다.

가)
제1곡이 백운동취한대(白雲洞 翠寒臺) - 금당반석(金堂盤石) 이라 사료된다.

초암사(草庵寺)에서 국망봉 쪽으로 300m 숲속으로 들어가면 죽계1곡 금당반석(金堂盤石) 표지판이 있다. 등산로 좌측 숲속으로 들어가면 넓은 화강암 암반(巖盤) 위에 맑은 물이 흘러 석경 (石鏡)과 같고,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 수십 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반석의 공간이 있다. 죽계구곡 중 가장 넓은 반석이다.

그 위쪽에 작은 폭포가 있고  큰 바위 벽에 죽계일곡「竹溪第一曲」이라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물이 넓게 흐르는 건너편 물밑 반석에 행서(行書) 로 새겨진 제일수석「第一水石」은 아주 힘차고 활달한 글씨이다. 오랜 세월동안 물에 닳고 달아서 第一石은 희미하게 보이나 水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동쪽 바위 벽에 세 사람의 이름이 석각 되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신필하이다.

급류에 수마가 된 하얀 화강암 바위사이로 옥류(玉流)가 흐르고,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포말(泡沫)을 만들고, 울창한 푸른 숲과 물소리, 새소리, 뭇 벌레소리가 어울려 등산 객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작은 폭포가 있고, 바위 벽에 죽계일곡「竹溪第一曲」 제일수석(第一水石) 이라 반석에 석각(石刻)

수십 명이 놀 수 있는 넓은 반석이 있고 죽계구곡 중 가장 넓은 반석(盤石)이다.

 

 

울창한 푸른 숲과 바위, 물소리, 새소리, 뭇 벌레소리가 어울려 등산 객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폭포수에 발을 담그면 쌓인 피로는 굿 바이


나. 죽계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 청운대(竹溪二谷 靑雲臺)

1)
退溪 李 滉 (1501~1570)선생님이 4월 22일(신유) 쓴 일기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4월23일(임 술)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갔다. 골짜기가 깊어 숲 속이 고요하다. 개울물이 돌에 부딪쳐 흐르는 소리가 절벽 사이에 요란하다.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렀다. 초암은 원적봉(圓寂峯)의 동쪽과 월명봉(月明峯)의 서쪽에 있었다. 여러 갈래의 작은 봉우리들이 위의 두 봉우리에서 갈라져 내려오다가 이 초암을 끌어안듯이 안고 돌아 암자 앞에 와서 산문을 이루고 멈추어 섰다.

"
암자의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고여서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는 제법 평평한 자리가 있어서 여러 사람이 둘러앉을 만하였다. 바위에 앉아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며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절경의 운치임을 알겠다." 옛날 주경유(周景遊:周世鵬의 字)는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근처에는 기왕에 백운동과 백운 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백(白)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

2)
주차장에서 3.0Km 올라와 초암사 종각에서 7m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면 물 건너 쪽(서쪽)에 큰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오래된 큰 소나무가 있으며 바위 벽에 죽계2곡 청운대(靑雲臺)라 새겨있어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이곳에는 5-6명이 둘러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큰 바위가 여러 개 있으며, 소나무, 산 동백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푸른 물, 푸른 하늘이 보이고, 위쪽에 폭포가 있어 물소리가 우렁차고, 또 큰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만들고 흘러온 물이 다시 소나무가 있는 제일 큰 바위를 휘감고 돌아 푸른 소를 만든 후, 아래쪽으로 여유 있게 물이 흘러가고 있어 운치를 더 보태어 준다.

이곳을 주세붕( 周世鵬) 선생님은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으나 퇴계 이황(退溪 李 滉 )이 백(白)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라 명명하자고 제의하여 큰 바위 벽에 죽계2곡 청운대(竹溪二谷 靑雲臺)라 새겨 놓았다.

 

5-6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큰 바위가 여러 개 있고, 소나무, 산 동백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붕( 周世鵬) 선생님은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 퇴계 이황(退溪 李 滉 )이 청운대(靑雲臺)라 명명하자고 제의

위쪽에 작은 폭포가 있고 큰 바위를 휘감고 돌아 푸른 소(沼)를 만든다.

아래쪽으로 맑은 물이 여유 있게 흘러가고 있다.


다. 3곡 백자담 (栢子潭) - 제3곡 이화동 (梨花洞)

주차장에서 2.8Km 올라와 등산로 우측 계곡이 백자담이라 되어 있으나 현장을 관찰하여 보면 이화동(梨花洞) 이라 명명하는 것이 좋겠다. 초암사 앞 물 건너편에 넓은 공지에 산벚나무와 아고배나무, 산동백, 산사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5월 중순경에 꽃이 활짝 피면 장관을 이루고, 경치도 아름답다. 그러나 주변에 산동백나무는 있으나 바위가 파여 생긴 담이 없다.

소백산 국립공윈에서 세운 죽계3곡 표지판에서 초암사쪽으로 약 10m 위쪽 계곡으로 들어 가면 7-8명이 앉아 놀 수 있는 큰 바위 2개와 위쪽에 폭포가 있고, 물 건너 맞은편에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물이 S자 모양 휘감고 돌아 소를 이루고. 다시 45도 급경사에 8m 정도 와폭이 S자 모양 휘감고 돌아 소를 만든 후 아래쪽으로 흐른다.  또 오래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계곡이 협소하여 습기가 많아 이끼 낀 바위가 주변에 늘려있다.
 

3곡 이화동 (梨花洞)

산벗나무, 아고배나무, 산동백나무, 산사나무, 고목의 느티나무들이 있다

물 건너 맞은편에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작은 폭포가 있다.

45도 급경사에 8m 정도 와폭이 S자 모양 휘감고 돌아 소를 이루고있다.


라. 제4곡 이화동 (梨花洞)  - 용추폭포 (龍湫瀑浦),

주차장에서 2.7Km 올라와 등산로 좌측 계곡으로 들어오면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형상의 폭포가 있다. 깎아 지른 6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몇 단으로 꺾여 물기둥이 다시 솟구치면서 깊은 소에 내려 꽂혀 수정구슬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다시 솟구쳐 소용돌이 치다가 검푸른 못 한복판에 바위에 다시 부딪쳐 마치 안개 구름을 머금고 토하는 용의 모양 같으니 용추폭포(龍湫瀑浦)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다. 가뭄에 여기에 빌면 곧 영험이 있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 주변에는 쭉 동백(산동 백) 나무와 산벚나무,  느티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폭포 바로 옆에 5-6명이 놀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물이 틔어 옷을 적시고 한기를 느껴 오래 앉아 놀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아래쪽에는 20명이 앉아 놀 수 있는 암반이 있다. 이 반석에 앉아 있으면 한 낮을 제외하고는 햇빛을 볼 수 없고 푸른 하늘도 보이고 아무리 더운 날에 에어컨 바람에 비하랴.  필자가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깎아 지른 6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기둥이 다시 솟구치면서 올라가는 자태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는 형상의 폭포

아래쪽에는 20명이 앉아 놀 수 있는 암반과 

5-6명이 놀 수 있는 넓은 바위(臺)


마. 제5곡 목욕담 (沐浴潭) - 제5곡 청련동애 (靑蓮東崖)

주차장에서 2.55Km 올라와 등산로 우측 계곡으로 칡넝쿨 숲을 해치고 들어가니 산수국이 활짝 웃으면 우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이곳은 옛 초암사로 들어가는 시멘트 다리가 아직도 마모되지 않고 남아 있다. 이 다리를 놓을 때 큰 바위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 다리를 놓기 전에는 5명 이상의 사람들이 놀 수 있고, 위쪽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다리 밑을 지나 떨어져 큰 소를 만들고 물길을 따라 10m 더 내려가면 반대쪽(동쪽) 바위 벽은 병풍처럼 단애(절벽)를 만들고있으며,  수마가 잘된 기암괴석이 계곡에 늘려있다. 그리고 맞은편 산에 소나무 군락이 있어 상큼한 솔 향이 내 주변을 맴돈다. 이곳의 경치와 솔 향기를 맡으며 물에 발을 담그고 독서삼매에 빠지면 시간가는 줄 어찌 알리. 이 다리 건너편 옛 전답자리에 칡넝쿨이 어지럽게 늘려있어 초암사 옛길은 보이지 않는다. 
 

 

옛 초암사로 들어가는 시멘트 다리밑으로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다리 밑을 지나 큰 소를 만들고

길을 따라 10m 더 내려가면 3m폭포가 있고 물 건너 동쪽 바위 벽은 병풍처럼 단애(절벽)를 만들고있다.

수마가 잘된 기암괴석이 계곡에 늘려있다.


바.제6곡 청련동애 (靑蓮東崖) - 목욕담 (沐浴潭)
  
주차장에서 2.3Km 올라와 등산로 우측에 과수원을 지나야 갈 수 있다. 대문을 굳게 닫혀있어 들어 가지 못하여 칠곡에서 계곡을 타고 올라 가서 육곡을 볼 수 있다. 넓은 공간에 과수원 쪽으로 산목련이 고사목이 되어 칡넝쿨이 덮고 있고, 100년 이상 된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두 가지만 겨우 살아있고 나머지는 고사목이 되어 흉측스럽게 서있다. 이것은 과수원 쪽으로 그늘을 지우니 과수원 주인의 소행일 것 같다. 잡목과 칡넝쿨로 경관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6곡이라 새겨진 바위를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아직 위 쪽으로 잘 수마된 바위가 늘려있고 30도 경사의 반석에서 물 미끄럼틀처럼 되어 있고 15평 정도 의 넓은 자연 풀 장을 이루고 있다. 앞쪽으로 큰 바위가 목욕담을 살짝 가리고 있어 아이들이 놀기에 안성마춤인 목욕담이다. 소백산 국립공원 관리 공단에서 이 과수원을 매입하여 숲을 조성하고, 조경하여 좋은 경관을 살려 방문객들의 볼거리를 제공하였으면 한다.
 

6곡이라 새겨진 바위를 찾아 보았으나 보이지 않고

30도 정도의 경사의 반석에서 물 미끄럼틀과 15평 정도 의 넓은 풀 장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한 그루가 두 가지만 겨우 살아있고 나머지는 고사목이 되어 흉측스럽게 서있다

아래쪽잘 수마된 반석은 있으나 잡목과 칡넝쿨로 경관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사. 제7곡 용추 (龍湫),- 백자담(栢子潭)

주차장에서 2.15Km 올라와 등산로 우측 계곡으로 들어오면 큰 산동백나무 그늘을 지나 10m 들어 가면 1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큰 바위 2개 위에 소나무 한그루와 산사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물 건너편에 20여명이 놀 수 있는 반석 위에 산벗나무, 산동백이 있어 봄에는 주변의 꽃들이 이곳 풍경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이 사이에 7m의 와폭의 물이 70도 경사를 타고 세차게 흘러 120도 휘감고 돌아  아래쪽으로 떨어져 큰 소를 만들고, 앞 바위에 부디쳐 양쪽으로 갈라져 유유히 흘러간다.

흰 암석에 가려진 목욕담에서 선녀가 숨어서 목욕한 전설이 있을 법한 담이 있다. 좌측에는 옛 물길로 바위가 잘 수마되어 깊고 길게 파여 담을 이루고 있다. 이 담에는 모래와 자갈이 채워져 있고 수량이 많을 때는 물이 흐른다. 물 건너쪽 산에는 큰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이쪽 아래 계곡 뚝에 산죽이 늘려있으며 아직도 큰 산동백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1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큰 바위 2개 위에 소나무 한그루와 산사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흰 암석에 가려진 목욕담에서 선녀가 숨어서 목욕한 전설이 있을 법한 담이 있다.

넓은 바위 위에 칠곡(七曲)이라 석각(石刻)되어 있다.

7m의 와폭의 물이 70도 경사를 타고 세차게 흘러 120도 휘감고 돌아  아래쪽으로 떨어져 큰 소를 만들고 있다.


아. 제8곡 금당반석 (金堂盤石) - 금성반석 (金城盤石)

주차장에서 1.95Km 올라오면 등산로 우측 계곡으로 들어오면 크고 긴 바위가 여러 개가 성곽 같이 쌓여 있고, 건너쪽에  수마가 잘되어 20여명이 놀 수 있는 넓은 반석이 있다. 오랜 세월 물의 흐름으로  이쪽 큰 바위가 윤이 나도록 수마되었고  홈이 패여 산수경석을 형성하고 있다. 위 바위 끝 부분에 4m 높이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아래쪽 바위에 부딪어 소를 만들고  숲에서 매미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큰 바위 위에 양쪽 소나무와 주변 나무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바위 한쪽에는 한 사람이 누어있으며 꼭 알 맞는 홈이 파진 곳이 2개가 있다. 이곳에 집사람이 들어가 누어 집으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고 상념에 잠겼다가 일어나 포도 알과 방울 토마도를 입에 넣어주고 자기도 먹는다. 마침 두 마리의  산비들기가 시샘이나 하듯이 푸드덕 날아 저쪽 소나무에 가서 앉는다.


 

크고 긴 바위가 여러 개가 성곽 같이 쌓여 있고

성곽을 따라 물이 세차게 흐르고 잇다.

 큰 바위가 윤이 나도록 수마되고 홈이 패여 산수경석을 형성하고 있다

 물 건너 쪽에 수마가  반석에 20여명이 놀 수 있고 끝부분에 八曲이라 석각되어 있다.


자. 제9곡 중봉합류 (中峰合流) - 이화동 (梨花洞)

주차장에서 1.7Km 올라오면 등산로 우측으로 삼괴정(三塊亭:아까마골이라 하는 작은 마을) 앞의 죽계구곡(竹溪九谷)은 중봉합류 (中峰合流) 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배나무 밭이 있었다고 하니 차라리 이화동 (梨花洞)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금은 이 주변이 사과 밭으로 되어 있고 위쪽에는 상수원 관리사무소와 상수원이 설치되어 있다,

계곡의 돌을 이용하여 양쪽 축대를 쌓았고, 양쪽에 있는 큰 바위는 다리발로 하여 시멘트 다리가 흉측스럽게 놓여있다. 그러나 암벽으로 부딪치고 물줄기가 몇 단으로 꺾여 떨어진 물은 아직도 우렁차게 쏟아져 넓은 소(沼)를 이루고 있다. 죽계구곡(竹溪九谷)이라 새겨진 바위는 계곡에 있지 않고 과수원길 축대 위에 외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차라리 이 바위를 중봉(中峰) 아래 물이 합류되는 곳에 옮겨 놓고
9곡 중봉합류 (中峰合流) 라 명명하는 것이 좋겠다.

 

죽계구곡(竹溪九谷)이라 새겨진 바위가 계곡에 있지 않고 과수원길 축대 위에 있다.

삼괴정 주변이 사과 밭으로 되어있다

지금은 상수원 관리사무소와 상수원이 설치되어 있다

계곡의 돌을 이용하여 양쪽 축대를 쌓았고


차, 중봉합류 (中峰合流)

주계1곡에서 100m 올라가면
국망봉 서쪽 아래 석륜(石崙)골에서 내려온 물과  비로봉 동쪽 하가동(下伽洞)에서 내려온 물이 중봉(中峰) 아래에서 합류하여 죽계가 시작된다. 산죽이 좌측 계곡에 무성히 자라고 있고 소나무 군락의 끝 자락에 큰 암반 사이로 들어 가면. 아래 계곡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들린다. 계곡길을 따라 내려가면 5명정도 앉을 수 있는 큰 바위가 여러 개 있고, 개울 바닥에는 암반이 넓게 깔려있다,

아래쪽으로 5m 더 내려가니 물개 한 마리가 일광욕을 즐기며 오수에 취해있다.8m 더 내려가면 쌍폭포에서 쏟아진 물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고, 떨어진 물이 소(沼)를 한 바퀴 돌아 암반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옆에 넓은 암반 위에 사자 한 마리가 오수를 즐기고 있다. 주변에 소나무, 물푸레나무, 산목련이 계곡을 감싸고, 나무 아래에는 산죽이 자라 죽계의 풍광을 한 층 돋보이게 한다.

계곡이 넓어 하늘을 쳐다보면 멍석 크기 만큼 하늘이 보여 햇볕이 들어오고, 그 사이로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국망봉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시인들은 이곳 암반에 앉아 있다면 시 한 수가 나올 법하다. 이 곳이 바로 중봉합류 되는 곳이다. 9곡이 황폐되어 옛 정취가 없으니 죽계구곡 바위를 이곳에 옮겨 중봉
합류
(中峰合流) 라 칭하는 것이 좋겠다.


 

국망봉 서쪽 아래 석륜(石崙)골에서 나오는 물과 비로봉 동쪽 하가동(下伽洞)에서 나오는 물이 중봉(中峰) 아래에서 합류하여 폭포를 만들었다.

소나무 군락이 있는 곳에서 2개의 암석 사이로 들어가면 중봉 합류지점 이다.

g

아래쪽으로 보면 물개 한 마리가 물가로 올라오고 있다.

산죽이 주변에 자라고 있다.

 

. 요약 및 앞으로의 과제

1.요약

.
죽계구곡(竹溪九谷)의 이름을 누가 붙였나?

1) 퇴계선생님은 "
주경유(주세붕)의 '유산록(遊山錄)'을 백운동 서원의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어 보았는데 이번에 석륜사에 가보니, 이 '유산록'이 판자에 쓰여져서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시문(詩文)이 웅혼, 기발함을 감상하고 도처에서 그의 시를 읊었다. 그렇게 하니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시로써 수작하는 것과 같아서 이 것으로써 얻은 감흥 또한 매우 컸다. 등산하는 자는 참으로 이러한 기록을 남겨야만 되겠다는 뜻을 느꼈다"라고 한 구절을 보면 주경유(주세붕)가  이름을 붙였다.

2) 퇴계의 유소백산록에  "
옛날 주경유(周景遊, 경유는 주세붕의 字)는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근처에는 기왕에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백(白)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 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주경유(주세붕)이  명명하였다고 확신한다..

3) 남송시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주희(朱熹) 주자(朱子)는 무이구곡가에서 무이산(武夷山) 9곡(九曲)을 이상 세계인 무릉도원이라 극찬했다
. 무이구곡의 유람은 상류인 구곡에서 대나무 뗏목을 타고 유람을 시작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일곡에 이른다.주경유(주세붕)이 백운동(白雲洞)에 사원(祠院)을 세우고,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택하여 학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기 위하여 백운동 서원 세워 후학들의 학문진흥에 힘썼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주희(朱熹) 주자(朱子)의 영향을 받아 죽계구곡을 이름 붙인 것이라 사료된다.

4).  주경루(주세봉)의 유산록
(遊山錄)을 구하여 확인 하지 못하고 결론을 내리기가 아쉽다.

 

죽계구곡(竹溪九谷)의 이름을 누가 붙였나?

      재

     정

퇴계 이황, 안축, 주세붕, 신필하 혼동사용

주세붕 명명


나. 죽계구곡(竹溪九谷)의 아래의 명칭이 정확한가?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
소수서원 앞)를 1곡으로,
금성반석(金成盤石)을 이곡으로, 백자담(栢子潭) 3곡으로, 이화동(梨花洞)을 사곡으로 목욕담(沐浴潭)을 오곡으로, 청련동애(淸漣東崖)6곡으로, 용추비폭(龍湫飛瀑)을 칠곡으로, 금당반석(金堂盤石) 팔곡으로, 중봉합류(中峯合流)를 구곡으로 함이 어떨까"라고 했다.  홍주지에서 잘못되어 순흥지에서도 잘못되었고. 그러나 소백산 국립공원에서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곡

흥주지

순흥지

소백산 국립공원

  정

 비 고

1곡

백운동취한대
(白雲洞 翠寒臺)

 

금당반석(金堂盤石)

금당반석(金堂盤石)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금성반석(金成盤石)

청운대(靑雲臺)

청운대(靑雲臺)

 

3곡

백자담(栢子潭)

백자담(栢子潭)

 

이화동(梨花洞)

 

4곡

이화동(梨花洞)

이화동(梨花洞)

용추비폭(龍湫飛瀑)

용추폭포(龍湫瀑)

 

5곡

목욕담(沐浴潭)

목욕담(沐浴潭)

목욕담(沐浴潭)

청련동애(靑蓮東崖)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청련동애(靑蓮東崖)

 

목욕담(沐浴潭)

 

7곡

용추(龍湫),

용추비폭(龍湫飛瀑)

 

백자담(栢子潭)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금동반석(金堂盤石)

 

금성반석(金城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

중봉합류(中峯合流)

이화동(梨花洞)

중봉합류(中峯合流)

竹溪九曲 의 비경이 없기 때문

1곡

 

백운동취한대(白雲洞翠寒臺)

(소수서원)

竹溪九曲 바위로 중봉합류 지점으로 옮김

 

 

 

 

백운동 취한대 (白雲洞 翠寒臺) :소수서원의 비경

 


2. 앞으로의 과제


1). 웹상에 떠있는 소백산의 등산로 정보와 죽계구곡의 정보를 바로 잡아 앞으로 소백산을 찾는 분들께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조금이라도 안전하고 쾌적한 산행이 되도록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고장을 더욱 많이 방문하도록 유도한다.

2) 소백산의
좋은 경관과 등산로를 개발하고, 등산 객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는 시설물 (표지판, 등산로, 안내 설명문 등)을 소백산 국립공원과 영주시에 건의하여 빠른 시일 내에 시정 보완되도록 한다.
특히 죽계구곡의 입구를 잘 정비하고, 경관이 좋은 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촬영하는 곳을 만들어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3)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 대도시의 근로자들이 저 비용으로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게 되어 있다. 영주의 테마여행지로 부석사, 소수서원, 죽계구곡, 퇴계의 산행코스를 개발하고, 초암에서 국망봉 코스 또 상월봉 코스, 비로봉 코스를 개발하고, 소백산 온천을 현대화하여 위락시설(慰樂施設)을 갖추어
"거쳐가는 영주에서 유숙하는 영주로" 다양한 관광개발이 필요하다.

4)순흥 쪽에는 뉴스호텔과 숙박시설 및 야영장을 만들고, 소백산 온천 부근에 대기업의 연수시설이나, 휴양지 건물을 세우도록 여러 가지 해택을 주어 유치한다.

참고자료 : 흥 주지(興州誌), 순흥지(順興誌),  죽계지(竹溪誌) , 영주,영풍항토지(榮州.榮豊鄕土誌)  퇴계 이황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영주군지(榮州郡誌),

 

 

    록

소백산에 올라[遊小白山錄]

 

나는 어릴 적부터

영주(榮州)풍기(豊基) 사이를 자주 왕래하였으니, 저 소백산(小白山)이야 머리만 들면 보이고 발만 옮겨 놓으면 올라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그리기만 하고 직접 가보지 못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요행히도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오게 되니, 나는 저절로 백운동(白雲洞)의 주인이 되어 마음속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동안의 소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겨울과 봄에 걸쳐 공무(公務로 말미암아 세 번씩이나 백운동을 들렀지만 한 번도 산문(山門)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었다.

4월 22일(신유)
이윽고 여러 날 이어지던 비가 개고 먼 산의 풍경이 목욕을 한 듯이 청명하였다. 나는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에 가서 유생(儒生)들과 함께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산을 향하여 올라갔다.
민서경(閔筮卿)과 그 아들 응기(應祺)가 길을 따라 나섰다.
우리 일행은 죽계(竹溪)를 따라 10여 리를 올라갔다. 골짜기는 깊숙하고 숲속은 고요한데, 여기저기, 개울물이 돌에 부딪쳐 흐르는 소리가 절벽 사이에서 요란하였다. 안간교(安干橋)를 건너 초암(草庵)에 이르렀다. 초암은 원적 봉(圓寂峯)의 동쪽과 월명봉(月明峯)의 서쪽에 있었다. 여러 갈래의 작은 봉우리들이 위의 두 봉우리에서 갈라져 내려오다가 이 초암을 끌어안듯이 안아 돌아 암자 앞에 와서 산문을 이루고 멈추어 섰다. 암자의 서쪽에 바위가 높이 솟아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내려오다가 고여서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는 제법 평평한 자리로 이루어져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만하였다. 그곳에 앉아서 남쪽으로 산문을 바라보며 맑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비할 데 없는 운치가 느껴졌다. 옛날 주경유(周景遊, 경유는 주세붕의 字)는 이곳을 백운대(白雲臺)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근처에는 기왕에 백운동과 백운암이 있으니 백운대라고 하면 이름이 서로 혼동될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백(白)자를 고치어 '청운대(靑雲臺)' 라고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종수(宗粹)스님이 내가 이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묘봉암(妙峯庵)에서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청운대 위에서 술을 두어 잔씩 마셨다. 그 때 민서경은 학질이 걸려 돌아가겠다고 하였고, 당시 나는 잔병 치레를 하여 비록 쇠약한 몸이지만 이 산을 꼭 한 번 올라가 보고 싶다고 하니 스님들이 서로 의논한 뒤에 간편하게 만든 가마인 견여(肩輿)를 만들어 왔다. 옛날 주태수(周太守,주세붕)께서 이미 사용하였던 방법이라고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허락하고 민서경과 작별한 뒤에 우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민응기와 종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이 혹은 앞서고 혹은 뒤서면서 태봉(胎峯)의 서쪽에 이르렀다. 개울 물을 하나 건너서 비로소 말에 내려 걸어 올라갔다. 한참 걸어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견여를 타고 앉아 아픈 다리를 쉬었다.

이날은
철암(哲庵). 명경암(明鏡庵)을 지나 석륜사(石崙寺)에서 잤다. 내가 보기에는 철암이 가장 깨끗하였으며 맑은 샘물이 암자의 아래와 뒤에서 흘러나와 암자의 동서로 갈라져 내려갔는데 맛이 매우 달고 차가웠다. 그리고 주위의 경치가 끝없이 탁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석륜사의 북쪽에 있는 바위는 생김새가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을 예로부터 봉두암(鳳頭巖)이라고 불려왔단다. 그 서쪽에 바위가 또 하나 우뚝 서 있는데 사다리를 놓고서야 그곳을 올라갈 수가 있었다. 주경유광풍대(光風臺))라고 이름지은 곳이다. 절 안에는 바위에 부처상을 조각하였는데, 스님들은 그것의 영험이 대단하다고 하였으나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24일(계해)
걸어서 백운암(白雲庵)에 도착하였다. 이 암자를 지은 스님은 이곳에서 좌선(坐禪)을 하다가 선(禪)의 이치를 깨달은 뒤에 홀연히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 암자에 중이 없었다. 다만 암자의 창 앞에는 우물이 있고, 뜰 아래에는 잡초들이 을씨년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그 암자를 지나니 길이 더욱 험준하였다. 산길을 곧바로 올라가자니 마치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당기고 밀면서 산마루에 올라갔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견여를 탔다.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으로 몇 리쯤 가니
석름봉(石凜峯)이 있었다. 봉우리 꼭대기에 풀로 엮은 초막(草幕)이 있다. 초막 앞에는 나무토막들을 이리저리 걸쳐 놓은 것이 있는데 매를 잡는 사람들이 만든 매 잡는 틀이란다.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알 만하였다.

그 봉우리 동쪽 몇 리쯤에
자개봉(紫蓋峯)이 있고 거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수 리를 더 가면 또 한 개의 봉우리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다. 이것이 국망봉(國望峯)이었다. 맑게 갠 날 햇볕이 밝게 비치면 여기서 용문산(龍門山)과 나라의 수도인 서울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산에 운무(雲霧)가 끼어서 먼 곳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흐릿한 중에서도 서남쪽으로는 월악산이 은은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太白山)청량산(淸凉山) , 문수산(文수山), 봉황산(鳳凰山)이 보일 듯 말듯 늘어서 있다. 그리고 저 남쪽으로는 팔공산(八公山)학가산(鶴駕山) 등 여러 산이 있을 것이고 그 북쪽으로는 오대산과 치악(雉嶽) 등 여러 산이 구름 사이에서 출몰하였다. 또 여기서 볼 수 있는 물로는 죽계(竹溪)의 하류인 구대천(龜臺川)이 있고, 한강의 상류인 도담(島潭)이 보인다. 곁에 있던 종수가 말하기를,

"이런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려면 서리가 내린 뒤인 가을 낮이나 비가 막 갠 뒤의 화창한 날씨라야 합니다. 옛날 주태수께서도 비 때문에 5일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올라갔기 때문에 비로소 먼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그렇겠다고 여기면서도, 산에 오르는 맛이란 꼭 눈으로 먼 곳을 보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산 위에는 기온이 낮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자라는 나무들은 모두들 동쪽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고 나뭇가지들도 몹시 외 틀어지고 왜소하였다. 그리하여 계절로 보아 4월 하고도 그믐께인데도 이제서야 나뭇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니 1년 내내 자라는 기간이 얼마되지 않을 듯하였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주위환경의 온갖 고난을 버텨 나가느라고 마치 전쟁을 대비하는 듯한 태세를 하고 있으니 깊은 숲속에서 쑥쑥 자라는 나무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형태가 달랐다. 곧
환경에 따라서 체질이나 성품이 바뀌는 것은 식물이나 사람이나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8,9 리쯤 서로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 철쭉이 숲을 이루었으며 지금 마침 그 꽃들은 한창 피어나서 울긋 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다. 어쩌면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듯한 기분이다. 산봉우리 위에 앉아서 술을 서너 잔씩 나눈 뒤에 시 7 수씩을 지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철쭉꽃 숲속을 지나 중 백운암으로 내려왔다. 나는 종수에게 말하였다.
"내가 처음 제월대(霽月臺)를 바라보았을 때에 두려움으로 다리 힘이 다 빠져버리더니 지금 이렇게 올라 왔는데도 다리에 힘이 아직 남아 있음을 느끼겠으니 거기를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종수를 앞세우고 벼랑을 따라 발을 모로 디디며 올라갔다. 상 백운암이라고 불리던 곳은 이미 불탄지 오래되어 빈터에 풀만 우거지고 파란 이끼만 가득 돋아 났다. 제월대는 바로 그 앞에 있었다. 그 제월대 앞은 낭떠러지를 이루어 내려다 보기만 하여도 정신이 아찔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내려 와 그날 밤은 다시 석륜사에서 묵었다.

25일(갑자)

나는
상가타(上伽陀)에 가기로 작정하고, 지팡이를 짚고 산길을 나섰다. 환희봉(歡喜峯)에 오르니, 서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더욱 아름다웠다. 모두 어제는 보이지 않던 산봉우리들이었다. 수백 걸음을 지나가니 석성(石城)이었던 옛터가 있고 성안에는 주춧돌과 허물어진 우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 서쪽에 조금 높이 솟은 바위봉우리가 있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앉을 만한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소나무. 삼(杉)나무. 철쭉들이 제멋대로 자라서 그늘을 지우고 있었는데 등산하는 사람들도 일찍이 이르지 못한 곳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그 봉우리의 생김새를 본 떠서 산대암(山臺巖)이라고 불렀다.

나는 사람을 시켜 가려진 곳을 헤치고 먼 곳을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곳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이 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었다. 주경유가 이곳에 오지 않아서 이 이름이 이처럼 고루한 것인가? 나는 불가불 그 이름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서 나는 이곳을
자하대(紫霞臺)라고 명명하고, 석성의 이름을 적성(赤城)이라고 하였다. 이는 옛날 천태산(天台山)이 붉은 노을이 낀 것처럼 붉어 보인다고 하여 '적성산'이라고 한 뜻을 따온 것이다. 자하대의 북쪽에는 이름없는 두 봉우리가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그 빛이 희게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동쪽 것을 백학봉(白鶴峯), 서쪽 것을 백련봉(白蓮峯)이라고 감히 명명하여 기왕에 있는 백설봉과 함께 일컫게 하였는데, 이는 소백산의 이름과도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숲을 뚫고 험준한 산을 넘어가서 산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바위골짜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상가타이고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은 동가타였다.

종수가 이르기를,
"옛날 희선 장로(希善 長老)가 처음 이 동가타애서 머물었고, 뒤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곳에서 좌선 수도(坐禪修道)를 9년 동안하였다. 그는 자신의 호를 목우자(牧牛子)라고 하였으며 그의 시집(詩集)도 남겼는데 소승이 일찍이 그것을 가져 있다가 남에게 빌려주었습니다."

하고, 시 두어 구절을 읊었다. 모두 마음을 깨우칠 만한 것들이었다.
그 서북쪽으로는 금강대와 화엄대가 있다. 나는 그 이름을 그대로 남겨 두기로 하였는데, 그곳에는 고승의 자취가 깃들여 있기 때문이었다. 동쪽에 있는 석봉(石峯)이 가장 기이하게 빼어났다. 그곳이
연좌(宴坐)라는 명칭을 가진 것은 역시 고승의 고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가타로부터 시냇물을 따라 내려오는데 고목과 푸른 등나무 덩굴들이 서로 얽혀서 하늘이나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중가타의 어귀에 이르렀으나 절 안에 스님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 곁에 폭포가 바위에 부딪쳐 떨어지는데 폭포 곁의 바위 절벽에는 잔대[箭竹]들이 무더기로 자라다가 지금은 잎이 모두 말라 죽었다. 그러나 그 뿌리들은 줄기를 드러낸 채로 얽히어 있었다. 그리고 이 폭포의 이름을 죽암폭포라고 하였다. 산승(山僧)이 이르기를,

"이 절벽뿐만 아니라 이 골짜기 전체에 이 잔대들이 무리 지어 살았는데 지난 신축년(1541년,중종36?)에 그것들이 모두 열매를 맺고는 저렇게 말라 죽었습니다."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이치를 터득할 수가 없다. 우리는 조그마한 시내를 건너서 금당(金堂)하가타암(下伽陀庵)에 이르렀다.그 동안 중가타의 동쪽에 보제암(普濟庵)이 있고 하가타의 곁에 진공암(眞空庵)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스님들이 전염병을 앓고 있어서 들어가 보지 않고 지나쳤다. 우리는 하가타에서 시내를 하나 건너 관음굴에 들러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26일(을축)
하산하는데 산밑으로 반석이 널찍하게 펼쳐지고 그 위로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니, 졸졸 흐르는 그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시원스러웠다. 그 시내의 양쪽에는 목련(木蓮)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물가에다가 지팡이를 세워놓고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 이를 씻으니 기분이 상쾌하였다. 그 때 종수가 시 한 구를 읊었다.
시냇물은 옥을 찬 벼슬아치 비웃는데, [溪流應笑玉腰客]
세속 먼지 씻으래도 씻을 수 없네. [欲洗未洗紅塵踪]
종수가 읊고 나서,

"이것이 누구를 가리킨 것이겠습니까?"하여, 서로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은 뒤에 각각 시를 또 한 수씩 지어 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시내를 끼고 수리(數里)를 내려 가는 동안 주변은 숲이 구름처럼 덮여있는 절벽들로써 볼수록 장관이었다. 갈림길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민응기와 종수 그리고 여러 스님들은
초암동(草庵洞)쪽으로 떠나고 나는 박달현(博達峴) 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소 박달현에 이르러 나는 견여에서 내려 걸었다. 조금 가니 나를 마중 나온 사람과 말이 고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서 대박달현을 넘었는데 거기는 바로
상원봉(上元峯) 한 줄기가 남쪽으로 달려가다가, 허리가 조금 아래로 처져서 낮아진 곳이었다. 여기서 상원사가 수리밖에 안 되지만 힘이 딸려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비로전(毗盧殿)의 옛터 밑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조금 있자니 허간(許簡)과 내 아들 (준)이 군(郡)에서부터 찾아왔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여기서 오랫동안 이야기하며 쉬었는데, 우리가 앉아 쉬었던 돌을 비류암(飛流巖)이라고 명명하였다.
우리는 드디어 욱금동(郁錦洞)을 지나서 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소백산은 천암만학(千巖萬壑)의 경치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들은 주로 사찰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왕래하게 된다. 대개 사람들이 통행하는 곳은 세 군데의 골인데, 저 초암이나 석륜사는 중간 골[中洞]에 있고,
성혈(聖穴)이나 두타(頭陀) 등의 절은 동쪽 골에[東洞]에 있으며, 상중하의 3 가타암은 서쪽 골[西洞]에 있다. 산행하는 사람들은 초암과 석륜사를 경유하여 국망봉으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고 흥이 식으면 돌아오는데, 저 주경유같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기껏 올라가본 곳은 겨우 중간 골 일대뿐이었다. 그의 '유산록(遊山錄)'에 기술한 것이 매우 자세하기는 하였으나 그것들은 모두 이산의 스님들에게 물어서 쓴 것이고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명명한 산봉우리 이름들 중에 광풍(光風), 제월(霽月)이나 백설. 백운 등은 모두 중간 골에 있는 것들이고, 그밖에 동서 쪽 골에 있는 것들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력이 쇠약하고 병든 몸이었기 때문에 단 한번에 이산의 전체 경치를 다 보려고 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동쪽은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고 서동으로 향하여 갔던 것이다. 내가 서쪽 골에서 얻은 명승지로는 백학. 백련. 자하. 연좌. 죽암 등의 경치로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마치 주경유가 중간 골에서 만나본 바의 경우와 같은 의도에서였다.

   처음에 주경유의 '유산록(遊山錄)'을 백운동 서원의 유사(有司)
김중문(金仲文)에게서 얻어 보았는데 이번에 석륜사에 가보니, 이 '유산록'이 판자에 쓰여져서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의 시문(詩文)이 웅혼, 기발함을 감상하고 도처에서 그의 시를 읊었다. 그렇게 하니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시로써 수작하는 것과 같아서 이 것으로써 얻은 감흥 또한 매우 컸다. 등산하는 자는 참으로 이러한 기록을 남겨야만 되겠다는 뜻을 느꼈다.  그런데 주경유가 이 산에 오기 전에도 호음(湖陰) (鄭)선생이나 태수 임제광(林霽光)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 태수가 남겨놓은 글은 한 자도 찾아 볼 수가 없고 호암의 시만이 초암(草庵)에서 겨우 찾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스님들의 말을 빌리면 석륜사에는 황금계(黃錦溪)의 시가 있고 명경암의 벽에는 황우수(黃愚수늙은이수)의 시가 있을 뿐 그 밖에는 더 이상 다른 이의 시문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영남은 사대부가 많은 고장으로,
특히 영주 풍기 사이에는 예로부터 큰 선비들이 끊임없이 이어왔는데, 이곳을 찾은 사람이 어찌 그리 없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곳에 대한 글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나의 생각으로는 죽계(竹溪)에 사는 안(安)씨들은 이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서 그 이름이 중원(中原)에까지 떨쳤으니 반드시 이산에 올라보았을 것이고 이산을 노래하였을 것이고 이산을 즐겼을 것인데, 그 자취가 이산에 남아 있지 않고 그 시가 구전되어 오지 않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풍속이 산야(山野) 유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산에 대한 글을 남기기를 꺼리기 때문에, 후세에까지 이름을 드날린 저 안씨들[안유,안축 등]도 끝내 이 훌륭한 산에 대하여서 말 한 마디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다른 것을 논하여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나같이 벼슬에 매여있는 몸으로 잠시 여가를 내어 유람한 것쯤이야 이 산에 대하여 무슨 보탬이 될까마는, 그 동안 지나면서 본 것들을 이렇게 기록할 뿐이다.
훗날 이 글을 보는 사람도 내가 주경유의 기록을 보며 감동하였던 것만큼 감동할지 모르겠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년,명종4년]에 풍기[基山郡]관사에서 서간병수(栖澗病수) 쓰다.

                               글이 실려있는 곳 <퇴계선생문집41"잡저" >

 

죽계별곡 (竹溪別谷)- 謹齋 安軸지음

1. 원문과 해석

1장
죽령의 남쪽과 영가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의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와 신라의 흥망 중에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취화같이 우뚝 솟은 봉우리에는,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一章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
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
他代無隱 翠華峯 天子藏胎
爲釀作中興 景幾何如
淸風杜閣 兩國頭御
爲 山水淸高 景幾何如                                       

2장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들에서,
술에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핀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二章
宿水樓 福田臺 僧林亭子
草菴洞 郁錦溪 聚遠樓上
半醉半醒 紅白花開 山雨裏良
爲 遊寺 景幾何如
高陽酒徒 珠履三千
爲 携手相從 景幾何如

3장
산새는 채봉이 날아 오르련 듯·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 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영귀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해마다 삼월이 오면 긴 노정으로.
아! 큰소리치며 신임자를 맞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三章
彩鳳飛 玉龍盤 碧山松麓
紙筆峯 硯墨池 齊隱鄕校
心趣六經 志窮千古 夫子門徒
爲 春誦夏絃 景幾何如
年年三月 長程路良
爲 呵喝迎新 景幾何如


4장
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만발하여 난만한데, 그대 위해 훤히 트인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로,
바삐 거듭 오길 기다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새로 나온 꾀꼴새 울음 속에,
아! 한 떨기 꽃처럼 검은 머릿결이 구름처럼 흘러내려 끓임 없는데,
타고나 천하절색인 小桃紅맘 때 쯤이면
아! 천리 먼 곳에 두고 서로 그리워함을, 또 어찌 하겠습니까?
四章
楚山曉 小雲英 山苑佳節
花爛 爲君開 柳陰谷
忙待重來 獨倚欄干 新鶯聲裏
爲 一朶綠雲垂未絶
天生絶艶 小桃紅時
爲 千里相思又柰何


5장
붉은 살구꽃이 어지러이 날리고·향긋한 풀은 푸른데, 술동이 앞에서 긴 봄 날 하루놀이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속에 단청 올린 다락은 깊고도 그윽한데, 거문고 타는 위로 불어오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와 빨간 단풍이 청산을 비단처럼 수놓을 제, 말간 가을 밤 하늘 위로 기러기 날아간 뒤라,
아! 눈 위로 휘영청 달빛이 어리비치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중흥하는 성스러운 시대에, 길이 대평을 즐기느니,
아! 사철을 즐거이 놉시다 그려.

五章                                                      
紅杏紛紛 芳草 樽前永日
綠樹陰陰 畵閣沈沈 琴上薰風
黃國丹楓 錦繡靑山 鴻飛後良
爲 雪月交光 景幾何如
中興聖代 長樂大平
爲 四節遊是沙伊多


1장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

2장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

3장

향교에서 공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봄에는 경서를 외고 여름에는 현을 뜯는 모습

4장

천리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

5장

성대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

 

2. 어구해석

1) 竹溪 ; 죽계는 순흥부에 있으며, 풍기군에서 23리 떨어져 있다. 이색이 「송안시어시서」에서 "순흥은 안씨들이 대대로 머물러 산 곳으로 죽계의 위에 죽계의 근원이 있는데 태백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竹溪 在順興府 距豊基郡 二十三里 李穡送安侍御詩序 順興安氏世居 竹溪之上竹溪之源出於太白山 풍기의 성씨에는 순흥 안씨와 신씨·이씨·윤씨·석씨가 있다. 豊基姓氏 順興安 申 李 尹 石. 풍기의 인물로는 안축이 있다. 그는 충숙왕 12년에 원나라의 시험에 급제하였고, 상주 목사를 나갔는데 고향을 오가면서 효성을 다했다. 관직은 첨의 찬성사 흥년군에까지 올랐다. 豊基人物 安軸 忠肅王 十一年 中元朝制科...... 出牧尙州 往來盡孝 官至僉議贊成事興寧君『여지승람·권25·풍기』

2) 竹嶺 ; 죽령은 풍기군 서쪽 24리에 있는데 신라 아달왕 5년 처음 길을 뚫었다. 竹嶺 在豊基郡西二十四里 新羅阿達王五年 始開路 『여지승람·권 25풍기』

3)영가(永嘉) ; 안동의 고려 초기 때의 이름. 안동대도호부는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고창군이라 했다. 고려 태조가 승격하여 부로 하였다. 또 이름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후에 영가군이라 하였다. 安東大都護府 本新羅古陀耶郡 景德王改古昌郡  高麗太祖 .... 陞郡爲府 而改今名 後改永嘉郡 『여지승람·권24·안동 연혁』

4)小白山 ; 순흥현에 있으며 안동군에서 32리 떨어져 있다. 在順興縣 距安東郡三十二里

5)順政城 ; 순흥의 옛이름. 순흥폐부는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이다. 고려 초에는 흥주로 고치고, 성종 때에는 순정이라 일컬었으며, 현종이 안동부에 귀속시키더니 뒤에 순 안 현으로 이속 시키고, 명종은 감무를 두며 충렬왕의 태를 안치하더니 흥녕현령으로 고치고, 충숙왕의 태를 또 안치하더니 지흥주사로 승격시키며, 충목왕의 태를 또 안치하더니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하였다. 順興廢府 本高句麗及伐山郡 高麗初改興州 成宗時稱順政 顯宗屬安東府 後移屬順政明宗置監務 忠烈王安胎 改興寧縣令 忠肅王又安胎 陞知興州事 忠穆王又安胎 改今名陞爲府 『여지승람·권25·풍기고적』

6) 타대무은(他代無隱) ; 他는 뜻으로 읽은 것이고, 代는 음으로 읽은 것이다. 他代는 '년디'다. 無는 뜻으로 읽은 것이고, 隱은 통음차(通音借)로 '는'이다. 無隱은 '없는'.

7) 王子藏胎 ; 충렬, 충숙, 충목 세 왕의 태를 묻은 곳이다. 경원봉은 소백산에 있는데 군 북쪽 22리에 있다. 고려 충숙왕의 태를 안치했다. 慶元峰 在小白山 距郡北二十二里 藏高麗忠肅王胎 초암동은 소백산에 있는 군 북쪽 45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의 태를 안치했다. 草菴洞 在小白山 距郡北四十五里 藏高麗忠烈王胎 욱금동은 소백산에 있는데 군 북쪽 13리에 있다. 고려 충목왕의 태를 안치했다. 郁錦洞 在小白山 距郡北十三里 藏高麗忠穆王胎 『여지승람·권 25·풍기산천』

8) 宿水樓 ; 宿水寺의 寺樓. 숙수루는 소백산 아래 있는데 어여의 시에 "추위가 산색을 흐리자 승려는 문을 닫고, 물소리 차게 울리니 객이 누대를 오른다"고 하였다. 宿水寺 在小白山下. 魚璵詩.... 寒推岳色僧 戶 冷踏溪聲客上樓

9) 草庵洞 ; 초암동은 소백산에 있으며, 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져 있다. 고려 충렬왕의 태가 묻혀 있다. 草庵洞 在小白山 距郡北四十五里 藏高麗忠烈王胎

10) 郁錦溪 ; 욱금계는 소백산에 있으며, 군에서 북쪽으로 134리 떨어져 있다. 고려 충목왕의 태가 묻혀 있다. 郁錦溪 在小白山 距郡北十三里 藏高麗忠穆王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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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2.31 15:31

    첫댓글 장대한 부량의 글 다읽지 못함 죄송 합니다, 좋은글 사진 , 감사 , 공부 하고 갑니다 안동 강명구

  • 11.05.09 19:32

    글잘읽엇습니다 동양대학원에서 성곽공부하는데 소백산유산로기 많은도움이 되엿습니다
    충북단양군수를지낸이황 선생님군수님 정겨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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