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냥이는 실내에서 갖혀사는 게 바람직하다고들 한다.
심지어 외출냥, 혹은 산책냥으로 키우는 건 고양이의 안전을 방기하는 무지한 짓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땅꼬가 갖혀살도록 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라면 그렇게 살고 싶을까? 땅꼬를 중성화하면서 내 자신에게 했던 약속... 너와 함께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너의 모성을 박탈하지만 너의 자유는 힘 닿는 한 지켜줄거야. 길냥이 출신으로 보유하고 있던 너의 영역, 그 영역에서의 사계절, 바람, 풀, 꽃... 풍성한 감각의 세계를 누려왔던 너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을거야.
6년 경력의 외출냥이의 오전 외출 풍경은 이렇다.
아침, 침대에서 나와 환기를 위해 뒷산을 향한 창을 열면 땅꼬는 거기 마련된 자리에 폴짝 뛰어 올라 뒷산을 올려다보면서 날씨를 가늠한다. 뒷산 입구 다세대 주택에 몰려사는 산냥이들의 동태도 살핀다. 아침을 먹고 모래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고 나면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는 내게로 종종걸음 달려와 종아리에 꽁 머리를 박는다. 그리곤 현관문 앞으로 인도한다. 산책하고 싶다는 거다. 신발장 옆에 걸어둔 목줄을 딸깍 둘러주고 현관문을 열면, 열린 현관문 안쪽에서 내 행보를 지켜본다. 내 발걸음이 방화문을 여는 쪽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그때서야 현관을 나선다. 엘리베이터의 편리함을 알아버린지 오래됐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내가 먼저 타서 1층을 누르고 문을 연채로 기다린다. 땅꼬는 늘 시간을 끈다. 타기 전에 입구 냄새를 꼼꼼히 검토한다. 어떤 정보를 캐내고 있는 것일까, 어제와 오늘 그 냄새는 어떤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걸까? 나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다. 1층에서 택배기사분이라도 기다리고 있을까봐 마음이 조급해져 재촉한다. "빨리 타... 어서...", 그렇게 10을 세면 대체로 걸어들어온다. 조바심을 치면서도 기다릴 수 있을 땐 기다리는 이유는 땅꼬의 그런 조심성이 땅꼬의 무사한 외출을 보장하는 역량이기 때문이니까...그리고 무엇보다 여차하면 벌어지는 실종의 책임을 면하고 싶은 집사의 비겁함 때문이다. 자유앤 댓가가 따르고 우리는 그 댓가를 수차례 치뤄왔다. 어쩌면 이 외출이 또 한번의 실종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각오... 그래서 땅꼬가 엘리베이터 동승을 포기하고 다시 현관으로 몸을 돌리면 기꺼이 집으로 돌어간다. 땅꼬의 선택이 우선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땅꼬는 내 발치에 얌전히 앉아 나를 그윽하게 올려다본다. 그건 오래된 약속을 다시 확인하는 시선이다. "좀 이따 봐~~~" 이런 약속. 동승하는 주민이라도 있으면 문 앞에 얌전히 앉아서 주민을 뚫어지게 올려다본다. 땅꼬는 눈을 피하는 법이 없다. 늘 응시하고 탐색하는 용감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다. 이런 땅꼬는 우리 아파트에서 외출하는 똑똑한 고양이로 일종의 셀럽의 반열에 들었다. 나와 주민간의 짧은 인사가 끝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열린틈으로 가래떡처럼 머리를 밀어넣으면서 튀어나간다. 공동현관의 유리문이 있다. 그 문 너머 오전 햇살 속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비둘기라도 발견하면 운이 좋은 날이다. 현관 자동문 버튼을 눌러주면 쏜살같이 중정으로 뛰어나간다. 나는 잠시 함께 나가 신선한 공기와 햇살을 맛보고 땅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바쁜 일과를 해결하려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그런 나를 서운하게 지켜보다가 땅꼬는 제 갈 길을 간다.
사실 땅꼬는 나와 함께하는 산책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시들었다를 매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요즘같은 겨울엔, 그리고 퇴직하고 난 뒤에 더 스스로를 몰아대는 내 루틴 때문에 땅꼬의 기대는 서서히 시들어가다가 요즘은 사실상 접은 듯 보인다. 그래선지, 유난히 눈,비가 잦은 겨울날씨 때문인지,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외출에 대한 갈망이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 어쩌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올려다보는 땅꼬의 눈길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같이 걸을거지? 아니면 잠시라도 같이 시간을 보낼거지?"라는 요청... 미안하지만 봄을 기다리기로 하자. 대신 내일은 함께 드라이브라도 갈까?
집으로 돌아와 중정을 향한 베란다로 달려가서 창을 열고 땅꼬의 행적을 눈으로 쫓는다. 103동 쪽으로 총총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 아침 청소를 시작하고 늦은 아침을 해결한다. 요즘은 어딜 다니는 걸까? 초기엔 아파트 펜스를 따라 아파트 오른편, 뒷산에 면한 다세대 담을 타고 뒷산 솔숲에서 놀았다. 낯선 어린 고양이라도 만나면 친구 삼아 놀 때도 있었다. 어린 고양이들은 가끔 이러기도 한다. 하지만 다세대와 뒷산 사이에서 터를 잡은 고양이들한테 잘못 걸리면 말싸움이 잦았다. 뒷산 축대 위 덤불 숲 사이를 누비면서 빙 돌아, 주차장 바위틈을 타고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머물면서 차 밑을 기웃거리다 주차장 냥이들이랑 1 : 4로 붙어서 또 목이 터져라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주민이 말려서 겨우 끝났다. 우리 동 뒷편 축대 밑에서 놀기도 했다. 거긴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하지만 거긴 뒷산 물까치 가족들이 출몰하는 곳이라 거기서 또 1: 3으로 물까치 가족이랑 붙기도 한다. 아파트 입구에 면한 다세대 건너편 덤불, 골목길들을 다녔고, 다세대 주택의 계단을 타고 지층도 기웃거렸다가 출입문이 열린 옥상까지 올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작년부터는 아파트 왼편에 구옥들이 철거된 공터 덤불에 즐겨 다닌다. 그러면서 틈틈이 냄새를 맡고 꼬리를 들고 오줌을 뿌려대면서 마킹을 한다. 예쁘장한 얼굴로 그러고 있는 걸 보면 불경스럽기도 하면서 우스웠다. 그러다가 1시간 30분 정도, 날이 좋으면 2시간 정도 지나 중정으로 돌아와 나를 기다린다. 요즘은 외출시간이 부쩍 짧아진 걸 보니 아파트 중정 근처만 한 바퀴 순찰을 도는 듯 싶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낯선 고양이가 보이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뒷산의 냥이들이 다 중성화 되었나?
한시간 반 정도 지났다. 돌아올 시간이라 중정을 살피면 거기 땅꼬가 와 앉아있다. 땅꼬가 외출을 마치고 나를 기다리는 장소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초기엔 101동 어린이 집 덤불, 그러니까 길냥이 시절 거처에서 쪽잠을 자면서 나를 기다렸다. 땅꼬야~~ 부르면 졸린 얼굴로 나왔다. 그러다 주차장 차 밑에서, 혹은 중정의 덤불 여기저기에서... 그러다 어느 순간 땅꼬는 베란다에서 내 시선이 닿는 곳을 알게 된 것 같다. 땅꼬 스크레쳐가 중정을 향한 베란다에 자리 잡은 이래 그 시선의 방향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덕분에 땅꼬 귀가 업무가 대폭 간소화되었다.
베란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점, 공동현관 건너편 자전거 거치대에 오래 방치된 자전거들이 서로 기댄 채 놓여있다. 자전거 사이, 낙엽이 보드랗게 쌓인 곳에서 웅크려 앉으면 사람 손길이 쉬 닿지 않고 삼색이 털색이 보호색 기능까지 해 비교적 안전하다. 하지만 보호색에도 불구하고 나는 베란다에서 땅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번잡한 오후엔 그 곳에서 기다린다. 아이들이 잘 놀지 않는 겨울엔 햇빛이 비치고 바람을 막아주는 놀이터 덤불 앞, 탁 트인 공간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기다린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체되서 내가 나오지 않으면 공동 현관이 바로 보이는 벤치와 덤불 사이 좁은 통로에서 뚫어져라 공동현관을 지켜보면서 기다린다. 더 지체되면 공동현관 바로 옆 덤불 턱에 올라 앉아 고개를 빼들고 현관을 지켜본다.
땅꼬가 나타나지 않거나 보이지 않을 때 땅꼬와 나 사이엔 신호음이 있다. 처음엔 "땅고야~~" 부르면서 다녔지만 창을 다 열어두는 여름엔 주민들한테 영 민망했다. 어느 순간 박수 세 번 "짝짝짝"이 자리잡았다. 그 소리가 오히려 잘 들리고 멀리 가기도 한다.청각이 발달한 고양이인지라 박수를 치고 인근을 돌아다니면 어느 순간 종아리를 꽁 박는 감촉... 땅꼬가 왔다.
곧 바로 들어올 수는 없다. 중정의 벤치나 정자로 향해 궁팡 중독자인 땅꼬의 바짝 든 엉덩이를 토닥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중정에 녹음이 있는 계절엔 땅꼬가 좋아하는 풀을 찾아 다닌다. 제초제를 열심히 뿌려대는 중정에서 땅꼬가 좋아하는 풀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다 살아남은 어린 싹을 내밀면 맛나게도 먹는다. 요즘 같은 겨울, 매서운 바람에 쫒겨 서둘러 공동현관으로 향하면 총총 쫒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들어서면 목줄을 풀어 걸고 나서 츄르를 주어야 한다. 혹시라도 내가 잊고 다른 일에 몰두하면 츄르가 놓인 씽크대 앞에서 야옹거리면서 "뭐 잊은 거 없어?"조른다. 아차.... 츄르를 꺼내면 씽크대 위로 뛰어오르고 "앉아!" 소리에 얌전히 앉아서 입맛을 다신다. 츄르는 하루에 반 개만.... 나머지 반은 침대콕하는 장군이에게로... 장군이는 땅꼬 덕에 거저 얻어 먹는다. 츄르 반 개는 산책을 하지 않은 날도 예외가 없다. 뭐 잊은 거 없어?
하지만 아직 땅꼬의 오전은 끝나지 않았다. 오전 설거지로 바쁜 내게 와서 또 조른다. 오전 포옹 시간이다. 무사히 오전 산책이 마무리되면 나는 조르는 땅꼬를 안고 소파에 가서 앉는다. 겨울 북한산과 시린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꼬와 나는 꼬옥~~ 오래 포옹한다. 고양이답지 않은 고양이 땅꼬는 가르릉 소리를 좀처럼 내지 않는데 이 포옹의 순간 서로 볼을 맞대면 밀물처럼 밀려오는 소리와 진동. 가르랑, 가르랑... 평화가 피어오르고 내 가슴도 몽글몽글 김이 오르고 팡팡... 무언가가 터진다. 이건 호르몬이겠지? 안도와 평화의 연두빛 안개가 가슴에 차오른다.
이렇게 땅꼬의 오전 외출, 집사의 수발은 끝이난다. 함께 소파에 머물자고 유혹하는 땅꼬의 몸짓을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면 나의 하루는 소파에서 한탄하면서 끝나버릴 것이다. 서운한 눈빛의 땅꼬을 떨치고 으쌰~~~일어나 작업실을 향한다.
...
땅꼬는 유능한 외출냥(산책냥?)이다.
나와 함께한 6년의 시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땅꼬는 외출을 계속하고 있고 나는 외출 수발을 이어가고 있다. 때로 외출이 불가능할 때엔 내가 먼저 땽꼬에게 산책 동행을 청하곤 한다. 외출냥이 집사로 사는 일은 지리한 인내와 수고를 요구하지만 땅꼬가 외출을 포기하는 날까지 수발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땅꼬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집사인 내 자신이 인내와 수고 중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행복한 순간들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동행... 땅꼬는 발랄하고 기꺼운 동행이었다. 봄날, 봄같은 땅꼬와 함께한 뒷산 산책들...
생이 저물어 갈 때, 어둠에 잠식당하는 기억 속에서 보석같이 빛날, 손을 뻗어 잡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그 동행의 순간일 것이라고.. 봄볕 속에서 나는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