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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5. 이 미래의 철학자가 오해되었던 것은 신비함이나 모호함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명료함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대중에게 자기가 심오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모호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못 간주 되어진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계속 자라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고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계속해서 젊어지고 미래로 채워지며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6. 한 인간이 병들고 우울했을 때 생각해 낸 모든 진리들이 그 질병의 표현이듯이, 병든 시대가 자랑하는 진리들 역시 그 시대가 지닌 질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8.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서장,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1. 천 개의 눈
눈처럼 쉽게 길들여지는 게 또 있을까? 광학의지(Wile zur Optik, WM; 182) 혹은 시각 체제ㅡ사뭉릉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는 훈련, 두 개의 눈으로 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자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자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다.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없다(WM; 331)
2. 천 개의 길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Z; 117)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가지 방식이 남았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3. 천 개의 기원
역사의 뿌리나 열매는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Z; 215)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4. 천 개의 젖가슴
과학적 인식이라고? 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양성 공유자도 아니고, 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 성적 불능자들.”(U; 142)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Z; 163) 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 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른다. 너희는 왜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Z; 166)를 모른다. 너희는 왜 태양이 그것에 입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른다.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5. 천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 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 우리에겐 매번 던져지는 주사위가 다 소중하다. 겨우 천 번? 우리는 벌써 천 한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있다. 여섯 개의 면박에 없다고? 우리는 동전의 앞 뒤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또 한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 세계는 너희를 위해 천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다.
6. 천 개의 화살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GD; 21~26) 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FW; 368) 아포리즘들만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EH; 295)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 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
7. 천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한다.”(JGB; 64) 가면 뒤의 얼굴? 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 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이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 주시려거든 부디…… 또 하나의 가면! 제2의 가면을 주시오.”(JGB; 228) 허락하신다면 제2의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 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시오.
8. 천 개의 이야기
아직도 천 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법ㅡ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인다,(Z; 212) 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법ㅡ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이다,(EH; 282) 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 넘나드는 법ㅡ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다,(Zl 160) 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법ㅡ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 그래야만 기은 바닥까지 볼 수 있으리라,(MA; 188)…… 아직도 니체에 관한 천 일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제1부
28. 철학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말을 내뱉은 철학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진단이 끝나자 니체는 이렇게 처방한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를 추구해 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힘, 생명 같은 것을……”(FW, 제2판 서문; 36)
제2장 강한 자와 선한 자; 니체의 계보학
61. 니체의 질문은 “도덕적 열매가 성장한 토양”(WMl 176)을 겨냥하고 있다. “나의 질문은 변형되었다. 즉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서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가?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은 고난과 타락의 징조인가, 아니면 삶의 풍부한 힘과 의지·용기·미래를 나타내고 있는가?”(GM; 서문, 23)
72.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자는 그러한 도덕적 판단들이 어떠한 토양에서, 어떠한 건강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를 진단한다. 유래와 혈통을 밝혀주는 것, 고급과 저급, 강함과 약함, 거인과 소인의 위계를 세워주는 것이 계보학이다.
77. 강한 자는 선한 자가 아니다. 강한 자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이다. 그러나 선한 자는 “억압하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고 그것을 신에게 맡기는 자, 자신을 숨기는 자,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자”이다.(GM; 53)
78. 강자들, 고귀한 자들의 평가 양식을 니체는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으로 표현하곤 했다.(GM; 33, JGB; 205) 거리에 대한 열정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103. 그런데 니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불쑥 내던졌다.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다. 스핑크스도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WM; 331)
104. 그러나 현상에 머물러서 ‘있는 것은 오직 사실뿐’을 외치는 실증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나는 말하리라. 사실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해석뿐이라고(WM;303)
107. 니체는 해석의 문제에 있어 차이에 대한 “동등화의 의지”(혹은 동일화의 의지)를 발견한다. 진리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WM; 313) 즉 진리란 하나의 신앙이며 가치 평가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족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문화이든 간에 보존을 위한 하나의 투시법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하나로 만드는 것”(WM; 177)이다. 바로 차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특정 방향으로 모으려고만 하는 것이 그들의 병이다.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Du sollst)”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Will 켜 einer Optik)’라고 부른다.(WM; 182) 세계를 보는 다양한 눈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일시키려는 의지.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광학의지는 그들의 주장이 허구일 때조차도 “하나의 의무이며 명령”이다.(GD; 41)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눈은 조작되고 훈련받는다. 우리의 눈은 더 이상 여럿이 아니다. 특정한 방향으로만 보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시각 체제(regime) 속에서 우리의 눈은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고와 판단, 지각의 활동은 “동등의 것으로 조작하는 활동”을 전제로 한다.(WM; 311)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크루스테의 침대’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 모든 차이적 존재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 동일화의 의지. 그 동일화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 위조”가 행해지고, 시선에 대한 광학적 훈련이 수행된 뒤에 목표를 달성한다.
109.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WM; 370) 세계는 “배후에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ㅡ필자) 도리어 무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WM; 303)......... 니체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ㅡ그것이 상대주의의 절대성이라고 해도ㅡ진리, 모든 해석을 수렴시킬 수 있는 매듭은 없다. 그 이유는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과잉은 진리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소멸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넘침과 과잉이다. 카오스나 미로야말로 니체에겐 즐거움의 대상이다. 길의 과잉이 카오스이며, 끝없는 길이 미로가 아니겠는가. 세계의 카오스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몰락의 징후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이다.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성의 욕구이며,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정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어해서는 안된다.”(WM; 369)
...........특히 니체의 투시주의는 “나의 해석은 이렇다.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해석을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보자. “진실로 권하노니 나로부터 떠나거라. 차라투스트라를 경계하라.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 ……신도들이란 다 그런 것이며 그래서 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Zl 118)
119. 공공영역에서 차이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던 그리스인들의 태도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해되지 있지 않다. 다양성이 건강을 증명한다는 자연의 생태주의적(ecological) 가르침도 우리에게는 이해되고 있지 않다. 오직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차이가 생기면 불안정하게 되고 평화를 해친다는 것, 아니면 새로움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르메스의 장난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해석학은 여전히 디오니소스의 웃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122. 자본주의 정치 체제가 어떤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안정성을 해칠 힘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승리에 대한 증명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예언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실패는 혁명 때문이 아니라 노쇠함 때문이겠지만…….
123. 니체는 우리 시대를 ‘정치적 영역이 위축된 시대’라고 부른다.(FW; 70~73)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국민들의 “군주적 본능”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더 이상 군주적 본능을 가지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주권자, 입법자, 가치의 창안자이기를 그칠 때, 정치 영역은 위축되고 만다.
138.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152. 전쟁이란 내가 주권적 능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성적 힘으로 상요하는 것이다. 니체가 자주 말하듯이 좋은 전쟁은 화약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다. 외부적 강제에 맞서 우리를 아곤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래서 우리 안에서 국가의 탄생을 막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 계속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우리 정치적 운동의 과제, 그것은 전쟁이다.
* 권력의지 : 힘이 향하는 방향, 능동적인 것
163. 그런데 클리나멘은 세계에 대한 기계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세계에 대한 역학적 계산을 이상한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이 방해하고 있다. 클리나멘은 원자들의 운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예측할 수 없는 클리나멘 운동으로 확고해야 할 법칙들이 깨지는 일이 자주 생긴다.
166. 강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시작하는 것’, ‘창조하는 것’, ‘자율적인 것’, ‘넘치는 것’, ‘선사하는 것’, 공격하는 것‘ 등으로 그려진다. 약함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 ‘무리 짓는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결여된 것’, ‘적응하는 것’, ‘외적인 것에 대한 비난과 원한’ 등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표현들은 모두 강함과 약함, 즉 힘을 측정하는 니체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167. 들뢰즈는 ‘능동적인 것(active)’과 반동적인 것(reactive)‘이야말로 힘의 질적인 구분이라고 말한다. 능동적인 힘은 ’시작하는 힘‘이며 ’공격하는 힘‘이다. 반동적인 힘은 ’비난하는 힘‘이며 ’상쇄시키고 흡수하는 힘‘이다. 모든 방향(가치)은 능동적인 힘이 결정한다. 우리는 반동적 힘의 작동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용수철을 누를 때를 생각해 보자. 반동적 힘은 능동적 힘이 작동했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 방향은 능동적 힘의 작동을 상쇄시키는 방향이다.
171. ‘Macht’가 능력을 의미하고, ‘Wille’가 명령을 의미한다면, 권력의지(Wille zur Macht)는 사실상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이자,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172. 한 사회에서 ‘돈’이 높이 평가되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결핍된 ‘돈’을 강하게 의욕한다면 대부분은 돈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172.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있는데, 그것은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결핍된 자의 초조함과 넘치는 자의 즐거움은 너무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나는 개개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FW; 342)
180. 긍정의 권력의지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새로움과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고귀한 운동으로 느낀다. 하지만 부정의 권력의지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유한자들에게 부여된 고통이나 불완전한 감각 기관에 비친 가상쯤으로 생각한다. 전자에게는 반복이 기쁨일 테지만 후자에게는 큰 고통일 것이다. 전자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에 대해 “한 번 더!”라고 말하겠지만, 후자는 “이젠 그만!”이라고 말할 것이다.
185. 니체는 헤겔조차 보지 못한 헤라클리이토스의 놀라운 생각을 소개한다. 그것은 세계를 놀이로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물리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유희이다.”(PG; 132)
생성과 소멸, 건축과 파괴는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이 영원히 동일한 무구의 상태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의 유희만이 있을 뿐이다. 어린아이와 예술가가 놀이를 하듯 영원히 생동하는 불은 놀이를 하며, 무구하게 세웠다가 부순다. 영겁의 시간 에온(Aeon)은 자신과 놀이를 한다. 마치 아이가 바닷가 모래성을 쌓았다가 부수듯이 …… 이따금 그는 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PG; 135)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는 제우스의 유희이며, ……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다수이다.”(PG; 135) 오, 위대한 세계의 어린아이 제우스!(PG; 141) 오, 위대한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
201. 이것은 영원회귀와 초인에 대한 하나의 암시이다. 심연의 사상은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의 정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고통조차 긍정될 수 있는가? 그러나 긍정이 어려운 이유는 끔찍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달리 느껴져야 한다는 것, 즉 그것이 즐거운 것으로 뒤바뀌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고 있는 한 그 긍정은 허위다. 다른 감수성, 다른 느낌을 갖는 신체로의 변신만이 그것을 긍정하게 한다. 권력의지가 하나의 평가박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느낌 방식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3. 새로운 자기를 만들려는 자는 기존의 자기를 버려야 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익지 못한 과일들이 그렇듯이 살기를 원해서”(Z; 365) 줄기에 강하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206. 다시 주사위 놀이로 돌아가 보자. 주사위 놀이야말로 영원회귀에 대한 최고의 비유이다. 주사위가 던져질 하늘은 “우연의 하늘, 순진무구함의 하늘, 우발성의 하늘”이다.(Z; 207) “‘우발적인 것(von Ohngefahr)‘이야말로 세계의 가장 오래된 귀족이며 …… 모든 사물들을 목적에 예속된 노예 신세로부터 구원해 주는 것이다.” 하늘에 던진 주사위를 가로막을 “이성의 거미줄”은 없다. 주사위 던지기는 하나의 춤추기이며 놀이이다. “하늘은 주사위 놀이를 위한 신들의 도박대”이다.
..........학자들은 가짜 주사위 놀이에 “너무 열중하여 땀까지 흘린다.”(Zl 167) 학자들이 주사위 던지는 횟수를 늘리는 것은 판단하는 데 충분한 큰 수(N)를 얻기 위해서이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주사위를 던질 필요는 더욱 줄어간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정도 큰 수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던지는 주사위는 던질수록 더 많이 던지게 되는 주사위다. 그것은 창조적인 힘의 표현이다. 던져진 주사위가 땅에 떨어질 때 힘은 훨씬 증가한다. 이제 강화된 힘은 주사위를 더 높이 던진다. “우연의 이론, 그것은 …… 끊임없이 창조적인 행동, 선택하여 스스로를 기르는 행동을 갖는 존재이다. 나는 우연적인 것의 한 가운데서도 능동적인 힘을, 창조작용을 영위하는 것을 인식하였다.”(WM; 399) 사람들은 춤을 추면서 더 잘 추는 법을 배우게 되고, 주사위를 던지면서 더 잘 던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분명 주사위는 내게로 돌아오지만 나의 신체는 다른 건강 상태로서 그것을 맞이하고 있다. 자기 자신(Selbst)으로의 귀환(Z; 193), 그것은 신체로의 귀환이다. 신체는 ‘권력’의 증가를 느끼며, 주사위를 다시 던져 자신의 힘을 표현한다.
............그 하나는 다수성이다. 다수성은 하나와 다른 하나의 차이이다.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Z; 260) 초월적인 중심은 없으며 모든 것은 각각의 고유성을 표현한다.
209. 문제만큼 커다란 위안도 기다린다.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영원회귀하는 것일까? 왜 어린아이들은 영원회귀의 놀이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위안, 가장 큰 격려, 그것은 영원회귀라는 윤리적 선택이 도덕적 명령처럼 힘든 노동이나 고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원회귀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영원회귀를 멈추지 않는가? 그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모든 쾌락(Lust) 안에서는 원환(圓環)의 의지가 꿀틀거린다.”(Z; 367) 모든 즐거움들은 ‘계속’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어떤 피로도 모르고 생성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있는 것, 영원한 자기 창조의 영원한 자기 파괴의 세계.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중의 엉욕(볼룹타스, volupsat)의 세계.”(WM; 607) 영원회귀의 유혹ㅡ즐거움.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의 원인이다. 즐거움이 새로운 순환을 불러온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은 소수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바로 즐거움(Vita femins)이라는 것을.(FW; 282)
제7장 인간 : 원숭이와 초인 사이에 걸려 있는 밧줄
210. 지구는 자신의 나이에 비하면 ‘방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인간이라는 동물의 탄생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준비해 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혹성이다. 그러나 지구는 반문한다. 내가 인간을 위해 준비된 혹성이라고? 하하! 인간이 지구의 대표라고?..........
니체는 모든 것을, 심지어 이 혹성 전체가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믿는 인간들의 오만과 허영심을 꼬집는다. 그에게 인간중심주의는 한 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자신을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개미나 모기와 다를 바 없다. 개미나 모기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 ……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별들에 있어서도 그 존재했던 시기를 측정해 보면 생명이란 한 순간에 확 타오르고 만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이 별들의 존재 목적이나 궁극적 의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MA-2; 441)
오히려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야말로 지구 위에 난 뾰루지 따위가 아닐까?(MA-2; 440~441) 아니면 차라투스트라의 말처럼 “잘 해야 대지의 살갗에 생긴 피부병”(Z; 172)이거나 “작은 구더기”(UM; 175)가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측량하기 위해 자신의 잣대를 들이미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참으로 인간은 측량하는 동물이다! “인간(Mensch)이라는 말은 …… 측량자(Messende)를 뜻한다.”(MA-2; 445)
...........이는 매우 제한된 가치만이 있는 적적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진리일 뿐이다. 그것은 진리 자체와는 상관없으며, 세계를 인간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 이해하려고 하는, 기껏해야 동화의 감정을 쟁취하는 것일 뿐이다.(WL; 203)
222.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인 신이 죽었으므로 신앙도 죽을 것이고, 따라서 좋은 삶을 위한 실천과 행동이 신앙을 대체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229.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 밤은 거대한 변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탄생한 것은 초인이 아니라 새로운 신이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나귀를 새로운 신으로 숭배하는 제의를 올린 것이다.
229. 차라투스트라는 그림자에게도 물었다. 방랑자이며, 자유로운 정신을 자칭한 자가 어떻게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는가? 차라투스트라의 그림자는 신의 죽음을 거절한다.“신의 죽음이란 하나의 편견이다.”(Z; 357)
231. 여기서 초인과 인간이 갈라진다.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인가, 극복하는 것인가? 자기 보존(self-preserving)과 자기 극복(self-overcoming)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든 가치 파괴가 일어나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미래로 가는 여행을 멈추고 싶어한다. 그들은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의 탄식을 들어보자.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Z; 365)
제8장 N개의 얼굴, N개의 철학 :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238. 니체의 여러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 영원회귀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가 계속되는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처럼 “개인은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의 주어진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만 자기를 생성시킬 수 있다.”
239.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의한 자극을 통해서 비로소 사상을 더듬어 가는 일당에 속해 있지 않다.” “허리를 내리고 배를 압박하며 머리를 종이에 처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 자”(FW; 335)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 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들어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화 불량증을 가져서도 안 되므로 강한 위장도 있어야 한다. 즐거운 소화 작용이 필요하다. 복수심이나 원한은 금물이다.(EH; 240) 이러한 독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의 괴물일 것이다. 추론하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소화시키는 괴물!
완벽한 독자를 상상해 보면 그 완벽한 독자란 항상 용기와 호기심이 어우러진 하나의 괴물로 변하곤 한다. 게다가 그는 순종적이면서도 교활하고 조심스럽다. 그는 또한 하나의 타고난 모험가요 발견자이다.(EH; 240)
247. 니체의 놀라운 긍정의 정신은 질병 속에서도 활동적인 자극을 발견한다.
전형적으로 병약한 사람은 건강해지지 않으며 애써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도 없다. 반대로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 병을 인생을 사는 데, 아니 풍요로운 생을 살기 위한 활동적인 자극으로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오랜 세월 동안의 병이 내게 그러한 활동적인 자극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EH; 197)
병균 속에서도 치료의 백신을 찾아내듯 니체는 상처로부터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치료하는 힘이란 우리가 입는 상처에도 있는 법이다. 호기심이 강한 식자들을 이해 출처를 밝히지는 않지만 다음은 나의 오랜 좌우명이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incfrscunt animi, virescit volnere virtus).’”(GD; 19)
248. 그는 “우상들에 청진기를 대듯 망치를 대고”는 두드려 본다.(GD; 20) 우상들은 충분히 튼튼한가! 가장 가벼운 몸놀림으로 가장 강력한 타격이 가해진다. 우리 시대가 높이 평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판!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한 비판! 니체는 이 모든 작업을 “현대성에 대한 비판,”(EH; 282) 혹은 “모든 가치의 전환”(EH; 296)이라고 부른다.
250. 니체는 항상 떠나는 사람이며,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ㅡ프리드리히 니체”(EH;192)
251. 그리고 “우리는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주민”인지도 모른다.(FW; 354~355) 이주민의 정착은 파멸이다. 여행자가 여행을 멈춘다면 그는 더 이상 여행자로 불릴 수 없다. 니체가 바그너의 작품 ‘방랑하는 화란인’을 비판할 때 핵심은 바그너가 사랑을 정착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여성이 그 방랑자를 숭배해서 정착시켰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영원히 방랑하기를 멈춘 것이다. 그는 결혼했다……. 그를 숭배한 여성이 그의 파멸의 근원이다.”(W; 164)
253. 이제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던가. 니체의 멋진 정의처럼 “철학이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고산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EH; 190) 그것은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Nitimur in vetitum! 철학자는 금단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다.
모든 것들이 다 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