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의 명언이나 기사들 모아놓은 것이 있거든요.. 제가 이분 기사보고 좋아지게 된 터라.. ㅎㅎ
사진도 함께 올려드릴께요~
실력있고 성실하면 당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다.. 라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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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료가 어느 정도 끝난 후 나는 생활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화장실 바닥에 받쳐둔 양동이를 꺼내 치우는 일이 처음에는 역겨웠다. 그러나 그 냄새도 어느 순간부터 구수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자신있게 말하건데 화장실 똥 양동이를 치우면서 한 번도 비참하다거나 슬프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일하러 다닐 때로 항상 즐겁게 웃고 다녔다. 나는 궁극적으로 화장실 청소일만 하려고 이 세상에 온 사람이 아니니까, 결국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저 지금은 그 길을 찾기 위해 인생의 고비이다. 이 고갯길이 힘들지만 넘고 나면 내가 찾던 목적지가 펼쳐지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스스로 밝고 행복한 사람에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겁게 공손하게 상대하려고 한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대접을 받는다는 얘기다. 』
『 나는 요리사가 된 후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본 적이 없다. 항상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내가 일자리를 선택해 왔다. 잘난 척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기본적인 실력을 갖춘 상태에서 자신이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내가 광고하지 않아도 항상 나를 눈여겨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실력있고 성실한 사람과는 누구나 팀이 되고 싶어하고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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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사람에게는 미스터 리로 통하는 한국인이 있다. 노르웨이에 라면을 처음으로 알린 미스터 리. 머나먼 북극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을 바꾼 라면 왕 미스터리. 그는 노르웨이 최초의 한국인 이철호이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의 노르웨이 왕국. 산과 호수의 나라요, 해운왕국이기도 한 노르웨이는 산유국으로 일인당 국민 소득 이만 칠천 달러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추어진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이다. 그러나 인구 400만. 단촐하기만 한 이 바이킹 후예들의 삶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 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2000년 11월 초, 노르웨이의 북부, 인구 1만 8천명의 작은 도시 나르빅의 지방 신문에는 그 전날 있었던 학생들의 무단 결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연인 즉, 그 지역에 새롭게 문을 여는 백화점의 개업 기념 라면 시식 행사에 참석한 '미스터 리'를 보기 위해 일단의 학생들이 결석했다는 것이다. 이때 그 백화점의 라면 시식 행사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바비 인형 같은 북구의 금발 미녀들이 코믹한 외모의 이철호 씨를 둘러싸고 '미스터 리'를 연호하며 미스터 리가 직접 끓인 '미스터 리' 라면을 맛보기 위해 줄을 서고, 사인을 받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미스터 리'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의 상표이자, '라면'이라는 식품을 최초로 노르웨이에 퍼뜨린 이철호를 가리킨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말한다. 노르웨이에는 왕이 두 사람이라고. 국왕과, 라면 왕 미스터 리. 'KING OF NOODLE'로 불리우며 노르웨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철호, 팬클럽까지 있는 그의 목소리와 모습은 영화, TV, 라디오 광고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벽안의 젊은이들. 미스터리 덕분에 이들은 벌써 라면 맛에 길들어져 있다. 이철호가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개발하여 한국의 한 라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미스터 리 라면은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라면 미스터 리만큼이나 사람 미스터 리를 또한 좋아한다. 미스터 리 덕분에 북유럽의 소녀들에게도 이제는 라면이 친숙한 음식이 됐다. 그러나 10여 년 전만 해도 노르웨이에는 라면이 없었다. 그러나 국수를 좋아하는 이철호는 자기가 먹으려고 라면을 들여 왔고 혼자 먹기 아까워 라면을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하면서 마치 솥 닦는 쇠줄이나 걸쭉걸쭉한 걸레 같은 것이라고 이상한 것이라고 안 먹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것이라 1년도 좋고 2년도 좋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안 먹으면 내가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라면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해 온 것이었다.
요리사인 그에게 라면왕이라는 호칭과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 것은 바로 라면이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라면왕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판매소에 가져다 놓아도 한 쪽에 그대로 쌓여 있고, 맛보라는 라면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철호는 사람들이 귀찮아 할 정도로 꾸준히 찾아다녔다.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다. 라면이 걸레 같다며 꺼리던 노르웨이 사람들을 라면 미스터 리보다는 미스터 리를 먼저 좋아하게 만들었고, 성실하면서도 기발하고 코믹하면서도 진지한 그 자신을 좋아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라면은 절로 팔리게 되었다. 이렇게 노르웨이 사람들이 라면을 먹게 하는데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철호는 라면 세 박스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연간 8천만 개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음식으로 치부하던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라면을 먹게 한 것은 이철호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북구의 저녁 해는 일찍 진다. 오후 서너 시면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저녁때면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다. 불편한 다리로 하루 종일 서있는 이철호는 저녁이면 무척 고단하다. 그러나 그가 꾸준히 초중고를 찾아다니는 것은 젊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자기가 육체적으로 건강이 부족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머리, 이 안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루어낸 자신을 떳떳이 내보이면서. 이제 그는 초중고에서 아주 인기 있는 강사이다. 그의 강의는 젊은 학생에게 삶의 목표와 그리고 노력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한 내용을 주축으로 한다. 그것이 가능하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신념에 기인한다
인구 400만 명의 노르웨이에 연간 8000만 개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서 6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는 라면 왕이 되기까지 그는 평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천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철호는 한국 전쟁의 와중에 가족들과 헤어진다. 13살 때의 일이다. 먹을 것을 얻으려고 미군부대 주위를 전전하던 그는 구두도 딲고, 심부름도 해주던 그는 귀염을 받기 시작한다. 고등학생이던 형의 어깨너머로 익힌 몇 마디의 영어 덕분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폭탄 파편으로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치게 된다. 그러자 미군들은 그를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노르웨이의 이동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의료진들은 이철호의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전신 깁스를 한 그를 노르웨이에 데려왔다. 이렇게 그는 노르웨이의 최초의 한국인이 된 것이다.
다리를 절기는 해도 7년 간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그는 노르웨이에 남기로 결심한다. 구두닦이가 하나도 없는 노르웨이에서 구두닦이를 하면 성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두닦이를 하려고 하여도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초 학력은 있어야 했다. 고학을 시작한 그는 청소, 접시닦이, 벨보이, 변소치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며 호텔 경영학과 경영학을 배웠고 자신의 어릴 적 꿈인 구두닦이 대신 요리사의 마스터가 되었다.
이철호는 딸만 셋을 두었다. 이 딸들이 사춘기 때부터 혼자 힘으로 키우다시피 했다. 스위스에서 요리 공부를 할 때 만난 아내는 독일인이었다. 역시 요리사였던 그녀는 머나만 나라에서 온 혈혈단신 이철호를 잘 이해해 주던 사람이었다. 딸 셋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몄으나 아내는 어린 딸을 두고 먼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애들이 어느 정도 크자 아버지에게 여자 친구를 구하던지 결혼을 하라는 성화에 못 이겨 10여 년 전에 한국 여성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잃어버리고 있던 한국말을 한국인 아내에게 배워 다시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의 한국에 대한 인식과 사고 방식은 그가 한국을 떠나온 5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한국을 잊지 않으려 그가 홀로 쏟아 부은 노력은 눈물겹다. 초등학교 때의 교과서를 읽고 또 읽어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그 노력 덕분인지 교과서 내용을 모두 외워버린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노르웨이 생활 45여 년. 그 중 30여 년은 노르웨이 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우렸고, 지난 10년은 한국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기간이었다. 그는 노르웨이에 한국을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편 그는 25년 전부터 매년 11월 두 번째 금요일, 한국 전쟁에 참전한 노르웨이의 의료진들을 위한 만찬을 열어왔다. 이날은 은혜를 갚는 날이다. 아니 기억하는 날이다. 한국 전쟁 때에 노르웨이는 전투 병력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600여 명의 의료 병력을 보내왔었다. 처음 500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100여명으로 그 숫자가 매년 줄어들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지만, 왠지 허전함이 앞선다고 한다.
이철호 혼자서 이 일을 이끌 때보다는 교민회와 대사관이 함께 주최하기 때문에 많이 짜임새 있는 모임이 되었다. 이철호는 세월이 더 흘러 열남은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면 집으로 초대해서 행사를 치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이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 행사야말로 이철호의 꿈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자신의 은인인 노르웨이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두닦이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이철호. 그는 언제부터인가 노르웨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는 젊어 한때 물에 적신 빵을 먹을 만큼 가난했고, 혼자서는 걷지 못할 만큼 몸도 불편했으며 머나먼 땅에서 이방인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미스터 리. 그러나 산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산으로 갔던 그는 이제 라면 왕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한국과 노르웨이 두 개의 조국을 행복하게 해 줄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