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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의 산중산담 山中山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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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정맥, 기맥, 지맥 기타 스크랩 대간 12구간 18차 : 백학산 구간 - 중화지구의 속살 상주땅에 들다
초보산꾼 추천 0 조회 31 15.01.25 14: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450온누리 산악회  백두대간 18차 12구간 :  큰재에서 신의터재까지 

 

언제 : 을미년(15년) 하늘연달  스물사흘 쇠날 밤  ~  스물나흘 흙날 (무박2일) 
누구랑 : 대간5기 산우님들         

어딜 :  큰재 개터재 윗왕실재 백학산 → 지기재 신의터재

                           23 km (바다사랑 대장님 공지내용)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대한이 소한의 집에 놀려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은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그래도 대한인데 이번만은??

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하고 혹시나 했지만 올 해도 역시나 대한은 소리 없이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소한이 얼린 얼음 대한이 녹인다는 속담도 있듯이 이는 이제 서서히 만물이 생성하는 봄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도 된다

그래도 아직은 많이 남아 있는 겨울, 길이 얼어붙고서야 걸을 수 있는 길이 얼마나 행복한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수많은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엊그제 내린 눈 소식도 있고 하니...

아무리 대간길중에서도 가장 산높이가 낮은 지역이라 해도 조심 또 조심을 생각하며 대간길을 떠나 본다

 

백두대간 12구간 등로

 

 

상주 삼백(누에,쌀,곶감)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고 옛날에는 신라의 두번째 도시였고 삼국시대의 중요한 격전지였다.

이미 속리산 구간에서 봤던 견훤산성등 후삼국시대의 또 하나의 영웅 아자개와 그의 아들 견훤의 주 활동 무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주와 상주를 합하여 8도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경상도의 지명에서 보듯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역활을 하였던 지역이기도하다.

낙동강의 어원을 알면 상주가 옛날 부터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다.

洛東江  洛(물 낙)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뜻인데, 洛은 삼국이전 유명한 伽倻로 불리워진 駕洛國의 본거지인 洛陽리라고도 불리웠던 尙州이다.

또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팔역지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상주와 선산에 있다"라고 할 정도 였다.

그런 역사적 사실에 비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은 왜 이렇게 큰 흐름을 잠시 멈추어야 했는지 상주속으로 들어가 보자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260 에 있습니다

신곡리 이정석과 백두대간 생태학교가 있는 큰재에 도착하고

큰재(우하재)  해발 300m    영동군 모동면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

이 재는 행정구역상 상주시 모동면 신곡리에 속한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상남실과 하남실로 나뉜다. 고개마루에까지 논이 올라와 있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고개마루에는 폐교가 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를 '부산 녹색연합 생태학교' 겸 '백두대간 교육센터'로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숲생태원>이 세워져 있다.

상주 공성면 于下里는 봉우리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백두대간 생태교육학교 건물 안으로 산행 시작

 

회룡목장 갈림길을 지나고

 

17차 대간길 국수봉에서 본 대간 마루금과 좌측으로 모동면의 산줄기 속에 상판저수지가  있는데 보이진 않는다 - 미리 자료사진을 남김

 

이 구간은 야간에 진행하는 관계로 앞선 구간에서 미리 국사봉에서 상주의 공성면과 모동면의 비교를 위해 자료를 남겼다

국사봉에서 대간길 옆으로 이어지는 공성면의 넓은 논들을 사진에 담아 놓은 이유는

지금이야 논농사가 예전처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쌀이 주식인 만큼

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물인데 물이란 흐르기 때문에 물을 가둘 저수지가 필요했다

막상 물이 필요한 이곳 공성면의 너른 땅에는 저수지를 만들 수가 없으니...

 

대간 마루금 낙동강 방면의 공성면 방향의 너른 들녘엔 정작 물이 필요한데...

 

그래서 나온 묘책이 상주시 최대 저수량을 자랑하고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고 금강으로 흘러가는 상판저수지가 있어

모동면에 있는 상판저수지의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산 밑으로 수로를 뚫어 공성면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다

아주 낮은 산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이지만 물은 산을 넘을 수 없다는 해답을 이 대간구간에서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주고 있다

또한 도경계기능을 잃어버린 대간길로 인해 상주시의 땅이니 금강의 물을 낙동강으로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어둠속에서도 공성면 방향은 사람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반대편 좌측의 모동면 방향은 어둠이 더욱 짙기만 하다

상판저수지 :

백두대간상 상주 서쪽을 가로지르는 능선 아래 공성면과 모동면 경계에 위치하며 상주시 최대 저수량를 자랑하고 농업용수로 사용하는데,

상판저수지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물이지만 상주시 소유라하여 산 밑으로 수로를 뚫어 상주시로 돌려 놓아 금강이 낙동강으로 흘러가게 한 독특한 경우이다.

정작  물이 필요한 낙동강쪽은 물이 없으니 수로라도 뚫을 수 밖에.....

 

회룡재

회룡재 :

상주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마을에서 봉산리 회룡마을로 통하는 임도

마을 뒷산의 봉우리 형상이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는 龍의 형국이라 回龍이라 했다고.

임진란 후에 생긴 마을로 芮氏(예씨)와 옥천全씨가 많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엊그제 내린 눈이 우릴 반긴다

 

옛고개라 쓰여있는 개터재

개터재 :

상주시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과 효곡리 큰마 마을을 잇는 해발 380m로,  민초들에게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할 날짐승들이 많이 살았기 때무에 개터재라 하는가 하면

산세의 모양이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생태통로가 있는 윗 왕실재 - 5분정도 윗왕실마을로 내려가면 식수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윗왕실 :    상주 공성면 효곡리와 외납면 소상리를 이어 주는 도로

윗왕실에는 최만재라는 조선시대 고종때의 젊은이의 지극한 효행에 관한 전설을 들을 수 있는데,

한겨울에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싶어해 정성껏 기도하니 꿈에 노인이 나타나 참외가 있는 곳을 랄려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묘살이를 할 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3년간 곁에서 지켜주었다니, 효에는 끝이 없는가  보다. 

 

특히 경북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왕실촌은 해월 최시형과 관련하여 천도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해월은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공주와 삼례, 그리고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을 여기서 지도하며

보은 장내리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운동도 여기에 살며 지도했다고 한다

 

 

 

또한  효곡리(孝谷里)에 조선 중기의 학자 송량(宋亮:1534∼1618)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효곡재사(孝谷齋舍)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딸 일가족 다섯이 모두 효행이 지극해 그가 살던 소곡()리를 효곡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이젠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 충효의 근본을 생각해 보게 하는 구간이 되고 있다

 

 

역시 높이만큼 눈길이 답해주고 있는 백학산 240m 이정표가 있는 백학산 직전봉에서 좌틀

 

백지를 깔아 놓은 듯 눈에 의해 덮인 세상을 보았는가?

비록 얇은 백지지만 덮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덮어주고 감싸주기도 하지만 때론 위험도 감싸 버린다

우리가 산길을 걷고 있으니 산길만 덮고 있는 것은 아니다

편견과 오만, 갈등과 아집 그리고 분노와 증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덮어버리니

흉할 것도 더러울 것도 남 눈치 볼 것도 없는 우린 순백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3450온누리산악회 백두대간팀이 남긴 흔적들

 

자연이 주는 선물인 순백의 설원이 꼭 이 세상을 가리기 위한 것 뿐 일까?

우리는 설원을 걷다보면 하얀 백지위에 뭔가 그림을 남기고픈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서 맘속에 담아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아님 그것도 싫으면 그대로 들어 누우면 훌륭한 나의 자화상이 된다

 

역시 눈으로 덮혀 있는 백학산

 

순백의 설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위에 새롭게 그림을 그리라는 뜻도 함께 있음이다

그래서 한해가 가고 오는 계절에 눈이 내리는 것이다

수천의 맘속 길을 가진 인간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도 어렵기에 자연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걷고 있고 또 길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라도...

 

백학산에서의 단체사진 - 사진 : 니고나오님

白鶴山 :

유래는 찾을 수 없지만, 정상에서 윗왕실마을을 바라보면 백학산이 마을을 마치 학이 알을 품은 듯 감싸안은 형세로

이런자리를 풍수지리에서는 包卵之勢로 불리는 명당의 터라는 뜻인데 풍수지리에서는 으뜸으로 치는 명당이다

그래서 그런지 왕실촌,효곡천,봉산촌등 주변 마을 이름들이 생겨났나 보다.

 

상주시 내서면의 아침

 

새해 첫 산행에서 보지 못했던 일출의 아쉬움을 달래 듯 오늘의 최고봉 백학산에 오르고서야 여명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라고 하늘이 준 어둠이 걷히고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이라는 또 다른 하루의 시작

우리들의 생에 다시는 어제라는 시간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허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가버린 하루, 아니 가버린 하루 동안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

 

 

다가온 오늘보다 어제의 시간 속 어둠 속에 잠시 묻어 두었던 사사로운 내 잘못들이 다시 깨어나며

하나 둘 떠오르는 항상 잘 살았던 기억보다 잘 못 산 것이 더 많이 생각나는 것 역시 평생을 살아도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것이다

서서히 떠 오르는 여명이 조금씩 어둠을 사라지게 한 뒤에야 온 세상에 밝은 빛을 줄 수 있듯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애착보다 우리 마음을 조금씩 버려야 하는 마음에 충실하는 것만이 최선임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갈수록 낭만의 멋까지 함께 보여주시고 이런 감성적인 면까지...  니고나오 감사님

 

우리가 살다보면 언제나 후회의 연속이다. 단지 우리가 모르고 세월을 흘러 보낼 뿐이다

백지 같은 순백의 설원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고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기에 때론 아예 다시 그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남겨진 위에 또 다시 눈이 내리면 아예 덮어 버리고 미련 없이 되돌아보지 말고 흔적만 남기고 길을 떠나자

 

나뭇가지에 남겨진 눈방울들을 점점이 찍어놓아  화가의 멋진 작품을 보는 듯

 

 

새해의 시작도 마무리를 해야 하는 세모의 시간들도 겨울에 내리는 흰 눈에 의해 덮여지고 새로 쓰여 진다

너무 벅차 지우기 힘든 과거의 기억들, 아픔, 슬픔, 회한들을 덮고 새로 희망을 쓸 기회

그래서 우리는 이 겨울이 주는 눈이 다 녹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인생의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지우거나 다시 쓸 기회가 사라지나니...

 

눈에 핀 벗꽃?

 

임도가 나오면서 식후경

 

식후경 후 다시 산행 시작

 

우측으로는 게머리재로 연결하는 도로와 함께 하고

 

좌측으로는 백학산에서 갈라져 나온 별봉으로 알려진 성봉산 줄기와 함께 한다

성봉산(星峰山. 572m)

이곳 여산 송씨의 왕신마을에 살았던 이조시대 점성가가 성좌를 보고 마을 뒷산에서 예언을 하여 불리 웠다가 후대에 별봉산이라 개칭했다고 한다

 

눈에 덮여 있는 백화산(?)이 멀리 눈을 뒤짚어 쓰고 있다

 

개머리재

개머리재(소정재)상주 모서면 함박골에서 원소정으로 넘어가는 901먼 지방도에서 49번 도로로 이어지는 도로

산세가 개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개머리재라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소정재라 불리기도 하는데,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소정리라 하였다고 하는데, 큰 규모의 연못 앞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큰못안마을 있는 것을 보면

마을에 정자가 아니라 연못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한표를 던지고 싶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조금만 정신차리면 길을 염려는 없다. 지기재 직전 대포리의 안심산 갈립봉이라 쓰여져 있다

 

앞에 보이는 금은동마을 뒷산으로 가기 위한 내림길이 빙판이 되어 있어 어려움을 준다

 

시원하게 앞이 조망되면서 지기재와 금은골의 지기재동 마을 뒷산인 은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장실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지기재

지기재 (旨起峙) 260m    석산리 지기재동과 대포리를 잇는 고개

도적들이 많아 통행하는 민초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던 곳으로 賊起재라 불렀으나 사투리를 따라 지기재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지기재는 다른 재처럼 고도감을 느끼지는 않으나 지기재에 올라서면 동과 서가 확연히 가려지는 분수령임을 확인 할 수 있는 분수령이다

 

지기재동 마을 직전 산속으로 진입

 

다시 마을길로 내려와

 

은왕봉으로 이어진 금은마을 길을 따라간다

금은마을 :

모서면 금은마을은 원래 검은마을이었다고 하는데 앞봉인 395.4봉에 흑연광산이 있었기에 이 동네가 온통 시커먹었다고 한다.

듣기가 그다지 좋지 않아 금은 마을로 했다고

모서면의 牟(소울음소리 모)자인데,  대간 3기 때 구제역의 여파로 생?같은 소들이 묻히는 아품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 땐 정말 마음이 무거웠는데 또 다시 오리에서 고병원성 인플랜자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어 시간이 지났을 뿐 걱정은 계속 뿌리를 문다

 

다시 산속으로

 

오목불록한 부분이 없어 미끄러운 바위구간을 슬랩구간이라 하는데 흑연광산이 있었던 곳이라 검은 바위를 띄고 있는 미끄러운 바위로 생각한 듯 하다.

 

 

은왕봉 능선을 만나면 좌측으로 - 신의터재 2.8km 남았다고 한다

 

앞이 트이면서 멀리 설악산이 육안으로는 조망되는데 ...

 

보이나요?

 

철탑도 지나고

 

드디어 오늘의 날머리로 오르는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오늘의 날머리 신의터재

 

신의터재 이정석에서 단체사진 - 니고나오님

신의터재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의현"이라 불리었는데, 임진왜란 때 김준신이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뒤 물리치고

임진 4월15일 장렬하게 전사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 터재로 불리웠다고 한다.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으로 상주시 내서면 어산리에서 이름을 따서 어산재로 바뀌었던 신의 터재가 제이름을 되 찾은 건 광복50주년을 맞은 96년의 일이다.

신의 터재 인근 화동면 판곡리에 낙화담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 김준신의 가족들이 왜병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몸을 던졌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담 구간에 자세히 만나 봅니다

 

신의터재에 신의터재의 유래가 된 김준신 의병의 유적비가 남겨져 있다

 

신와 장목상 선생의 치산 공적비도 세워져 있다 - 어찌 됐든 치산치수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니 : 뒷면에 내용이 있다

4대강 사업도 치수인가? ㅋㅋ   돈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돈줄기가 말라 버렸으니...

 

화령시장으로 옮겨 뒷풀이

 

상주의 화북,화서,화동,화남지역(령현)과 상주의 모동,모서면지역(머현)등 상주목 이 두 지역을 합쳐

중화지구대라 불리워진 백두대간 서쪽 충북땅으로 깊숙히 침범한 지역을 말하는데

그 화령현의 화서면 신봉리에 있는 시장으로 다음 구간에 상세히 만남니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행정명은 화서면이지만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화령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뒷풀이 장소 - 주인이 직접 산에서 채취한 자연식으로 차린 음식이 일품이었다

 

이렇게 주인장의 친절과 맛이 일품인 음식에 대간식구들의 건배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 본다

 

본격적으로 중화지구인 상주땅으로 깊숙히 들어가 본 백두대간길

세상 참으로 많이 변했다고 하나 이렇게 직접 전국을 돌아 다니지 않고 피부로 느끼는데 한계가 있다

한반도 가운데 있으면서도 오지중의 오지중의 한 곳이었던 화령(화서)면

그러나 지금은 중부내륙고속도로에다 당진영덕고속도로까지 뚫리면서 더욱 가까워지면서 대간길도 그만큼 빨리 시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높지 않은 산세에 대간식구들의 산행실력이 쉬지도 않고 진행할만큼 너무 빨라

대장님은 2~3시에 도착 예상했는데 뒤풀이 끝나고도 겨우 2시

후미를 담당한 이 초보산꾼이 혼자서 후미산우도 되고 후미대장도 되고

혼자 붓치고 장구치고 놀다 온 기억으로 남게 된 18차 백학산 대간길이 그래서 더욱 맘에 남을 듯하다

 

일찍 도착한 만큼 일찍 시작된 야간산행에 길어진 야간산행만큼 아침 식후경까지 배고픔을 느껴야 했던 긴긴 어둠속 시간

적은 인원이지만 식후경에서 보여준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나오는 아침 풍경은 아직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거기에 대한을 넘기면서 이제는 봄을 준비해야 하는 만큼 따뜻했던 날씨까지 축하해주고

이미 멋진 가을 산행으로 마무리 했던 속리산까지 멀리서 손짓으로 우릴 축하하는 마음 전해주고 있었다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이 길은 자연에게서 선물받은 최고의 작품이다

물론 사람이 다녀야 길이되고 멀쩡하던 길도 사람이 다니지 않으면 머지않아 길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다녀야 할 이유인 소통이 있어야 길이 존재 하는 것이고

소통의 역할이 여러 이유로 사라지고 나면 다시 길은 그렇게 쓸쓸이 사라진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이 길도 가다 보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길로 다시 이어진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하는 인연도 결국 길에 답이 있었으니

길에서 길을 묻는 심정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소통이 사라지는 순간 

길도 사라지는 자연의 순리

 

대간팀 적은 인원인 만큼 소통이 계속 되기를...

 

 

            초보산꾼    도   덕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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