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지나고 있다. 설날 그러면 가장 먼저 떠오는 것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이다. 귀성길(귀경길), 온 식구들 모여 세배하고, 조상을 추모하며, 맛있는 떡국을 나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덕담도 나누고 말씀도 나누며 은혜도 나눈다. 설날을 맞이하여 생뚱맞은 질문하나 해보려 한다.
설날을 전후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끊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염려다.
앞으로 한국 사람들의 최고의 고민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나 예외가 없다. 청소년은 진로에 대한 불안이 있다. 청년은 미래 직업에 대한 불안이 있다. 장년은 다니는 직장에 미래와 자녀에 대한 미래, 퇴직 후 40-50년의 미래 불안이다. 그래서 앞으로 인사말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미래는 안녕 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현대인들을 향하여 선포하는 중요한 진리의 말씀이다. 본문 말씀을 정리해 보면, 온전한 신앙고백의 필요성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 천대에 이르는 은혜를 입던지 아니면 그를 미워하여 당장에 멸망을 받든지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9 上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즉 유일신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신과 견줄 수 없는 하나 밖에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들어보지도 못하고, 보지 못한 수많은 신들을 접하게 될 터인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 성자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세상 모든 신위에 가장 뛰어난 신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여호수아 2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두 정탐군은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게 되는데 이 사실이 누설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여리고 왕에게 보고된다. 이에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지만 라합은 이미 그들에게 발각되기 전 두 정탐꾼을 숨기게 된다. 그리고 잡으러 온 그들마저 따돌리기까지 한다. 정탐꾼들이 눕기 전 라합은 지붕에 올라가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고 한다.
라합이란 여인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처럼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곧 자신이 섬겼던 저급한 지역신들과는 달리 하늘과 땅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은 너희에게 주신 줄 내가 안다는 고백과 함께 내가 너희를 선대한 것처럼 너희도 내 아버지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라합은 단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듣는 것만으로 이같은 놀라운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여리고 백성들 중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은 많았지만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본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불신앙으로 멸망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라합이 진리를 향해 얼마나 열린 귀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도 믿는 라합의 순수한 신앙은 참으로 복되다. 어떤 신앙 고백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이 달리지고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라합의 신앙 고백에서 우리도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 이신가를 깨닫고 믿어야 할 것이다.
:9 中-10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다니엘서 9장에는 다니엘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은 자복하며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라고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에 대한 분명한 삶의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이행하시며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지체치 아니하시고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신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정의다. 도대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뭘까?
줄리어스라고하는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줄리어스의 꿈에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손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가에 대해 자랑을 했다. 그러자 그 손님이 줄리어스에게 열심을 보여 달라고 했다. 줄리어스는 서슴치 아니하고 자기 품에서 열심 덩어리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줄리어스의 열심덩어리를 받은 손님은 지니고 다니던 저울에 그것을 달아보더니 “100근(60kg/ 16,000돈)이군요.”라고 했다. 줄리어스는 내심 너무나 기뻤다. “내 열심히 100근이나 되다니...” 그런데 손님은 열심덩어리의 구성분자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열심 덩어리를 세세히 분석한 후 그가 말했다. “야심 20%, 의심 19%. 명예심 30%, 기타 28%,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단 3%도 안 되는군요.”
마태복음 22장 35절이하의 말씀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질문 한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론적으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물어보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모습을 증거하기 심히 어렵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피상적이고 이론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때로 깊은 것 같으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 뿐이고 내용이 아닌 외식과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천대에 이르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연애 시절을 돌이켜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생각나고, 안보면 보고 싶고, 함께 있을 때 헤어지기 싶지 않고,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한다. 머리에서 온통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질 않는다. 자식 사랑하는 부모의 맘도 마찬가지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늘 자녀들을 생각하며 산다.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비유를 들어 설명을 덧붙인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생각이 온통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돈보다 사업보다 자녀보다 욕망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그 분을 뵙고 싶어 일주일을 기다리며 준비한다.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연애편지 삼아 읽다보니 송이꿀보다 더 달고 주옥같다. 그분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싶어 쉬지 않는 기도를 드린다. 그분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어 몸으로 예배하고 맘으로 헌신하며 물질을 아낌없이 드리기도 한다. 물질 가는데 마음도 간다고 한다.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 한다. 그리하면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맞다.
평양성의 최권능 목사님께서 한 번은 평양 시내에 나아가서 닥치는 대로 전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일본 헌병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최 목사님 앞으로 왔을 때 큰 소리로 느닷없이 “예수 믿고 천당!” 하였더니 이 헌병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펄쩍 뒤는 바람에 일본 헌병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일본 헌병은 경찰서로 최 목사님을 끌고 가서 매를 때리는데 한 번 매를 치면 “예수!”, 두 번 치면 “예수!”하고, 세게 치면 크게 “예수!”, 약하게 때리면 작게 “예수”하였다. 때리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봐! 이 목사야! 너는 어떻게 건드리기만 하면 ‘예수’ 소리만 나오는가?”하고 물었다. 그 때 최목사님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네! 나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예수만 꽉 차 있기 때문에 건드리면 예수만 나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고 했다고 한다. 예수님이 가득 차 있는 최권능 목사님은 일본 헌병의 매로는 어찌할 수 없어서 내보내고 말았다고 한다. 정말 예수님 한 분이면 다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분명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말씀을 순종하려면, 내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하시고, 그 분의 말씀에 의해 늘 좌우되어야 한다. 허나 막상 말씀에 순종하려다 보면 우리에게 말씀이 없는 걸 깨닫게 된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볼 때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혈기 하나 참지 못하여 자주 버럭 버럭한다.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소화하지 못하고 밤을 하얏게 새우는 경우도 있다.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네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하셨지만 정말 내 몸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있는냐는 물음 앞에 묵묵부답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부족으로 그분의 말씀도 기억지 못하고 순종은 더더욱 하지 못한다.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하여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천대에 이르는 은혜를 받았으면 한다.
요한복음 21장 15절로 1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심에 베드로의 마음을 깊이 찔렀으며, 잠재하였던 사랑의 강렬한 움직임을 일으켜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는 진심어린 고백이 있었다. 예수님의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신 물음에는 크고도 깊은 의미가 잠재하고 있고, 감격한 움직임이 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처럼 물으신다면 난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