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수립 71주년을 맞아 지난13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김상덕 임정 의정원 의원의 외아들 정육씨(54)는 지금 절망에 빠져있다. 오랜 가난에 시달려오면서도 군소리 한번 안하고 살림을 꾸려온 아내 이건자씨(41)가 신부전증으로 꼼짝을 못하고 있으나 수술비를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김씨의 선친 김상덕 선생은 1919년 동경유학 시절 2ㆍ8독립선언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7개월여 옥살이를 한 뒤 다음해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만주 길림성과 상해 임정 등에서 25년동안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패망후 중경에서 김구 주석과 함께 귀국했다.
김씨가 태어난 것은 부친이 만주에서 활동할 무렵인 1937년. 두해 앞서 태어난 누이에게는 길림성 지명을 따「길성」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의 부친은 환국후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일제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초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6ㆍ25사변이 터지고도 신병때문에 서울에 남아있다 북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생존해있다면 올해 1백세가 되지만 벌써 작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아들 김씨는 3세때 중국 사천성에서 어머니를 여윈데 이어 중학 3년때 부친마저 납북되면서 고아가 되고 말았다. 청렴강직한 성품의 부친은 아무 재산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후 지금까지 40년 세월은 김씨에게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투철한 독립운동가인 부친이었건만 납북인사라는 이유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조차 받을 수 없었으며 외아들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간신히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후 건축공사장 인부와 전자부품 조립공 등 온갖 일을 하고 지내야 했으며 나이 40세야 장가를 들 수 있었다. 결혼후 한동안 월세방을 옮겨다녔어도 늦게 본 남매를 키우는 재미에 피곤한 줄도 모르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지만 생전 남을 의심하지 않는 성품의 김씨가 지난 84년 푼푼이 모은 돈과 전세방값 등 1천5백만원을 어쩌다 아는 사람에게 사기당한 뒤로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불행은 이어져 88년 여름에는 부인 이씨가 신부전증으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씨는 현재 매주 두차례씩 경희의료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으나 수술을 통해 신장을 이식하는 방법 이외에는회복할 길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중학교 2년생인 맏딸의 1학기 등록금 6만여원조차 여태 못내고 있는 김씨에게 1천만원도 넘는 수술비를 마련할 방법은 아득할 뿐이다.
김씨는 지난해 2월부터 동아일보 신창보급소 총무로 취직, 노원구 상계동 아파트단지의 신문배달 일을 맡고 있다. 월급은 아내 이씨의 치료비와 네 식구의 생활비로도 모자라 늘「가불」을 해야하는 실정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성북구 장위동의 단칸방은 보증금 7백만원에 월세13만원짜리. 그러나 88년 4월 이사온 후 여태 한번도 월세를 내지 못하고 보증금만 계속 까먹고 있다.
어쩌다 쌀이 떨어진 것을 알고 주민들이 쌀가마를 가져다 주기도 했고 치료비가 없는 것을 알고 사재 5백만원을 얻어준 다음 이잣돈을 대신 물어주는 눈물나게 고마운 이웃도 있다.
아직도 바람이 찬 27일 오후2시반경 김씨는 여느때처럼 상계주공아파트 19단지 관리사무실 건물의 뒤켠에서 방금 도착한 석간신문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김씨는 주부 배달사원들이 각자 맡은 구역으로 떠나가자 지금쯤 병원에서 5시간동안의 주사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 있을 아내 이씨에게 안부전화를 걸기위해 잰 걸음으로 공중전화박스로 향했다.
첫댓글 ㅠ.ㅠ 하늘은 정말 불공평합니다.....민족반역자 부인들 잡아갈 생각도 않하고 ..저승사자는 뭐한데?
하늘은 아마 이럴겁니다. 그래서 님을 두었다라구요. 옳지않다고 여기시면 자신이 아는 분에게 알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16으로 힘을 키워나가며 공론화시키는게 님이 할일이 아닐까요?
후...한숨만 나온다....
친일파 재산환수는 어디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