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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29) 2023. 6. 21
요압에게서 배우는 신앙의 지혜
삼하 12:26-31
<암몬 족속과의 전쟁 배경>
다윗이 왕위에 있는 동안 ‘암몬 왕 나하스’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도우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 왕 나하스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애도하는 마음을 전하고, 또 그의 아들 하눈과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조문(弔問)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이 암몬 자손의 땅에 도착하자, 새로 왕위에 오른 암몬 왕 하눈의 신하들이 엉뚱한 조언을 합니다.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10:3).
아마도 하눈은 아버지를 도와 일하던 원로들을 다 배제하고, 주변에 자신들의 친구와 지인들로만 채운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 정치와 외교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입니다. 간신은 아니더라도 경험이 일천하면,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갓 왕위에 오른 하눈의 결정입니다. 신하들이 어리석으면 군주라도 지혜로와야 하는데, 그는 한술 더 떠 최악의 결정을 내립니다.
4절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절반만 깎았습니다. 수염은 자유와 명예와 권위의 상징입니다. 수염을 깎는 것은 최고의 모욕과 수치를 안겨주는 행위였습니다(사7:20). 더군다나 절반만 깎았다는 것은 조롱의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또 그 의복의 중동볼기(궁둥이 중간 부분)까지 잘랐습니다. 하반신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이것 역시 최악의 수치와 모욕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선전포고한 것입니다.
경험이 일천한 신하들과 이제 막 왕위에 올라, 근거 없는 자신감에 도취된 하눈은 제대로 된 정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나라를 망하는 길로 이끄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럼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젊은 날의 다윗과는 다르게, 여유 있고, 지혜롭게 행동하였습니다. 크게 부끄러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신하들을 배려해서, 수염이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단 것은 하눈이었습니다. 아마도 뒤늦게 자기가 얼마나 무모한 행동을 저질렀는지, 감당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보복이 두려웠던 하눈은 이웃 아람의 여러 왕국에서 용병을 사들입니다(3만 3천 명).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요압과 아비새를 보내 그들을 정벌하도록 합니다.
백전노장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의 동지애와 형제애로, 그리고 ‘하나님의 성읍을 지키는 군대’라는 ‘정체성’으로 똘똘 뭉친 이스라엘 군대는 아람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암몬의 남은 병사들은 자신들의 성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우기가 찾아왔기에 요압과 아비새도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일단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아람 족속의 왕 중에서 가장 강한 자였던 하닷에셀이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다윗이 직접 출병하여 그들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패배한 아람은 이스라엘에게 화친을 청합니다.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시 시작된 전쟁>
이듬해 “왕들이 출전할 때”(11:1)가 되었습니다. 건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요압과 아비새를 보내 암몬 자손의 성읍인 랍바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후 11~12장은 다윗의 범죄와 관련된 연속적인 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심각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악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범죄를 드러내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나, 그의 범죄로 인해 그의 가정에 칼과 재앙이 떠나지 않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
아이가 죽은 이후, 하나님은 용서의 증거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다윗 왕가를 이을 왕, 곧 ‘솔로몬’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구조>
본문의 내용은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함으로, 다윗이 그 성을 정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11:25에 연결). 그런데 역사적 순서로 본다면, 본문의 내용은 솔로몬의 탄생 앞에 기록되어 있어야 옳습니다(대상20:1~3). 왜냐하면,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을 때, 이미 진행되고 있던 전쟁이었고, 솔로몬의 탄생은 다윗의 아이가 죽은 지, 몇 년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 뒤에, 다윗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의 범죄를 사이에 넣고 기록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저는 사무엘서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전쟁의 와중에 비록 다윗이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범죄를 가만히 두고,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이길 수 있구나’. ‘우리의 힘으로 만도 승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분이라면 이번 전쟁은 패배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범죄에 대한 징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간의 범죄(수7장) -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 아이 성을 정탐합니다. 아이 성에 정탐한 정탐꾼은 소수의 사람, 이삼천 명의 군사만 올라가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백성 중에서 삼천 명을 뽑아 아이 성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아이 사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쳐 내려오게 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삼십육 명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의를 상실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떨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지도자와 함께 옷을 찢고 통곡하며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앞서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을 점령한 후, 그곳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고 손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수6:18). 그런데 아간이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댄 것입니다(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무게가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
결국 여호수아는 제비뽑기를 통해, 아간이 범인으로 뽑혔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통해 죄를 자백받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간과 그의 온 집을 멸합니다. 아골 골짜기로 데려가 그곳에서 돌로 치고,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셨다면, 그보다 더 중한 다윗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암몬과의 전쟁은 마땅히 패배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서 기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나단을 통해 다윗의 회개시키시고, 다윗의 회개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이전과 같이 회복되었음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난 기사를 기록한 후, 이 전쟁의 승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승리의 기사는 단순한 승리의 기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과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는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압에게서 배우는 신앙의 지혜>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랍바 성 정복을 앞둔 요압은 다윗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26~28절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여기서 우리는 요압의 충성심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성읍을 점령한 일로 인해, 왕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이 더 높아질까를 염려했던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이름이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다윗도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출전한 다윗이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고 노래하자 사울이 그 말을 불쾌하게 듣고, 이후로 다윗을 경계하였습니다(삼상18).
요압은 그러한 일이 처음부터 방지하기 위해, 다윗 왕이 직접 출전하여 마무리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훗날 다윗의 짐이 되기는 했지만(19:1~8), 이때까지의 요압의 모습은 정말 본받아야 할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
이러한 요압의 처신을 보면서 ‘주의 일을 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전제가 있습니다. 이 우주(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조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고백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고, 신앙고백의 영역입니다. 이 고백에서 기독교 신앙이 출발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두 번째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창조의 목적은 그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은 모든 피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별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시편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동물도 영화롭게 합니다. 시43: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입니다.
시100:3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특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입니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계4:11 (24장로들의 찬양)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 그 누구라도 인생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입니다.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체성을 가져야지만,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상으로 형상되는 모든 것이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각각의 분야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잘못을 범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1) 세상 권력자들입니다.
헤롯왕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쳐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행12:21-23).
2)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오류에 빠져 이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란 곳에서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무리가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하였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였습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바나바와 바울 앞에 제사하려고 하자, 이 두 사도가 옷을 찢고는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라>
그런데 인간은 늘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랑하고픈 욕구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하겠습니까? 성경은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예전에 자기의 자랑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를 원했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럼으로써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낚시꾼이 유독 많은 고기를 낚고 있는 노인에게 "다른 사람들은 통 고기를 잡지 못하는데 어르신께서는 그렇게 많이 잡으셨는데 뭐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노인은 "비결이 뭐 별것인가요? 굳이 비결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보이지 않게 한다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우리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날 때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다윗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시는 하나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윗의 요압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가서 랍바를 점령하였습니다.
29~30절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암몬 왕의 왕관을 빼앗아 다윗의 머리에 썼다는 것은, 다윗의 정복과 승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하나님이 다윗을 인정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과 다윗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는 승리인 것입니다.
<암몬의 멸망>
어리석은 왕 하눈의 교만과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암몬 자손을 어떻게 되었습니까?
31절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준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정치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지도자를 만나면 한순간 박살 나는 것입니다. 세우는 것은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종교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리더들을 위해 기도...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는 모두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의 회개 이후에야 이스라엘의 승리가 확정되었습니다.
또한, 요압의 지혜로운 행동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써’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만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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