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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남방 불교 두 고수, ‘다름과 같음’ 통했다
고우 스님-파욱 스님 공동 인터뷰
간화선은 ‘오직 화두’만, 위파사나 수행은 경전 중시
“험준하지만 짧은 길-평탄하지만 먼 길, 정상은 하나”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의 고수들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한국의 고우(74·오른쪽) 스님과 미얀마의 파욱(77) 스님이
10일 충남 공주 전통불교문화원에서 만나 공개적인 인터뷰 자리를 가졌다.
8~10일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만남과 소통’을 주제로 한
국제연찬회에서 150여 명의 참석자들을 이끈 두 스님이 마지막날 가진
공개적인 대화자리는 언어와 수행의 차이에 불구하고,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러나 각자의 수행법을 제시하는데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가톨릭과 개신교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는 석가모니를 교조로 한다는 점에선 같지만,
워낙 수행법이 달라 그 동안 상대의 수행법을 잘 인정치 않을만큼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많이 다른 가톨릭과 개신교의 사이처럼.
2600년 전 불교가 탄생한 인도에선 불교가 사라지다시피한 대신
미얀마, 타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불교 초기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
그들은 호흡이나 4념처(몸, 마음, 감각, 진리)를 관찰하는 방식의
위파사나수행(통찰수행으로도 풀이됨)과 체계적인 팔리경전(석가모니 당시의 경전)
교학 공부를 통해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존재의 원리)과
사성제(고苦·집集·멸滅·도道)와 삼법인(무상·무아·열반)을 체득해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도록 이끈다.
대승불교권에선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해 부르지만,
남방에선 자신들의 전통을 불교 교조 석가모니 가르침 그대로인
‘근본불교’(테라밧다)라고 칭한다.
반면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대사(?~528)에 의해 동북아시아엔 선(禪)불교가 전해졌다.
선불교 수행자인 대혜종고 선사(1089~1163)에 의해
다시 화두선이라고도 하는 간화선(看話禪)이 등장한다.
근본적인 의문에 봉착하게 만드는 하나의 화두(근본적인 질문거리)만 타파하면,
일거에 깨달음을 얻고, 곧바로 부처의 경지라는 간화선은
불교를 전해준 인도 못지않은 문화적 수준을 지닌 중국 문화가 나은 ‘불교의 혁명’이었다.
기독교로 본다면 전통에 충실한 남방불교는 가톨릭,
남방불교의 수행법의 혁명을 가져온 북방불교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로 비유할 수 있다.
과거의 공덕에 상관 없이 깨닫기만하면 단박에 부처라는
‘돈오돈수’는 과거의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일거에 해결하는
개신교의 구원관과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다만 개신교라도 근본주의적 보수 개신교는
남방불교가 팔리경전만을 절대시하는 것과 유사하게,
가톨릭보다 훨씬 더 ‘성서 문자 절대주의’에 빠져 있기에
간화선과 개신교는 상반되는 측면도 강하다.
어느 수행이 낫다고 단순 평가할 수는 없어
남방불교는 기존 전통과 경전을 중시하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가르침에 충실하고,
수행 지도도 자상하다. 파욱 스님 같은 지도자가 수행자들을 하루나 이틀 간격으로
개별 면담을 해 상태를 점검하고, 지도해준다.
점차적 수행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근대 선지식들은
참선 수행자들의 수행상태를 점검하고 지도해주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그런 전통이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많은 수행자들이 한국을 벗어나
남방불교와 티베트불교 수행에 나서고 있는 것은 초보자에게조차 안내지도 없이,
무작정 수행에 나서게 하는 ‘불친절한 간화선’ 수행방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북방불교에서 남방불교나 티베트불교와 같은 점검과 구체적 가르침이 사라진 것은
체험이 깊은 선지식이 거의 사라졌음을 의미한다는 분석도 있다.
다른 수행법과 달리 화두선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어야
그가 던져주는 화두가 낚싯바늘처럼 목에 걸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상태로
수승한 물아일체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도 면에서도 남방불교나 티베트불교에 비교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 불교계의 현상으로 관측된다.
미얀마나 티베트에선 대체로 스승에 대해 별 의심 없이 따르는 것과 달리
그들보다 개방된 사회이자 권위를 쉽게 인정치않는 자유로운 사상이 만개한
우리나라의 풍토에 따른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간화선이 개신교의 ‘오직 믿음’과 유사하게 ‘오직 화두’만을 강조하며
수행 과정에서 아무런 점검도 해주지 못하는 풍토에 답답해하는
간화선 수행자들에겐 남방불교 선사들이 제시하는 ‘명상의 구체적 증험들’은
사막의 단비와도 같은 갈증해소제가 아닐 수 없다.
이날 ‘고우스님과 대화’에서 파욱 스님이 전하는 ‘지혜의 빛 니밋타’와 ‘카시나 수행’ 등
명상체험 중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수행의 길에서 방황하던 이들에게 수행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줄만했다.
그렇다고 위파사나 수행이 간화선 수행보다 낫다고 단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경전을 절대화하는 교단’은 유연성과 창조성을 갖기 어렵다.
위파사나 선사들에겐 팔리경전에서 근거한
‘앵무새의 되풀이’를 들을 수 있을 뿐 그들 고유의 소리를 듣긴 어렵다.
그들에겐 1+1은 2라는 초보적이고, 충실한 공식에 따른 답변이 있을 뿐이다.
화두를 투과하면서 360도로 활짝 열려 무한 초월과 무한 창조의 세계를 펼쳐보일 수 있는
선불교의 세계에선 협량하고 답답하고 경직돼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해탈을 가장해 술과 육식 등 식습관뿐 아니라
다양한 사생활에서도 승가의 전통 규율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대자유’를 만끽하는 일부 간화선 수행자들이 남방불교인의 시선에선
‘승복만 걸쳤지 불교를 욕보이는 속인’으로 비춰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회적 문제와 체제에 대한 시각도 달라
또 하나. 남방불교는 대체로 사회적 무관심과 체제순응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파욱 스님은 ‘절대 강자였던 로마에 복종했을 때만
평화가 있는 ‘팍스 로마나’를 따르는 노예근성처럼
국민들을 핍박하는 독재체제에 말 한마디 못하고,
대홍수로 수십만이 죽는데도 중생 구제의 자비심을 보이지 못한채
독재자나 대시주자 등 강자에게만 관용하는 듯한
미얀마 불교의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세상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보내는 길 밖에, 다툼에 끼어들 순 없다”고 답했다.
이에 반해 고우 스님은 “부처님이 출가한 동기도 사회성에 있다”면서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중생을 보면서 제도의 모순을 깊이 느끼셨는데
깨닫고 난 뒤 지혜의 눈으로 고뇌했던 것을 비춰보니 해결 방법이 나왔다”고 말했다.
고우 스님은 이어 “개인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국가가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불자들이 노력하고,
고위공직자들이 자기 개인의 욕망 추구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한다”면서
“불교가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데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세속적으로 닮아가고 있다”면서 자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불교가 기독교보다 더 체제순응적인 모습을 보여왔고,
여기엔 동북아 대승불교도 예외가 아니지만
이날 고우 스님은 좀 더 진취적인 답변을 내놓은 셈이다.
위파사나와 간화선은 수행서부터 현실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코드’가 다르다.
지금까지 서로의 코드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서로가 서로를 ‘근거 없이’ 폄하해왔을 뿐이다.
아직도 한국 간화선 선승들의 상당수가 ‘닫힌 시각’ 속에서 안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열린 대화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고우 스님의 열린 사고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불교, 다른 수행법 포용해 활로는 여는 자리
두 스님의 대화는 그런 ‘차이’ 때문에 더욱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차이가 컸다.
한국 간화선가에선 성철 스님이 강력히 제기해 화제를 모았던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점차적인 수행법도 인정하지 않고,
단번에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다면 혁명적인 주장이다.
이에 대해 파욱 스님은 “부처님은 개구리가 깡충 뛰는 것처럼
깨달음을 한 번에 얻는 것은 없다고 했다”며
“깨달음은 점진적인 수행을 요구하므로
지혜를 꿰뚫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수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오후불식(오후엔 음식을 먹지않음)을 할 정도로
붓다 당시의 계율과 교학을 그대로 따르면서 수행하며 찾아오는
수행자들 각자와 개별 인터뷰를 통해 세심히 지도해주는 위파사나 선사다운 답변이었다.
그러나 고우 스님은 ‘돈오돈수론자’ 답게 “우리는 본래 부처”라고 말했다.
부처이니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 너다’라는 착각 때문에 본래 상태를 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수행이란 착각을 깨는 과정’이라고 했다.
파욱 스님이 ‘단계적 수행을 통해 고통을 소멸하고 평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면,
고우 스님은 ‘우리는 이미 부처이니 착각에서 벗어나 부처로 당당하게 살자’고 역설한 셈이다.
이와 관련해 고우 스님은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는데,
위파사나 수행자가 가는 길은 평탄하지만 멀고,
간화선 수행자가 가는 길은 험준한 바위산이지만 짧다”고 설명했다.
두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선 공통점이 있었다.
남방불교에선 고통을 완전히 소멸하면 아라한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달리 간화선에선 ‘견성(見性)즉 성불(成佛)’이다. 깨달으면 즉각 부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방불교는 수행으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봐야 아라한이지만,
간화선에선 깨달으면 즉각 부처가 된다며 우월감을 보여온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파욱 스님은 위파사나수행 과정에서 얻어주는
구체적인 선정과 통찰의 체험을 거쳐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일체의 ‘과정’을 무시하는
결과주의인 간화선보다 남다른 장점을 내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고우 스님은 “위파사나의 ‘평화로운 상태’에 이른 이를 아라한으로 보는데,
간화선사들이 말한 ‘심(心)청정’(마음청정)과 같다”면서
“부처님도 성불 후 첫번째 가르침을 편 녹야원에서 5비구를 깨닫게 한 뒤
‘여기에 여섯 아라한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아라한과 부처를 같은 경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만남은 한국불교가 다른 수행법까지 포용해
더 넓은 불교로 나아가는 활로는 여는 자리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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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고우 스님과 파욱 스님의 공동 기자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불교 진리의 핵심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파사나의 아라한의 경지와 간화선의 부처의 경지만은 영원하다는 것인가.
고우 스님 “변하는 것은 형상이다. 도인도 모양은 변한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않는다. 형상은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않는다.”
파욱 스님 “테라밧다 전통에선 아라한이 되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몸을 버리게 되면 다시 태어나지않는 것과 같다.
모든 오염원이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에 다시 중생으로 돌아오지않는다.
나무의 둥지도 다 잘렸고, 뿌리도 다 잘려 나가면
그 자리에서 나무가 다시 자랄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라한도 화를 낼 수 있는가.
파욱 스님 “탐과 진(성냄)을 다 멸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일은 없다.
의도적이던지, 의도적이지않든지 무상, 무아, 고를 철저히 보기 때문에
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화를 일으키지도않는다.
어떤 사람이 잘못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을 때도 자비희사의 평정심을 가지고 대한다.”
-당신도 화가 나지 않는가.
파욱 스님 “나는 아라한이 아니다.”
(통역하던 제타와나선원의 일묵 스님 설명
“테라밧다 전통에선 계율에 어긋나기에 대중 앞에서 자신의 수행 경지를 드러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화가 나느냐 안나느냐하는 것은
그래서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남방불교는 돈오돈수를 인정치않지만 위파사나 수행자들도 단시간에 깨닫는 이들이 있지않은가.
파욱 스님 “경전에서 금방 아라한이 된 사람이 있다는 애기가 나오지만,
전생부터 수없는 수행을 해서 사성제를 꿰뚫어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일반인들도 수행을 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는가.
파욱 스님 “가능하다. 부지런히 힘껏 닦으면 가능하다.
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이 있어야 한다.
바라밀이 약한 사람들은 정진을 더 열심히 해야한다.”
-간화선에선 우리는 이미 깨달은 부처라고 하는데, 이미 깨달은 존재라면 왜 수행을 해야하는가.
고우 스님 “착각을 깨기 위해서.”
-남방불교에선 전생 얘기를 많이 하는데,
위파사나에선 오직 물질과 정신 밖에 없다고 하면서 무엇이 윤회한다는 것인가.
파욱 스님 “무명, 갈애, 취착, 쌍카라(행), 업 때문에 계속해서 윤회를 거듭한다.
만일 다섯가지 원인을 다 여의면 그 결과도 더 이상 나타나지않는다.
5가지 원인의 카르마가 있는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윤회가 계속된다.”
고우 스님 “금생도 모르는데, 전생을 어떻게 아는가.”
-간화선의 화두와 위파사나의 호흡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가.
고우 스님 “포장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고, 적적성성(寂寂惺惺)이다.
성성만 한다든지, 적적만 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우리의 존재 원리가 성성이다. 성성이 연기로 구성돼 있어서 공(空)이다.
성성과 적적이 분리시킬 수 없다. 적적만 하면 단멸공에 떨어져있는 사람이고,
성성에만 있는 사람은 유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둘 간에 소통이 됐는가.
고우 스님 “나는 그 전부터 되어 있다.”
-팍스 로마나’를 따르는 노예근성처럼 국민들을 핍박하는 독재체제에 말 한마디 못하고,
대홍수로 수십만이 죽는데도 중생 구제의 자비심을 보이지 못한채
독재자나 대시주자 등 강자에게만 관용하는 듯한 미얀마 불교의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하느냐
파욱 스님 “세상에 온갖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잇는 것은
자비 희사의 마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보내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다툼에 끼어들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위디 투타가 잘못된 행을 했을 때
간접적으로 두 번 타일렀으나 잘못된 행동을 세번째 되풀이했을 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 업이 커져서 나왔기 때문이다.
코살라왕의 후계자가 석가족을 침입해 전쟁을 일으킨 것도 두번 타이르고
세번째는 더 이상 막지않았다. 전생에 석가족이 코살라국의 강물에
독을 풀어 사람들을 죽인 악행을 저지른 과보로 일어난 것이서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업이 익을 때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고우 스님 “그와 반대되는 얘기도 있다. 아사세가 밧지국을 쳐들어가는데,
이기겠느냐고 부처님께 물으라고 대신을 보냈다.
그 때 부처님은 그 물음엔 대꾸를 안하고, 아난에게 묻는다.
밧지국이 일이 있을 때마다 부족장들을 불러 일을 처리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처럼 민주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국가는
번성했으면 흥했지 멸망하지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얘기를 대신이 왕에게 전해 전쟁을 하지않게 했다.”
-고우 스님이 아주 아끼던 제자가 어느 순간 위파사나 수행을 하겠다고 하고,
파욱 스님의 제자가 간화선을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우 스님 “상관 없다. 방법만 다를뿐이지 지향하는 목표는 같기에. 격려해줄 것이다.”
파욱 스님 “그런 제자를 알지 못한다.”
2011. 4. 11.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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