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분은 "위엄 있는 그 모습 고요하기도 하다"라는 뜻이다.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호대 如來若來若去하며 若坐若臥라하면 是人은 不解我所說義니
何以故오 如來者는 無所從來며 亦無所去일새 故名如來니라
"수보리야! 만일 어떠한 사람이 있어 말하되 "여래가 혹 오고 혹 가며 혹 앉고 혹 눕는다" 하면
이 사람은 나의 설한 뜻을 알지 못함이니, 어찌한 연고인고?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으며 어디론가 가는 바도 없다.
그런 고로 여래라고 이름하나니라.
" 거래좌와(去來坐臥)는 우리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래를 거래좌와 한다고 말을 하면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현실적으로는 분명 거래좌와를 하는데 그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의두요목 1조에서 부처님은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왕궁가에 오셨다고 하였듯이,
여래라는 말은 오는 것 같지만 온 것은 아니다.
도솔천에 있는 마음상태와 왕궁가에 있는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고 본질적으로 같다는 뜻이며
이를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하여 여여한 그 자리를 뜻한다.
부처님은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다.
현실적으로 오면 분명 온바가 있고 가면 분명 간바가 있지만은 성품자리에서는
거래좌와가 끊어져 분별이 끊겨 있다.
부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 성품자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여래의 반대는 여거(如去)이며 이는 거래의 자유를 얻은 상태를 말한다.
대산종사 법어 법위편에서는 "천여래 만보살의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리에 토가 떨어져,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느니라"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거래의 자유를 얻어 올 때 멋지게 오고 갈 때 멋지게 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어서만 그런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거래의 자유를 얻어 어딜 가든 어디에 있던지 마음에 변화가 없어야 한다.
공부가 덜 된 사람은 장소나 환경이 변하게 되면 거기에 구속되어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바깥의 외경에 끌리어 항상 시비이해의 분별을 놓지 못하고 늘 괴로움속에서 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여래가 와도 온바가 없고 가도 간바가 없다는 것은 소유의 개념이 확장된 상태를 말한다.
범부 중생의 소유 개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한정되어 있지만
부처님은 시방세계를 자신의 소유물로 삼는다.
이를 다른 말로 개인적 자아를 사회적 자아로 확장시킨 다는 것이다.
'나'라고 인식하는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으로 남편·아내·부모·경찰관·기관장 등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사회적 자아라고 한다.
이렇게 소유 개념의 확장과 자아 개념을 확장 시켜 나가게 되면 우주만유와 하나가 되어
'나' 아닌 것이 없게 되고 결국 무아(無我)를 이루게 된다.
서양의 진리관은 시작과 끝이 있고 동양의 진리관은 시작이 없기 때문에 끝도 없다.
이를 생사와 연관시켜 보면,
나이 들어 생사 법문을 들을때 빨리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가면 오는 이치가 있고
오면 가는 이치가 있음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
이 거래하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해탈에만 그치지 않고, 내가 죽어서 잘 오고, 성불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