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姜邯贊)의 구명(舊名)은 은천(殷川)이며 금주인(衿州人)이다. 5세조(祖) 강여청(姜餘淸)이 신라로부터 시흥군(始興郡)에 와서 살게 되니 곧 금(衿)이다.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은 태조를 섬기어 삼한 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강감찬이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략(奇略)이 많았는데 성종(成宗) 조에 갑과(甲科) 제1에 발탁되어 거듭 자리를 옮겨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 현종(顯宗) 원년(元年)에 거란주(契丹主)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려 서경(西京)을 칠 새 아군(我軍)의 패보(敗報)가 이르니 군신(群臣)이 항복하기를 의론하거늘 강감찬이 홀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는지라 걱정할 바 아닙니다. 다만 중과부적이니 마땅히 그 봉(鋒)을 피하였다가 천천히 흥복(興復)을 도모할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왕을 권하여 남행(南幸)케 하였다. <현종(顯宗)> 2년에 국자 좨주(國子祭酒)에 천배(遷拜)되었다가 한림 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재전(再轉)하고 중추사(中樞使)에 승진하여 사직단(社稷壇)을 수리(修理)하기를 청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의주(儀注)를 의정(議定)하게 하였으며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고쳤다. 강감찬이 전(田) 12결(結)을 개령현(開寧縣)에 두었는데 왕에게 사뢰어 군호(軍戶)에 주게 하였고, <현종> 9년에 서경 유수(西京留守) 내사 시랑(內史侍郞) 동 내사문하 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를 제배(除拜)할 때 왕이 손수 고신(告身)을 쓰면서 말하기를, “경술년(庚戌年) 중에 노진(虜塵)이 있어 간과(干戈)가 깊이 한강변(漢江邊)에 들어올 때에 당시(當時)에 강공(姜公)의 계책을 쓰지 아니하였던들 나라가 온통 좌임인(左人)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니 세상이 많이 영예롭게 여겼다. 거란의 소손녕이 내침(來侵)할 적에 군사를 호왈(號曰) 십만(十萬)이라 하였다. 때에 강감찬이 서북면 행영 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되었는데 왕이 명하여 상원수(上元帥)를 삼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으로 부(副)를 삼고 내사사(內史舍)인 박종검(朴從儉)과 병부 낭중(兵部郞中) 유참(柳參)으로 판관(判官)을 삼아 군사 208,300명을 거느려 영주(寧州)에 주둔케 하니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騎兵) 1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 안에 복병(伏兵)하고 큰 줄로 우피(牛皮)를 꿰어 성동(城東) 대천(大川)을 막아서 기다리다가 적이 이르자 막았던 깃을 트고 복병을 발(發)하여 크게 패배(敗北)시키니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경성으로 나아가거늘 강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에 추급(追及)하여 또 대패(大敗)시켰고 시랑(侍郞)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쳐서 10,000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다. 이듬해 정월 강감찬이 거란병(契丹兵)이 경성에 핍박(逼迫)함으로 병마 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병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길을 두 배로 걸어서 입위(入衛)케 하고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도 또한 군사 3,300명을 보내어 응원하였다. 이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漣) 위주(渭州)에 이르거늘 강감찬 등이 엄격(掩擊)하여 500여급을 베었고 2월에 거란의 병사가 귀주(龜州)를 지나매 강감찬 등이 동교(東郊)에서 맞아 싸우는데 양군(兩軍)이 서로 견지(堅持)하여 승패(勝敗)가 결정되지 못하였는데, 김종현이 군사를 끌고 달려 오고 풍우(風雨)가 문득 남으로부터 와서 정기(旌旗)가 북으로 향하매 아군(我軍)이 세를 타서 분격(奮擊)하여 용기가 스스로 배가(倍加)되니 거란병(契丹兵)이 분패(憤敗)하는지라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니 강시(尸)가 들을 덮고 부획(浮獲)한 인구(人口)·마타(馬駝)·갑주(甲)·병장(兵仗)은 가히 다 헤아릴 수 없고 살아서 돌아간[生還] 자는 겨우 수천인이니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은 없었다. 거란주(契丹主)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손녕을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경시하고 깊이 들어갔음으로 이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연후에 죽일 것이다.” 고 하였다. 강감찬이 3군(軍)을 거느리고 개환(凱還)하여 부획(浮獲)한 것을 바치니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여 채붕(綵棚)을 맺고 악(樂)을 갖추어 장사(壯士)를 향연(饗宴)하고 금화팔지(金化八枝)를 친히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고 왼손으로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잔을 잡아 위로하고 칭탄(稱歎)하기를 마지 아니하니 강감찬이 배사(拜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역명(驛名)을 고쳐 흥의(興義)라 하고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주어 주현리(州縣吏)와 같이 하였다. 강감찬이 상표(上表)하여 노퇴(老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궤장(杖)을 하사하여 3일에 한번 조회(朝會)케 하고 검교 태위(檢校太尉) 문하 시랑(門下侍郞) 동 내사문하 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食邑) 300호(戶)를 더하고 추충 협모 안국 공신호(推忠挾謨安國功臣號)를 하사하였다. <현종> 11년에 또 상표(上表)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매 이를 듣고, 특진 검교 태부(特進檢校太傅) 천수현 개국자(天水縣開國子) 식읍(食邑) 500호(戶)를 더하였다. 강감찬이 경도(京都)에 성곽이 없으므로 나성(羅城) 쌓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따라 왕가도(王可道)로 하여금 그것을 쌓게 하였다. <현종> 21년에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배(拜)하였다.
○ 덕종(德宗)이 즉위하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추충 협모 안국 봉상 공신(推忠協謨安國奉上功臣) 신 특진 검교 태사(臣特進檢校太師) 시중(侍中) 천수군(天水郡) 개국후(開國侯) 식읍(食邑) 2,000호(戶)를 제수(除授)하였으나, 곧 죽으니 나이 84세였다. 3일간 철조(輟朝)하고 인헌(仁憲)이라 시(諡)하였으며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회장(會葬)케 하고 조뢰(吊賴)와 부증(賻贈)은 일체 시중(侍中) 유진(劉瑨)의 예에 의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어떤 사신이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왔다가 큰 별[大星]이 인가(人家)에 떨어진 것을 보고 이(吏)를 보내어 가서 보니 마침 그 가부(家婦)가 사내를 낳았다고 하므로 사신이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겨 앗아와서 양육하니 이가 강감찬이 되었다고 한다. 재상(宰相)이 됨에 미쳐서 송사(宋使)가 그를 보고는 불각중(不覺中)에 하배(下拜)하고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아니한 지가 오래더니 이제 여기 있도다.” 라고 하였다. 강감찬은 성품이 청검(淸儉)하여 산업(産業)을 영위(營爲)하지 아니하였고 체모(體貌)가 왜루(矮陋)하고 의상(衣裳)이 구폐(垢弊)하여 중인(中人)에 넘지 아니하였으나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서 대사(大事)에 임하여 대책(大策)을 결정함에는 홀연히 방가(邦家)의 주석(柱石)이 되었다. 때에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하며 중외가 무사하니 사람들이 강감찬의 공이라고 하였다. 치사(致仕)하고 성남별장(城南別莊)에 돌아가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을 짓고 또 《구선집(求善集)》을 지었다. 뒤에 현종 묘정(顯宗廟庭)에 배향하고 문종(文宗)이 수 태사(守太師) 겸(兼) 중서령(中書令)을 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강행경(姜行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