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
이갑종
큰집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큰집 마당 입구에는 아름들이 느티나무가 있어서, 마을 주변에서는 홰 나무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부잣집이라고도 불렀다.
큰집에는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를 위시한 대 가족이 살았다. 식구가 많다보니 그에 맞게 집도커서 돌담 안뜰에는 밤나무. 배나무. 물앵두나무를 비롯하여 닭장 벽 문 쪽으로 붙어있는 소 외양간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집이 좋았던 점은 학교가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30분은 족히 걸렸다. 그때는 우산이 귀했으니 비가 오면 비를 피해 큰집으로 들어갔고 날씨가 추워도 들리곤 했다. 아마도 사촌오빠와 언니가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아서 식구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것이 좋아서 초등학교를 대부분 큰집에서 다니다시피 한 것 같다.
큰집 안방에는 벽장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술과 담배를 못 하시는 할아버지 간식거리가 들어 있었다. 그중 나에 입맛을 자극하는 것은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사 오셨던 사탕이었을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가 꺼내주셨던 해태 왕 드롭프스의 달콤새콤한 맛은 지금도 입안위 단맛 여운을 느끼게 한다. 집안의 큰 며느리답게 큰어머니는 음식솜씨가 뛰어나서 할아버지와 식구들의 입맛을 다 맞추었다. 그중에서도 찹쌀고추장은 유난히도 반짝거렸고, 나는 지금도 여름철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던 그 맛을 잊지를 못 한다.
큰집은 논농사가 많아 일하는 분을 두셨는데도 아버지는 이른 봄, 못자리로부터 시작하여 모내기와 여름에 김매기 거쳐 가을에 벼 타작이 끝날 때까지 큰댁 일을 도와주셨다. 그래서 동네 이웃 사람들은 형제우애가 좋다고 부러워들 하셨다. 할아버지는 성격이 꼼꼼하신 분이라 논배미를 둘러보시다가 돌피가 한 붓이 보이면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논 가운데 있는 돌피를 뽑아버리셔야 직성이 풀리셨다. 또 부지런 하여서 모돈 을 여러 마리 키우셨다. 돼지가 새끼를 낳는 날이면 부정을 타면 안 된다고 붉은 황토 흙을 떠다가 대문 앞에 상토를 피워 잡 사람들을 가리기까지 할 정도로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셨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돼지가 막 새끼를 낳은 후 막내며느리가 미국에서 할아버지를 뵈러 왔다. 그런데도 며느리가 물 건너와서 부정을 탄다고 집안에 들이지 않고 이웃에 사는 작은 아버지 집에서 만나 보셨다고 했다.
그래서 막내 숙모는 할아버지 마음을 이해 못 하고 섭섭해 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럴 정도로 돼지를 키우는데 지극정성을 다 하셨다. 큰집 부엌구석에는 뜨물 항아리를 묻어놓고 쌀뜨물을 비롯하여 허드렛물 한 방울이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돼지먹이를 주곤 하셨다. 큰집은 제사도 많아서 제삿날이 돌아오면 제사준비로 분주했다. 지금은 가게에 가서 나물을 조금씩 사다가 쓰면 되지만 그때만 해도 제사가 있기 열흘 전부터 콩과 녹두의 티를 골라서 깨끗이 씻은 뒤 물에 불렸다가 건져서 시루에 안친다.
그리고는 짚으로 덮고 밤나무가지를 꺽어다 웃마개를 지른 다음 함지에다 나무로 깍아서 만든 삼발이를 걸쳐놓고 그 위에 시루를 올리고 바가지로 하루에 두세 차례 물을 주며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정성껏 길러서 제사에 썼다. 제삿날 사흘 전쯤에는 두부를 만들고 ,움에 묻어 놓았던 배추와 무를 꺼내어 김치도 새로 담그며 식혜도 했다.
제삿날 아침에는 맷돌에 미리 타놓았던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앗고 약간의 쌀을 함께 넣어 맷돌에 갈아놓고 큰 솥 아궁이 앞에 번철을 걸고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녹두 김치전을 채반에 가득 부쳤다. 두부도 바구니에 건져 두툼하게 썰어 굵은 소금을 뿌려 재워 부치고, 계란도 풀어서 소고기를 넣어 육전을 부치고 나면 집 안팍으로 매캐한 연기와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 차게 된다. 큰어머니가 다시마를 내어주면 가위로 반듯하게 잘라서 깨끗한 행주로 닦아 튀각튀김 준비를 해드리고 방앗간에서 빻아온 다식 재료를 반죽하서 동그라미를 만들어 다식판에 예쁘게 찍어 모판에 가득 담아놓으면 내가 맡은 일은 끝이 난다.
그 시간쯤이면 큰아버지가 읍내 장에서 제사상에 올릴 여러 가지 과일과 제수용품을 사 오셨다. 저녁 무렵 큰 어머니는 떡가루에 물을 주어 두 손으로 골고루 비벼서 고운 채에 내려둔다. 가을에 말려두었던 호박고지를 찜통에 쪄서 썬뒤 떡가루와 버므려서 한 켜 넣은 후, 움에 묻어 놓았던 꽃자주색 근대 뿌리를 꺼내어 껍질을 벗긴 뒤 얇게 썰어 또 한 켜 버므려 올려 넣는다. 무도 채 썰어 무 버무리를 또 한 켜 올려 안친 뒤, 맨 위에 떡가루를 얇게 얹어 콩가루를 뿌려 편을 쪄 놓으면 부엌에는 떡에서 올라온 김으로 일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고 온 집안이 떡 냄새로 진동을 했다.
저녁상에는 김칫국을 끓이고 떡을 썰어 그릇에 담아 온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집안 대소가 아저씨 오빠들이 제사를 지내러오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낮에 준비한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 제사상에 올리시느라 분주하다. 늦은 밤 큰아버지의 축문 읽는 것을 끝으로 제사는 끝이 나고 차린 음식을 골고루 담아 안주 접시를 만들어 식구들과 나누어 드셨다. 아버지는 큰상에다 동네 이웃들에게 나누어줄 제사음식과 가족들 몫으로 꾸려놓았던 꾸러미를 집으로 돌아가는 집안식구들손에 들려 주셨다.
큰집은 여러 가지 떡을 해서 부조로 하셨다. 인절미, 절편, 송편 지금은 떡을 해주는 방앗간이 있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찹쌀을 불린 뒤 씻어 건져 시루에 져서 뜸을 들인 후 부엌바닥에 짚을 깔고 나무 안반에 시루에 쪄놓은 찹쌀을 쏟아 붓는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긴 무명 앞치마를 두른 뒤 떡메로 쳐서 그릇에 담아 안으로 가져다 가 도마 위에 콩가루를 묻혀 두 손으로 잘 비벼서 칼로 잘라주시면 여럿이 둘러 앉아 콩고물을 골고루 묻혀 상 위에 얹어 드린다.
인절미를 상위에다 예쁘게 재워 놓는 일은 언제나 아버지 몫이셨다.재워놓은 인절미가 식으면 다시 한 번 뒤집어 재운 뒤 네모난 행담에다 반듯하게 담아 서 큰일 집에 갖다 드리고는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큰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큰어머니가 음식 하는 것을 많이 보고 배웠기 때문에 요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제사며 명절 음식을 하시느라 분주한 큰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첫댓글 대가족이 살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듯해요.
언니의 음식 솜씨가 어려서 부터 보고 배운 내력이 있어서네요.
여행도 가셔야 하고.. 글도 쓰셔야 하고.. 을메나 바쁘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