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의 무녀리, 중동과 아프리카
‘새로운 경제학 분야의 문열이’, 광복세대의 꿈과 삶(유재우외 48인 공저),
서정시학, 2016.12.20. : 283~293
3. 중동학과 이슬람 경제학에 파묻히며
1978년 6월 국제경제연구원에 근무할 때이다. 그때 중동의 중요성이 증폭되면서 학회창립움직임이 있었다. 유정렬박사의 초청을 받고 중동학회 창립멤버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직책은 출판담당 이사였다. 그때부터 내가 선택한 학문의 길은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창립교수(Charter member)들이 회장을 일순하던 중 김ㅇㅅ 교수 회장 팀이 매우 취약해져서 서로 맡으려하지 않았다. 나는 나이야 그분들에 비해 약관이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학회를 자발적으로 맡았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추진했다. 물론 일은 열정만 있었지 쉽지 않았다.
재임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중동학회연합회(AFMA; Asia Federation of Middle East Studies Associations)의 창립이다. AFMA는 학회활동을 국제화시켜야한다는 일념 아래 일본을 드나들면서 이타가키 유조(板垣 雄三)교수를 비롯하여 일본학자들과 협의를 계속하였고, 일본을 찾는 중국의 쟈오 구오죵(趙國忠)교수 등의 지원을 받아서 내가 창립을 주도하기로 하였다. 모든 것이 국제규범에 맞아야하는데 이 어려운 일들은 송경숙 교수와 김중관 교수가 함께 해주어서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창립총회하기 전날 환영만찬석상에서 전임회장단들은 조건부로 인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과 중국이 자국의 학회 회원들로부터 인준을 받는 것을 보고서 우리도 인준을 하겠다는 것이어서 잠정적인 출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내가 남달리 관심을 가졌던 고대 김용기 교수가 전임회장들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중국에 학회가 몇 백 개가 될 터인데 중국을 대표하는 학회에서 인준을 얻을 수 없을 것을 기대하면서 출범을 저지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사연이야 어떻든지 양 학회에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고, 다행히 중국 측에서 맨 먼저 인준절차를 마무리해주었고, 이어서 일본 측에서도 마무리 해주어서 한국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몽골과 대만은 옵서버이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렇게 출범한 후 지금까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후학들이 이러한 혜택을 입고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의 중동학도 국제화에 성큼 다가서게 되었다.
AFMA 2차대회 건도 이야기 거리가 많다. 국제회의는 모금이 문제인데 회의 당일 오찬을 한국이슬람사원 본부에서 담당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전날 저녁에 공식적인 지원절차를 무시했다는 내부사정 때문에 못한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참담하였다. 어쩔 수 없이 이곳 저곳 알아보다가 구세주를 만났다. 리비아 대사관의 엘 자디 이쉬태위 참사관이 도와주기로 했다. 다만 그린 북(Green Book)에 대한 인사말은 좀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리고 오찬비용을 넉넉하게 신청을 해래서 큰 힘을 얻었다. 지금까지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한 번 국제학술대회 사연이 있는데 2차 대회는 중부권인 충청도에서 한번하기로 하고 고대 친구인 P 교수가 있는 호서대학에서 열기로 하고 1년 전부터 확인을 하였으며, 문제없어서 추진하기로 하였지만 한 달을 앞세우고 구체적인 액션으로 들어가는데 오리발이다. 그래서 건국대 충주캠퍼스에 있는 L 교수한테 부탁을 하여 잘되는 줄 알았다가 난감하게 끝났다. 다시 충북대학의 J 교수에게 부탁을 했으나 결국은 골탕을 먹었다. 수일을 남겨놓고 단국대 천안캠퍼스 장원석 교수에서 부탁하여 사정을 이야기 했다. 아! 정말 구세주이었다. 수삼일 밖에 안 남았는데 얼마 필요하냐고 해서 1000만 원 정도 필요하지만 줄여서 최소한 200만원 정도 이야기 하니까 체면이 안 서게 그렇게 쩨쩨하냐면서 2000만원으로 올리란다. 결과는 모텔 전세, 모든 식사 제공, 교통편의 제공, 충남 심대평 도지사 참석, 천안시장, 온양시장, 평택시장, 안성시장, 주변 도시의 청년회의소, 경제단체장, 모든 매스컴 동원 등등 뻐드러지게 집행하였다. 역시 그릇 나름이었다. 지금도 그 은혜 잊지 못한다.
중동경제학 개척자로서 기억에 새로운 것은 1987년 4월 요르단의 얄묵대학교(Yarmouk University)에서의 에피소드이다. 동양에 최초로 이슬람경제학을 소개한 공로로 동양학자로서 유일하게 초빙되었다(1987.4.2-11). 영어가 안통하고 아랍어 불어만 통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돈을 잘 몰라서 카세트 테이프를 큰 돈을 주고 샀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바꾸어 달래고 하니까 오리발이다. 아랍사람들 코란에서 거짓말 않는다는데 . . . 씁쓸한 추억이다. 좋은 추억은 당시 요르단의 황태자이었고 현 국왕인 압둘라 2세 이븐 알 후세인(Abdullah II Ibn Al Hussein) 요르단 국왕이 초대한 만찬에서 나와 한국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신 추억이 있다. 원래 내 성격이 남들이 기피하고 힘들어하는 일은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남다른 학술기행의 경력이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과의 만남(1989.11.18-20), 리비아의 카다피 지도자와의 만남(1999.11.29.-12.3; 2009.10.22-10.28), 레바논 난민촌 방문(2011.11.23.)이 있었다.
4. 아직도 현역인 아프리카 전문가
1983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다시 학회활동을 시작하였다. 마침 홍순남 교수를 만난자리에서 한국 아프리카 학회의 총무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다. 이 학회는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 8월 한국 국가원수로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을 공식방문 했다.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을 위한 준비과정에서 아프리카연구를 위한 전문가 들이 한국외대에 모여 한국아프리카학회를 창립하였다(1982.7.19). 초대회장에 박상식 박사(외무부)를, 부회장에 박원탁 교수(외대 아프리카문제 연구소)를 선출했다.
그 후 1983년 봄에 내가 귀국하면서 사무국을 맡게 되었다. 나는 사무국장으로서 박상식 교수를 1년, 박원탁 교수를 15년 이상 회장으로 모시고 일했다. 당시 박원탁 회장과 중앙대 하경근 교수, 나의 절친이시었던 서울대 왕인근 교수와의 갈등을 지켜보았고, 나도 1997년에 15년간 젊음을 바쳐온 임직을 놓았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정년퇴직 후에 학회장을 맡았다. 이미 정착된 학회였으므로 나의 학회장 역할은 일상적인 것이었다(제14대 회장, 2009~2011).
전문가로서의 활동은 1977년부터 시작되었다. 그중 남기고 싶은 것은 몇 가지는 유럽 및 아프리카 사업 평가단원(한국정부 청와대파견)으로 모로코, 튜니시아, 케냐, 남아연방, 보츠와나 순방, (1977.5.30-6.30); 정년 후에 아랍아프리카 센터를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서 <한국의 슈바이쳐>라는 용역도 수주하여 단행본으로 엮어 놓았다.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쳐들(2011)”; 요하네스버그의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에서 Garth Shleton 교수와 함께 한국학 개설(연합뉴스, 2013.9.30.); 모로코 “말라케시 국제안보 컨퍼런스”에 Mohammed VI 국왕의 초청으로 동양에서 유일하게 참석하여 논문 발표(2015.2.13.~14)한 것들이 랄까 . . .[계속]
첫댓글 [O2/커버스토리]100명 넘는 파견의사 발자취, 뒤늦게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지만 >>> 후속편으로 올립니다
교수님의 치열했던 학문 개척기와 생생한 역사적 발자취를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후학들에게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 글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