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사람 반열에 들다
박 동조
풍경 1
젊은 여인이 유모차를 밀고 간다. 그 옆에는 열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유모차에 바짝 붙어 재잘거리며 걸어간다. 다른 말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고 “오빠야가.......” 하는 소리만 귀에 쏙 들어온다. ‘아하, 동생이 여자아이인가 보네.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저리 바짝 붙어 말을 걸며 갈까! 다정한 오누이의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얼핏 스쳐 지나려는데 자연히 눈이 유모차로 향한다. 맙소사! 머리에 리본을 단 하얀 털의 푸들 한 마리가 유모차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이가 오빠야가 어쩌고저쩌고 한 것으로 강아지는 암컷 푸들임을 알겠다.
‘어쩌다 개가 사람의 항렬에 올랐을까?’ 혀를 끌끌 차다가 ‘아차, 이러면 꼰대지.’ 생각을 고쳐먹는다. 세상이 변했다.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면 덜 떨어졌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늙는 것도 맞갖잖은 마당에 꼰대 소리를 들어야 쓰겠는가.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정이 제 각각이니 문제다.
강아지 유치원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개는 친구 개와 어울려 소풍도 가고, 미용실에 가서 털을 손질하고 마사지도 받는다고 한다. 전용 장례식장이 생기고, 삼일장을 치러주는 견주도 있다고 한다. 개의 제삿날을 기념하기 위해 병영에서 휴가를 받은 장병의 이야기는 개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보여주는 예다. 이 시대는 개 팔자가 어지간한 사람 팔자보다 낫다.
마당에서 한뎃잠을 자는 개는 키워 봤어도 실내에서 함께 생활하는 반려견을 키워보지 않은 내게는 이런 사례들이 이해 불가다. 어쩌겠는가. 손녀까지 강아지 동생을 두었으니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어머! 강아지가 너무 예뻐요!” 걸음을 멈추고 괜스레 말 몇 마디 툭 던진다. 여인과 아이는 생면부지 할머니가 영혼 없이 하는 말에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는다. 저들은 내가 마음속에 이는 생각이 불편하여 억지춘향이로 강아지가 예쁘다고 한 사실을 알기나 할까.
풍경 2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유모차를 밀고 간다. 오르막이라 더 힘들어 보인다. 힘을 보태드리려고 다가가는데 덩치 큰 개 한 마리가 유모차에 버티고 있다. 돕고 싶은 생각이 확 달아난다. 우화에서나 나올법한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할머니가 작은 개도 아닌 큰 개를 유모차에 태우고 가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개가 어디 아프나요?”
발을 다쳤다는 소리를 기대하며 여쭈어본다.
“아니요, 내가 걷기 힘 드는데 저는 오죽 힘들겠어요.”
“?”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를 알겠다. 이런 경우에 딱 적합한 말이 아닌가! 이쯤 되면 저 개는 개가 아니다. 자식이다. 이래도 애처롭고 저래도 안쓰러운 자식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친다. 개가 자식의 반열에 오르기까지의 할머니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할머니의 나날은 분명 외로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을 다독여주는 유일한 존재가 개였으리라! 마음을 고쳐먹고 할머니 곁에 나란히 서서 유모차를 힘주어 밀려는 찰나, 개가 벌떡 머리를 치켜들더니 이빨을 드러내고 맹수처럼 으르렁거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기세에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낸다. 얼른 뒷걸음쳐 유모차에서 멀찌감치 물러서는데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린다.
“이 아이가 나 말고는 유모차에 손을 못 대게 해요. 데끼, 순돌아, 그럼 안 돼!”
개를 반려 가족 삼아 살아가는 독거노인 얘기는 방송에서 자주 보았다. 그들의 특징은 개에 의지하고 사랑은 주어도 사람의 항렬에 올리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이 개를 두고 ‘엄마가’ ‘아빠가’ 하는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할머니가 방송에 나오는 가정을 해본다. 개를 사람의 반열에 올리는 정도가 아니다. 이만하면 개가 사람의 위에 있지 않은가? 자신보다 덩치 큰 개를 꼬부라진 몸으로 유모차에 태우고 가는 광경이라니, 토픽감이 따로 없지 싶다.
풍경 3
오랜만에 친구 집을 찾았다. 맨 먼저 달려와 꼬리를 쳐야 할 콩이가 보이지 않는다. 콩이가 어디 갔느냐는 내 말에 친구의 대답이 기상천외다. 치매에 걸려 제 방에 가뒀다고 한다. 개도 치매를 앓느냐는 물음에 인간이 하는 건 다 한다며 암에도 걸리고 우울증 앓는 개도 있다고 한다.
콩이가 있는 방문을 여니 훅 끼치는 개 냄새에 토가 날 것 같다.
“치매에 걸리니 똥오줌도 못 가리네.”
친구는 눈만 뜨면 녀석을 목욕시키고 향수를 뿌려보지만, 냄새를 잡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든다. 인기척에 반응하는 녀석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개도 건강을 잃으니 쳐다보는 눈길에 초점이 없다. “얼른 죽으면 덜 불쌍하련만, 목숨이 질기다”며 자신이 힘 드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녀석이 고생하는 건 못 보겠다고 울먹이는 친구의 모습이 왜 내게는 희극처럼 보일까?
개를 키울 때 선결과제가 배변이다. 콩이는 똥오줌을 화장실 문만 열어놓으면 저 혼자 들어가 바닥 한쪽에 깔아놓은 마포에 싸서 친구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붙임성도 좋아서 가족과 친한 사람은 금방 알아보고 따랐다. 나도 녀석이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콩이에게는 희한한 버릇이 있었다. 제가 사람인 줄 아는지 친구의 침대에서 네 다리를 위로 올려 사람처럼 누워서 잤다. 딱하게도 친구의 순해터진 남편은 콩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려 아내가 자는 침대 근처에 얼씬도 못 했다. 손등을 물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요즘에야 그런 개를 훈련하는 정보가 넘쳐나고 방송 프로그램도 많이 생겼지만, 콩이가 젊은 개였을 때는 해결 방법이 없었다.
이십여 년 전만 해도 개의 수명이 십 년을 넘지 않았다. 개 의학이 발달하고, 사람의 공간에서 살고부터 수명이 늘어나 지금은 이십 년을 더 사는 개도 있다고 한다. 태어나 일곱 해가 지나면 노화가 시작된다니 장수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닌 것은 개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개도 늙으면 기억력이 떨어진다. 이빨이 빠지고, 귀가 멀며, 시력을 잃기도 한다. 죽는 원인도 암이나 당뇨가 많다고 한다. 재롱둥이 콩이가 치매를 앓을 줄 친구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사람과 오래 치대어서일까? 콩이는 다른 개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대신 가족에게는 온갖 재롱을 떨고 관심을 기울였다. 식구 중에 귀가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올 때까지 현관에서 머리를 박고 기다렸다가 모두가 돌아온 뒤에야 친구의 침대에 올라가 잠을 잔다고 했다. 어찌 이게 개냐고, 친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었다. 그런 콩이도 나이를 먹으니 기력과 총기가 함께 사라졌다. 어쨌거나 콩이는 태어나고부터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으니 사람의 잣대로는 팔자 좋은 개였다. 에구! 상팔자면 뭐하나. 견생 말년에 치매라니! 사람 세상이 아닌 개 세상에서 살았더라면 치매에 걸리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2022울문학 봄호)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핵가족화로 인한 외로움 때문일까요?
개인주의로 인한 인간관계의 단절 탓일까요?
이런 현실이 슬프네요.
저도 통탄하는 현실을 시원하게 꼬집어 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