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극적인 드라마의 시작과 끝은 하루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목요일 저녁이라고 하는 시간부터 성금요일 오후까지가 십자가 사건의 시작이자 마침이었습니다.
이 하루를 구원 사건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주간을 통해 이 하루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성주간의 시작, 즉 구원 사건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시작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이라고 기념하는 예루살렘입성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해마다 거행되는 파스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함이고,
실제로는 스스로를 파스카 제물로 봉헌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옛날 파스카 사건 때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된 것처럼, 하느님의 어린양이 흘리는 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구성이나 배치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 입성 이후 어느 때에 성전 정화 사건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소 과격한 행동과 말씀이 두드러진 이 사건은 성전의 본래 의미를 일깨우는 동시에 당신의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이란 하느님의 계약 궤를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궤 안의 증언판에 쓰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현존과 동일시되었기에,성전은 하느님이 계시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성전을 순례하고 기도하는 것은 권리이지 의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께 바칠 예물은 깨끗하고 흠 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를 판별하는 당시 사제들과 지도층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에 많은 세금을 빼앗기고, 이스아엘 지도층에도 착취당하는 이중의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제의와 장사 행위를 결합한 자들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성전, 즉 하느님 현존이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잠시 지난 후에 지극히 거룩한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에 파스카 성삼일이라고 합니다.
성삼일의 시작은 최후의 만찬 직전 벌어지는 발씻김 예식(세족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인데, 이 예식의 핵심은 봉사의 의미와 자세입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유언과 같은 행위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13,14)
봉사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이자 본질입니다.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발씻김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 입니다.
첫째, 깨끗함입니다.
씻는 행위는 깨끗해지기 위한 정화 예식입니다. 몸과 마음을 씻고, 죄를 씻어야 예배를 준비하고 거행할 수 있으며, 성화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새 계명입니다.
발을 씻어주시고 봉사의 사명을 알려주신 뒤 예수님은 정화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새로운 계약의 구체적 실천사항인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고, 예수님의 죽음 직전에 유언처럼 남겨집니다.
이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계명!
셋째, 제자들의 삶이 대조됩니다.
수난 전날 밤이자 새 계명이 주어지는 가장 거룩한 시간, 하느님의 신비가 가득한 시간에 배반이 무르익습니다.
유다의 발 역시 예수님의 손길로 깨끗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기 위해 어두운 밤으로 나아갔습니다.
죄의 속성은 이렇습니다. 악은 가장 거욱한 순간에 인간을 찾아와 현혹하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반면 베드로는 자기 발을 씻어 주려는 예수님께 처음에는 제 발을 씻으실 수 없다.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하며 고집을 부렸지만, 이내 순종합니다.
그리고 죄가 씻긴 후에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주님이라고 불리던 분, 공생활 중에는 주님, 스승님이라고 불리던 분이 이제는 친구라고 부르라 하십니다.
이후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모든 사제 중의 첫째 사제이고, 사제 중의 사제이신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 전체에 걸쳐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1-5절) 다음엔 제자들을 위하여(6-19절)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되는 이들을 우이하여(20-26절)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을 통한 일치입니다. 성부와 성자가 그러하신 것처럼, 전체 그리스도인 역시 하느님과 일치하고, 서로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 기도가 있고,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록은 공관복음서와 코린토 1서에만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님은 기도하러 겟세마니로 가셨습니다. 복음성는 이때가 밤이라고 합니다.
밤은 탈출기 12장에서 묘사된 이스트에서의 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를 통해 구원된 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일치하지만, 섞이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와 신적인 의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이셨기에, 실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거나 고통을 느끼는 척했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인간으로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직접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니의 기도 중에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보여주십니다.
처음엔 당신 뜻으로 기도하지만, 결국에는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시며, 순종과 일치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십니다. 이후 예수님은 체포되고 재판을 받으십니다.
체포 이후 사형선고 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 카야파 대사제의 저택에 소집된 최고 의회(산헤드린)는 예수님을 신문하였고
2)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결의하였으며
3) 이어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최고 의회는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재판과 집행 권한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에 대해서 각 복음서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유다인이라고 합니다. 이는 전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성전 귀족층과 지배층이 주도했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마르코는 유다 군중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역시 유다 백성 전체가 아니라 사제 집단과 한 무리의 군중을 의미합니다.
마태오는 백성 전체라고 표현는데, 전체의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27,28)
사도신경에도 등장하는 당시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율법을 위반한 것이지, 로마법을 위반한 것이 아님을 잘 알았고, 그래서 처음엔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반란 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사형시킬 만한 이유도 없다는 것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던 빌라도는 백성의 폭동을 우려해서 결국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이후 사형선고에 수반된 혹독한 매질과 채찍질이 가해졌고, 군사들은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웁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사람들 앞에 끌고 나와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자, 이 사람이오"(요한19,5: Ecce homo," 이 라틴어를 직역하면 "보라, 이 사람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의 힘, 인간의 무지에 희해 조롱당하고 짓밟히고 폭력에 쓰러지는 순간입니다.
무기력한 하느님의 모습, 침묵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왜 하느님은 이토록 무기력하게 사랑하실까? 무기력한 하느님의 모습은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무기력한 하느님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본질 중 하나이기에, 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곳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무덤에 안치, 그리고 믿을 수 없기에 더 믿어야 하는 부활 사건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