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상한 영화를 봤다. 나는 애니메이션에 익숙하지도 않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많은 애니메이션의 팬들을 봤고 거기에 미치는 사람들 마저도 봤다. 과연 만화에 그럴 수 있을까 했는데 마침 져패니메이션의 위대한 신화라는 애니메이션인 고전,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 관한 소문을 듣고 보았다.
만화의 장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의 리얼리즘을 벗어나서 어떤 꿈의 나래를 펴는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상상의 세계를 접고 사실 묘사만 따라가는 만화라면 그것은 죽은 만화임에 틀림이 없다. 최근의 <마리이야기>가 무겁고 단순한 얘기를 전개하면서도 몽환적인 판타지 세계를 펼쳐보임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 싶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이웃집 토토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만화들을 크게 좋아하고, 오시이 마모루(인랑, 아바론, 공가기동대)의 만화들에서는 크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전자는 따뜻한 동심의 세계를 그리며, 후자는 존재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깔면서 우울한 비극적 미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 우리 정서에는 다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보여지는 실체들은 뭐든지 분명한게 없다. 이것이면 이것, 저것이면 저것 식의 분명함이 없다. 대부분의 존재들은 경계에 놓여있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 인간과 인조인간의 경계, 육체와 정신의 경계.....이런 식이다. 아마 이건 포스터 모더니즘식의 표현이지 싶다. 우리는 <경마장 가는 길>에서 그런 모호함으로 당황한 적이 있다. <공각기동대>는 줄거리는 해커와 사이보그 테러 진압부대인 공각기동대의 대결을 그리고 있지만, 흑백이나 선악처럼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것은 경계에서 태어난다.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 식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공각기동대>의 뛰어난 작품성은 그런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액션의 멋들어짐에 있는 것도 아니다. <공각기동대>는 인간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존재론적 사유가 철학적으로 스며있는 깊이를 보여준다. 공각기동대의 특수대원 쿠사나기 소령은 뇌의 일부분만 제외하고 전신이 기계인, 즉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다. 또 그는 겉은 여성이지만 파워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라 여성과 남성의 경계에 서 있다. 그는 항상 "나는 인간일까?" 라는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문에 사로잡혀 있다.
쿠사나기 소령의 반대편에는 비물체인 인형사가 있다. 나는 이 영화의 최고의 신비로움이 이 인형사의 존재로 인해서 빚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원래 정보부에서 만들어낸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즉 육체라는 형체가 없고 정신적인 무형의 어떤 힘이다. 인형사는 컴퓨터 회로 사이를 떠 돌면서 수많은 정보에 의해 하나의 마음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인형사의 자궁은, 정보의 바다인 사이버 스페이스다.
<공각기동대>는 육체는 있지만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 쿠사나기 소령, 마음은 있지만 육체가 없는 비물체 인형사가 결합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 정체성에 관한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야 만다. 존재의 문제,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대단히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이 영화는 이런 점 때문에 공상과학 애니메이션의 고전이란 평가를 받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전개되면서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사는가?,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이 영화는 만화라는 형식을 빌리면서 존재론에 대해 얘기하는 하나의 철학서적과 같다. 우리가 이런 근원적인 의문을 갖지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신 레드 라인> 이후로 영화에서 깊이 느껴보는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