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운동의 개혁과 중세교회의 타락
(A,D. 673-1295)
수도사들의 열정은 지칠 줄을 몰랐다.
인간 구원을 향한 그들의 사역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글이 없는 나라의 글자를 개발하기도 했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하는 수도원의 규울을 훈련받으며 삶을 불태웠다.
개혁의 빛을 비추며 일어났다가 비난의 화살을 맞으며
시들어간 수도원 운동은 계속 반복되었다.
영적으로 갈급한 시대에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수사들에 의해 성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떤 탁발수도사들은 교황의 가르침이 바른 길이 아님을 알았고
어던 수도사들은 청빈을 외치며 병자들과가난한 자들과 생을 함께했다.
교회의 권위와 전통적 가르침들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질문들이
대학에서 나타났다.
사람들은 제한된 울타리에 가두었던 교회법은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인간의 이성에 도전받기 시작했다.
6세가와 7세기를 거쳐 잉들랜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와성한 선교 활동과 수도원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제 다시 섬에서 대륙으로 퍼저나가게 되는데 잉글랜드로부터 보니페이스와 같은 선교 수도사들이 게르만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
기 시작했다.
보니페이스는 사역의 기지로 베네딕트 수도원을 이용했다.
먼저 수도사와 수녀들이 선교 지역에 들어가서 작은 신앙공동체를 시작했다.
수도사들의 앞선 농사 기술과 높은 생산력은 현지 이교도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관심이 자연스런 대화로 연결되면서 수도사들은 전도하기 시작했다.
보니페이스는 독일에서 신이라 불리는 신성한 나무를 베어버리는 일로 그 사역을 시작했다.
그가 도끼를 내려치자마자 광풍이 불어서 거대한 참나무를 쓰러뜨렸다.
이광경을 본 원주민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을 버렸다.
보니페이스는 그 나무를 잘라 예배당을 지었다.
사역이 더 커지자 보니페이스의 여동생 리오바는 영국에서 11명의 수도사와 수녀들을 데리고 온다.
수도사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말씀을 전하는 동안
수녀들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신자들을 훈련시켰다.
774년 보니페이스의 영향으로 풀다대수도원이 독일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여러 세기에 걸쳐 위대한 문화적, 종교적 중심지가 된다.
나붕에 슬라브족과 스칸디나비아 선교 사업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진행된디ㅏ.
그런데 8세기 유럽에 너리 퍼진 베네딕트 수도원엔 수사들이 귀족 출신들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귀족들이 어린 자녀를 수도원에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국 수도사들의 육체 노동시간이 줄고 예배와 문화적인 활동이 많아지는 쪽으로 변화되었다.
학문적, 예술적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 8-10세기 까지 위대한 수도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라이히나우, 성 갈렌, 코르비의 수도원 들은 당시 유럽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 였다. 그 수도원들은 저마다 큰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들은 고대의 문학과 학문을 후대에 전해 주기 위해서 많은 사본을 베끼는 작업을 했다.
고대 라틴어 산문이나 시의 대부분은 이러한 수사들의 노력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수사들의 작업은 매우 창조적이어서 아름다운 글자체와 삽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6-8세기 사이에 수도원들은 그들이 자리잡고 있는 사회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특히 수도원장과 수사들은 그 지역의 귀족 가문들과 사이가 깊었진다.
왕과 유력자들은 그들에게 토지를 주었고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수도사들의 생활은 신앙적인 열망으로 뜨거웠던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농업 생산량에 더 관심을 가졌다.
8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수도원 개혁을 시도하지만 쉽지 않았다.
817년 아니안느의 베네딕트는 엄격성을 강화하고 매일 근로 신간을 늘이는등 나름대로 애썼지만 수도원 개혁은 실패했다.
클르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그 후 150년간 수도원의 형편은 매우 좋지 않게 변했다.
야만족인 바이킹과 사라센 족과 마쟈르인의 침입으로 많은 대수도원들이 파괴되었고
수사들과 그들이 이룬 문화적 유산들이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950년까지 이어진 수도원 파괴와 쇠퇴 그리고 여러 가지 혼란스런 요소는 개혁의 필요를 절감하게 했다.
10세기의 개력은 910년에 설립된 클루니 수도원과 관계가 깊다.
클루니 수도원은 프랑스 아키텐의 공작 윌리엄 3세의 영지에 세운 수도원이다.
그는 당시 교회의 쇠퇴가 수도원이 귀족들에게 예속된 탓이라고 여겼다.
공작 윌리엄 3세는 자신의 재산을 수도원장에게 양도했다.
또한 자신은 물론 그 어떤 주교도 수도원에 간섭할 수 없게 했다.
클루니 수도원의 수도원장만이 신앙공동체에 권력을 행사할수 있었다.
클루니 수도원의 초대원장 브루노는 베네딕트의 규칙을 엄격히 적용하여 수도사들을 훈련한다.
수도원의 엄격한 생활이 신자들에게 알려지면서 자발적인 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브루노 원장의 개혁 의지가 알려지면서 많은 수도원이 그에게 책임을 맡겨왔다.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은 점점 확장되어 나갔다.
클루니 수도원은 훌륭한 수도원장들로 인해 더욱 견교하고 강력한 개혁의 힘을 발휘했다.
10세기와 11세기에 걸쳐 성 베르노, 성 오토, 성 아미아르, 성 이글로, 성 오딜로, 가경자 피터 등의 수도원장이 유명하다.
성 오딜로(994-1048)원장 시절엔 클루니 수도원 소속이 무려 2천개가 넘었다.
클루니 수도원의 경건함은 프랑스, 부르고뉴,이탈리아, 스페인, 영구으로 보급되고
중세 사회의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럽의 시민들은 클루니 수도사들을 기준으로 성직자와 감독들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성직자들의 경건함을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은 로마의 감독 베르노가 로마 교회 감독의 직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이상 교회가 왕권에 휘둘려선 안된다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것이다.
그레고리오7세를 비롯하여 개혁에 열의를 보인 교황이나 주교들은 거의 이 수도원 출신들이었다. 클루니 수도원에서 수사의 일과는 거의 전부 예배와 기도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예배당을 가능한 한 장엄하고 화려하게 또 엄숙한 분위기로 꾸몄다.
거기에 발전되 성가곡들까지 더해져서 클루니 수도원의 예배는 세속인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반면에 학문적 연구나 신앙심을 강화하는데는 약했다.
예배와 기도가 중시된 화려한 종교의식에 치우쳐서 형식적인 면으로 흐르게 되었다.
또한 기중된 토지들이 늘어나서 클루니 수도원은 점점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13세기에 들어서는 클루니 수도원도 처음의 개혁 정신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862년 모리비아(체코의 동부)의 군주 라스티스라프는 동방 교회의 황제 미카엘 3셍게 요청을 한다. 오늘날의 체코인 조상인 모라비아인은 아시아로부터와서 유럽 동부 전역의 평원에 퍼진 슬라브인들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포티우스는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사들 중에서 헬라인 형제를 임명한다
시릴(827-869)
메도디우스(826-885)
시릴과 메도디우스 형제는 마케도니아에 정착한 슬라브족 가까이에서 자라 슬라브족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선고에 앞서 시릴은 성경을 모리비아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그때까지 글자가 없던 슬라브어의 알파벳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글라골루 문자로 알려진 이 글씨체는 유럽 남동부와 러시아에서 오늘날 사용하는 글자로서 동생의이름을 따서 시릴체라고 한다.
이것을 본 로마와 독일 선교사들은 그들의 작업을 반대했다.
성경과 예배에 쓰이는 언어는 거룩한 라틴어로 해야 한다며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형제는 868년 로마를 방문한다.
로마 주교는 그들의 요구를 허락해 준다.
대신에 그들의 사역이 교황청의 통제를 받으라는 것이 조건이된다.
그러나 시릴은 사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868년)
형 메도디우스가 계속해서 번역 작업을 완성했다.
이들 형제의 사역으로 인해 정교회와 비잔티움 문화가 슬라브 민족들에게 퍼졌다.
특히 수세기 동안 러시아인들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시릴과 메도디우스를 슬라브민족의 사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 형제의 성공은 오래 가지 못하고 처음 3년동안의 성공으로 끝나버렸다.
마쟈르인들이 모라비아 공국의 침입하여 멸망시킴으로써 장기적인 결과들을 잃어버렸다.
결국 이 지역 교회들은 동방 교회가 아니라 서방 카톨릭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고 두 형제의 사역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추방당한 슬라브족 사제들은 불가리아로 도피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슬라브어 성경과 전례서들을 보급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비잔티움 정교회에 충성하게 된다.
불가리아의 황제 보리스는 시릴의 추종자들이 불가리아로 도피해 오기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선교사들의 도착과 더불어서 불가리아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도왔다.
그리고 870년엔 총대주교하에 독립적인 교회 조직을 가질 수 있도록 불가리인들은 슬라브어로 진행되는 그들의 예배 의식서에 대한 승인도 받았다.
이렇게 정교회의 독특한 형태가 동유럽에서 세워졌다.
바로 지역 언어를 사용하는 국교회이다.
또한 927년 불가리아 교회의 대표주교는 대주교의 수준에까지 올라갔다.
슬라브족의 동방 기도교는 9세기 후반에 세르비아에도 전해지게 된다.
세르비아 교회는 슬라브 민족 가운데서는 세 번째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14세기엔 루마니아를 정교회로 이끈다.
시릴과 메도디우스의 사역은 불가리아가 슬라브 민족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게 하는 큰 열매를 거뒀다.
----만화,한눈에 읽는 교회사----발췌
중세교회 신비주의 운동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