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간 중 기억나는 일들
흐틀에서
몽골에 간 둘째 날 흐틀이란 곳으로 가서 잤다. 울란바토르에서 북서쪽으로 260km쯤 떨어 져있는 인구 일만 명쯤 된다는 마을인데, 이 정도면 몽골에서는 작은 마을이 아니다. 아파트가 많이 있는 마을이었다. 예의 그 칙칙한 색깔의 아파트인데 5층씩 되는 아파트가 여러 동 모여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저녁 때로 현지 시간으로 8시쯤 되었는데 물이 없어 밥을 못한단다. 식당에서 사 먹었는데 몽골 요리를 사람마다 제각각 시켜서 서로 맛을 보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10시쯤 되었나 보다. 어둠이 찾아온 지 그리 오래지 않았다. 한 여름에는 9시 반에 해가 진다는데 내가 있을 때는 8시 반쯤 되어 해가 졌다. 북구로 갈수록 해가 길다는 것은 실감할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는 한국보다 위도가 10도 정도 높은데 여기는 세 시간 정도 더 북쪽으로 왔으니 해가 더 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녁도 늦게 먹고 어둠도 늦게 찾아왔으나 실상 밤은 깊은 것이다.
밤하늘의 찬란한 별은 어릴 적 고향에서 보던 그 별들이다. 그러나 이곳은 하늘이 가까운 것처럼 별이 가까이 보인다. 고도가 아주 낮은 곳에도 별이 보이는 점이 한국과 매우 달랐다.
여관이라고 정해준 곳을 가니 아파트 1층으로 러시아 여자 같이 생긴 여주인이 방을 안내해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그렇기도 하겠지만 인사도 없고 웃음도 없고 도대체 서비스 정신이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상점도 다 그런 식이다. 사려면 사고 말라면 말라는 태도다. 사회주의 국가의 잔재가 여러 곳에 남아 있음을 보았다. 방도 작고 지저분하다. 화장실은 목사님과 조장로님이 든 방에는 있으나 우리 방에는 없었다. 공동 화장실과 공동 세면실을 사용했는데 손님을 받을 수 있는 방은 3-4개 정도였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 중간길을 걸어 교회로 가는데 돼지가 눈에 띈다. 방사를 해서 그런지 살은 별로 붙지 않아 마치 멧돼지 같다. 주둥이로 땅을 잘 파헤친다. 길을 걷는 동안 온 동네 사람들이 출근을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거나 마당 앞에 나와 있는데 우리는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그들은 우리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다. 잔뜩 경계하는 것 같은 눈치다. 우리의 옷차림을 보고 아마 이방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밤에 여관에서 잘 때 누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말라고 했던 것이 이해가 되지만 한편 너무 경계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초록색을 칠한 버스가 출근길 승객을 가득 태우고 지나가는데 서울버스와 개포동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차량 상태가 비교적 양호해 보인다. 반가웠다.
교회에 도착하여 이틀간 외벽을 도색하는데 참여하여 열심히 페인트 칠을 했다. 하얀 외벽이 노란색으로 바뀌니 교회가 따뜻해 보인다. 이 교회는 제일교회에 다니는 집사님 부부가 헌금한 돈으로 세운 교회이다. 작년에 헌당 예배를 했는데 날이 추워 제대로 도색을 못한 것을 올해 다시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가 있었다. 모여든 아이들이 50명쯤 되었는데 내가 어릴 적 초등학교 교실안의 풍경과 매우 닮아보였다.
흐틀을 떠나던 날 아침 흐틀 남쪽에 있는 자그마한 산에 올랐다. 흐틀 주위에선 가장 높은 산이다. 불과 15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니 전망이 좋다. 동남쪽을 제외하곤 시계가 백리는 될 것 같다. 육지에서 이렇게 넓은 곳을 조망한 것은 내 생애에서 처음일 것이다.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에는 그 넓음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정상에는 돌무더기 성황당과 기둥이 네 개인 정자처럼 생긴 성황당이 있고 예의 그 푸른 천들이 누더기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웬 청년 하나가 있어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내가 아는 몽골어가 별로 없어 인사나 하고 통성명하는 정도였다. 내가 한국 사람이란 것과 초원의 광대함에 대해 몸짓으로 대화를 했는데 서로 조금 떠들긴 했지만 사전이라고 갖고 올라갈 걸 그냥 올라가 아쉬웠다. 청년에게 단소로 찬송가와 민요 3-4곡 불어주고 박수를 받았다. 청년이 먼저 내려온 뒤 두 성황당 사이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며 잠시 기도를 했다. 괜히 성황당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느꼈다.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
몽골에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와 살고 있었다. 대부분 울란바토르에 살고 있겠지만 대략 5천명 정도라고 한다. 선교사와 그 가족을 포함해 선교 목적으로 와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 가족이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족의 학생들이 다닌다는 MK 스쿨에 유초중학생 130여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50가정 이상이 선교사와 관련된 사람들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나머지는 대개 사업차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주로 하는 사업은 식당, 술집, 카페, 노래방 등인데 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한편 몽골에 온 한국인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사기꾼이거나 이런 저런 사연이 있어 이곳까지 왔다는 말이 사실일 것도 같다.
우리가 머물렀던 코리아나 호텔 사장은 부산 사람이라고 하는데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적으나 아직도 독신이었다. 부산 사투리의 구수함을 몽골에서 그 사장을 통해 들었다. 그림도 많이 수집하여 사무실에 걸어 놓았는데 그림에 대한 조예와 애착이 많은 사람이었다. 호텔에 찾아오는 손님 가운데에도 목사, 선교사가 많아서인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았고 책도 많이 읽은 것 같았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도 많이 하고 이단 사설에 대한 것도 주워들은 것이 많았다. 얼마나 입담이 좋은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Hummer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강변까지 함께 타고 나가 많은 얘길 나누었는데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으로는 뭔가 채워지지 못하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듯한 느낌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룻 저녁은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단고기를 시켰는데 맛이 담백하고 좋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북한 가수가 노래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고, 전축에서는 북한 가요가 흘러나왔다. 손님이 적어 좀 한산한 편이었는데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종업원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떠나기 전날에는 춘천 식당이란 간판이 보여 일부러 찾아가 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도 춘천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는 후평동에서 왔다고 한다. 주방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는 우리 아파트 옆 현대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어 왔을 것이다. 코리아나 호텔 사장처럼 세상의 만고풍상을 다 겪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선교사 자녀들이 다닌다는 MK 스쿨을 찾아갔더니 학교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유초중 학생이 130명쯤 된다는데 교사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라도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단기 선교팀에 다녀온 사람의 권유로 2년간 휴직하고 이곳에 와서 학생을 가르치는 30대 후반의 초등학교 교사가 학교를 안내해 주고 홍보 자료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필요한 것이 교사인데 이곳에 와 헌신할 수 있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 평안 교회에서 만났던 명퇴하고 몽골에 와서 평신도 선교사로 일하는 어떤 수학 선생님도 이 학교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분은 나와 동갑인데 몽골 단기 선교를 왔다 퇴직을 10여년 앞두고 감동을 받아 이곳에 와 헌신한다고 한다.
교사 출신의 이 두 사람 얘기를 듣는 동안 나도 이곳에 와 선교사로, 교사로 일하고 싶은 충동도 잠시 느껴 보았다.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도전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선교는 영적 전쟁이며 소명과 헌신과 뒤에서 기도해 주는 분들이 없이는 힘든 일이라며 선교의 어려움을 말해 줄 때 과연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감상에 젖어 일시적 충동으로 올 일은 아니란 생각과 건조하고 공기가 탁한 울란바토르 같은 곳에서는 평소에도 자주 앓던 비염 때문에-사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비염이 발생하여 코에 딱지가 않으며 양쪽 코가 다 막히고 재채기가 나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고생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곳에선 살기 어려워 선뜻 가겠다는 생각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몽골은 내가 간다면 할 일은 많은 곳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선교사님들 자녀를 가르치는 일, 몽골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등은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몽골 대학 같은 곳에서 나의 경력으로 교수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봉급은 월 2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차피 돈을 바라고 일할 수 있는 곳은 아니기에 몽골에서 생활한다면 한국에서 받는 봉급이나 연금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부부가 함께 간다면 모를까, 아니면 주님의 강력한 부르심이 있다면 가야겠지만 아직은 조금만 관심이 있는 정도라고 봐야할 것 같다.
테르지 국립공원에서
울란바토르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곳에 테르지라는 국립 공원이 있다. 강도(강이라기보다는 개울) 흐르고 숲도 있으며 기암괴석도 많았다. 겔에서 자며 몽골 문화도 체험할 수 있고 말도 타볼 수 있는 곳이다. 초원만 펼쳐져 있던 곳과는 달리 제법 자연 경관이 다양하다. 강물을 걸어서 건넜는데 얼마나 물이 찬지 발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 물이 흘러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간다는데 사람들이 모여들며 자꾸 오염시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관광객 중 상당수가 한국 사람들이다. 개울가에서 취사도 했는데 아무래도 사람이 모이면 쓰레기가 쌓여 강을 오염시킬 것이다. 하루에 수십 대의 차량이 강을 건너는데 중간에 멈춰서는 일이 허다하다. 아주 맑고 깨끗한 강이 얼마 가지 않아 오염될 것이 뻔하다. 초원에서 한 시간 가량 말을 탔는데 안장이 잘못되었는지 타는 자세가 나빠 그랬는지 엉덩이가 다 까졌다. 그래도 말 타는 재미에 아픔도 잊었지만 한동안 쓰라렸다. 9살 정도된 아이가 말을 타고 관광객들을 인도한다. 가끔 ‘천천히’란 말을 쓰며 관광객들의 말을 제어하기도 한다. 몽골인들이 말을 잘 탄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겔에서 하룻밤을 자며 몽골의 자연과 문화를 이해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몽골의 지폐
몽골의 화폐는 모두 지폐다. 10원짜리부터 2만원짜리까지 있다. 10, 20, 50, 100, 500, 1000, 5000, 10000, 20000 이렇게 9가지나 된다. 10, 20, 50원짜리는 좀 작으나 나머지는 크기가 거의 같다. 크기로는 구별이 어렵고 색깔도 구분이 쉽지 않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마다 화폐를 두툼하게 꺼내 놓고 계산을 하려니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한움큼 꺼내면 종업원이 알아서 세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돈을 너무 두둑히 가지고 다니는 것 때문에 한국인들이 도둑들의 표적이 된다는 말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화폐 인쇄도 몽골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경제 규모나 낙후성도 화폐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