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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초고] '전기'주권시대를 열자ㅡ'에너지 무임승차'를 끝내고 주권자의 통치로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2026-07-24
어느덧 모두의 필수품이 된 전기는 다른 에너지와 다르다. 장작이나 연탄과 다름은 물론이고 석유처럼 드럼통에 담아 국경을 넘나들며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파는 단순한 상품도 아니다. 전기는 생산과 소비가 찰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고, 거대한 물리적 송배전망(계통, Grid)이라는 단일한 생태계와 일체화되어 작동한다. 상품인 동시에 독특한 공공적 존재다.
이 거대한 혈관 같은 전력망 속에서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의 위험을 담보로 누구에게 흘러가며, 요금은 어떤 구조로 매겨지는가—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실질적인 권력 구조를 규정하는 본질이다. 이제 국민의 생명줄이자 국가의 혈관인 전기를 주권자의 통제 아래로 되찾아오는 '전기주권(Electric Sovereignty) 시대'를 이야기할 때가 왔다.
전기가 지닌 독점적 공공성
석유나 가스는 공급이 부족하면 수입처를 바꾸거나 가격 변동을 감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전기는 다르다. 만약 전력망이 마비되거나 특정 세력이 전기의 흐름을 독점한다면, 그것은 곧 국민의 생명과 경제적 자립을 볼모로 잡히는 것과 같다.
전기는 엄밀한 경제학의 의미에서 '공공재(public goods)'가 아니다. 공공재란 등대나 국방처럼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을 배제할 수 없고(비배제성), 한 사람이 소비해도 다른 사람의 몫이 줄지 않는(비경합성) 재화를 말한다. 전기는 계량기로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고, 내가 쓴 만큼 남이 쓸 몫이 줄어드는 전형적인 사적 재화다. 그럼에도 전기의 공공성은 공공재 여부가 아니라, 다음 세 가지 물리적 구조적 사실에서 나온다.
첫째, 필수재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기는 물이나 공기와 다름없는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비싸면 안 사고 말지'라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재화 앞에서, 수요와 공급의 시장 규율은 절반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둘째, 계통(Grid)의 자연독점성이다. 도로와 철도처럼 전력망은 중복 건설이 극도로 비효율적이므로 자연스럽게 독점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발전소는 여럿일 수 있어도 망은 하나다. 문제는 이 단일하고 공공적인 인프라를 누가 통제하느냐다.
셋째, 외부효과다. 원자력 발전이 품고 있는 핵폐기물의 만년 위험, 거대 송전탑이 농어촌과 지방의 삶터를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갈등—전기의 가격표 어디에도 찍히지 않은 이 비용들은 거래 당사자가 아닌 제3자, 곧 지역 주민과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는다.
남북의 두 풍경이 던지는 경고ㅡ'에너지 무임승차'의 민낯
이러한 공공적 필수재가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한국전력공사(한전) 중심의 독점구조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다. 생산, 송배전,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한전 및 발전 자회사들이 일괄 관리하면서, 전력 수급과 요금에 관한 의사결정 역시 철저하게 공급자와 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것이다.
이 왜곡된 구조의 실상은 최근 남북의 대비되는 두 풍경 속에서 드러난다. 국가의 공식 송배전망이 취약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을 통해 스스로 중국산 초저가 태양광 패널을 구입해 '밑바닥으로부터의 분산형 에너지 자급자족' 생태계를 일궈냈다. 그런데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인프라를 가진 남한에서, 대기업들은 이 최소한의 자구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국가의 송전망에 전적으로 기대어 왔다. 가장 저렴하고 품질 좋은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 '값싼 산업용 전기'는 결코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근래 몇 차례 산업용 요금이 인상되었다고는 하나, 수십 년간 세계 최저 수준의 산업용 전기가 한전의 수십조 원 누적 적자와 전력 생산과 송전 과정에서 지방 주민들이 묵묵히 감내해온 희생 위에서 공급되어 온 구조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요금보다 더 무거운 것은, 요금표 어디에도 찍히지 않는 비용이다. 천문학적인 전력이 필요한 대형 공장들은 공장 문앞까지 대용량 전기를 배달해 주는 송전선로의 구축 책임을 오롯이 국가와 공공에 떠넘겨 왔다. 발전소에서 소비처까지 초고압 송전탑을 세우며 발생하는 극심한 사회적 갈등과 토지 황폐화, 삶터의 파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기업은 그저 스위치만 켜면 돌아가는 시스템 위에 무임승차해 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요금 논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이 구조의 민낯이다.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와 글로벌 스탠더드의 격차
이 기형적인 국가 의존적 모델의 결정판이 바로 정부와 대기업이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다. 이 단지 하나가 요구하는 전력은 무려 10GW 이상으로, 원자력 발전소 7~8기를 동시에 가동해 오직 이 공장들만을 위해 송전해야 하는 비현실적인 규모다.
반면, 글로벌 IT 트렌드를 선도하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자급자족과 분산형 조달의 원칙을, 그것도 가장 각박한 입지 조건인 사막 지대에서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다. 구글은 태양광·풍력·배터리 저장장치를 데이터센터와 한 부지에 묶어 짓는 '산업단지형' 프로젝트에 2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고, 아마존은 태양광과 저장장치를 결합한 프로젝트를 총 2.3GW 규모로 운영 중이며, 마이크로소프트는 한화큐셀과 12GW 규모의 태양광 공급 계약을 맺었다. 네바다 토노파의 한 데이터센터는 태양광과 배터리만으로 아예 송전망에서 완전히 독립한 '오프그리드' 방식을 택했다.
정부가 송전망을 깔아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발전원을 확보해 사업 속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의 정상적인 규칙이다. 미국이 사막 등에서 그 답을 찾는다면, 우리는 같은 원칙 위에서 우리의 국토 조건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돌파구ㅡ영농형태양광 그리고 분산형 자립의 백년대계
우리의 국토는 비좁지만 최근의 변화는 커다란 가능성을 주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영농형태양광의 존재다. 이론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현실의 전력시장의 강력한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두 달 전 5월에 「영농형 태양광 발전사업의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해 실경작자 중심의 제도적 틀도 마련되었다. 이제 막 문턱을 넘은 이 제도가 토대가 되어, 농지 위 상부 공간에서 '햇빛소득'이 창출된다. 새로운 농가 수익원이 국가 전체의 분산 에너지 공급 기반을 넓히는 자산이 될 것이다. 백년대계로의 발상의 전환을 단행할 때가 된 것이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자가 스스로 조달하고 책임진다'는 수혜자 부담 원칙이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닥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해 다음 두 가지 해결방안이 떠오른다.
* 미착공 수도권 부지의 용도전환: 이미 착공된 생산 라인을 되돌리기는 어렵더라도, 아직 계획 단계에 있는 대규모 부지는 전력 소비가 극심한 대규모 제조 공장 대신 다른 용도(가령 R&D 센터, 반도체 설계 허브, AI 소프트웨어 및 바이오 융합 단지)로 형질을 전환하는 방안이 있다. 토지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고 인재 확보의 이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길이다.
* 신규 생산 라인의 분산에너지 거점 배치: 막대한 전기와 물이 필요한 신규 생산 공장은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풍부하여 전력이 남아도는 호남 등 분산에너지 거점으로 배치한다. 발전소 바로 옆에 공장을 짓는 직결 방식을 택하면 초고압 송전탑을 새로 건설할 필요가 없으며, 송전 손실을 제로에 가깝게 줄일 수 있다. 이는 글로벌 무역 장벽인 RE100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달성하는 유일한 열쇠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칙을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도 분명하다. 신규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거나 대형 데이터센터를 허가할 때 '자체 분산형 에너지 조달 비율 의무화'라는 빗장을 거는 것이다. 수혜자 부담 원칙을 선언에 그치지 않고 인허가의 조건으로 못 박을 때, 비로소 무임승차의 관행이 멈춘다.
"민영화/자유화가 답이 아닌 이유"
다시한번 짚어보면, 기업의 자가조달과 발전소 옆 직결 방식, 농민의 영농형 태양광과 햇빛소득—앞서 제시한 처방들이야말로 한전 카르텔 체제보다 훨씬 급진적인 발전의 분산이요 개방이다. 세계 전력산업의 표준 설계 역시 정확히 이 구별 위에 서 있다. 경쟁이 가능한 발전과 판매는 열되, 경쟁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송배전망은 공공 또는 강한 규제 아래 두는 것, 이른바 '언번들링(unbundling, 부문 분리)'이다.
망을 두 개 깔 수 없는 이상, '누구나 만들고 파는' 시장조차 결국 단일한 망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 망의 접속 순서와 이용 요금과 투자 우선순위를 누가 정하느냐가 시장 참여자 전원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다. 발전은 활짝 열되, 만인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망만큼은 특정 세력의 것이어선 안 된다.
통신과 석유의 민영화를 살펴보자. 통신강국의 토대는 민영화가 아니었다. 1995년부터 국가가 주도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계획이 먼저 있었고, KT 민영화(2002년)는 그 기반이 깔린 뒤의 일이다. 민영화 이후에도 통신은 주파수의 국가 소유, 요금 규제, 보편적 서비스 의무가 걸린 강규제 산업으로 남아 있다. 석유는 더 간단하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석유는 드럼통에 담아 저장하고 수입처를 바꾸고 시장에서 사고파는 재화다. 저장할 수 있고 운반할 수 있기에 시장 경쟁이 온전히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기는 생산과 소비가 찰나의 오차 없이 일치해야 하는, 저장이 지극히 어려운 '흐름'이다. 병렬 망이 가능한 산업과 저장 가능한 상품의 성공담은, 단일 망에 묶인 저장 불가능한 흐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물성이 다르면 제도도 달라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력산업 판매경쟁에 따른 요금제의 다양성은 확보될 필요가 있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기본 구조로서, 간헐성을 공급이 아닌 수요조절로 대처함으로써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이런 경제적 수단은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전력산업을 종속산업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규제가 아니다. 특정 대기업이 수도권에 공장을 짓겠다고 하면 국가와 한전이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 송전선을 끌어다 바치는 구조—전력 수급 계획 전체가 대기업 제조업의 종속변수로 전락해 있는 현실이야말로 예속의 실체다.
수혜자 부담 원칙과 자가조달 의무야말로 전력을 이 예속에서 독립시키는 길이며, 재생에너지와 저장장치와 분산형 계통 기술이야말로 전력을 근간산업으로 세우는 실체다. 미국 빅테크가 사막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권자의 손으로 전력망의 빗장을 풀어라
'전기주권'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소수의 관료와 거대 공기업 카르텔이 독점해 온 전력 수급 계획, 송전망 운영, 요금 산정의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되찾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전기사업법은 원전을 몇 기 지을지까지 확정하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정부 안의 심의회가 '심의'하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는 '보고'만 하도록 짜여 있다. 주권자는 애초에 결정의 방 바깥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이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국회가 일차적으로 심사할 수 있도록 하고, '기후시민의회' 처럼 가칭 '전기시민의회'도 구성해서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과정을 통해 깨끗한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의사결정의 주도권과 책임을 국민이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전기료의 변화도 감당할 마음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밀양할머니들도 한을 풀 수 있지 않겠는가.
전기는 자본의 상품이 아니며, 관료의 통제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온 국민이 함께 누려야 할 현대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공유부(Common Wealth)이자,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이제 한전 카르텔의 빗장을 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전류가 전력망 구석구석까지 흐르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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