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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31) 2025. 2. 19
심판의 예언과 징조
열왕기상 13:1~10
<지난 시간 요약 - 여로보암의 타락>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어느 날부터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남유다에 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백성이 제사하러 갔다가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고서도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 상 두 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면 전체 단추가 어그러지듯, 이어서 내린 모든 종교 정책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잘못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여러 높은 곳에 산당들을 지었습니다.
2) 레위 자손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뇌물을 받고) 제사장을 임명하여 세웠습니다.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바꾸었습니다. 7월 15일(유대력) 장막절을 8월 15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책에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만든 절기에, 벧엘에 가서, 그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명기 사가인 열왕기 기자는 여로보암의 행동이 ‘죄가 되었다’(왕상12:30)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무명의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타나 여로보암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1절 “보라, 그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예언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남유다’에서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단지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벧엘로 왔습니다. 이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참 선지자가 없었다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마저 진리를 증거하는 대신 거짓을 일삼았던 점(13:11~19)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때마침 여로보암이 벧엘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종교에 열심이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제단에 나와서 열심히 하나님께 분향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성의를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금 송아지 형상으로 바꾸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여로보암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땅히 레위인 제사장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여로보암은 교만하게 벧엘 제단 곁에 서서 송아지 우상에게 분향하였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믿음이 없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있고 왕이 되라는 하나님의 약속까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만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
이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합니다.
2절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이 아니라 제단을 향해서 선포합니다(제단아 제단아).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다윗의 집’ 즉 ‘다윗 왕가’에서 장차 ‘요시야’라는 왕이 태어날 것을 예고합니다. 요시야 왕은 이때로부터 3백 년이 지난 후에 등장합니다(왕하 23장).
요시아가 행할 두 가지 일을 예언합니다.
첫째는 요시야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제물로 바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제단 위에서 ‘분향하는 제사장’이 누구를 가리킬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분향하고 있는 사람은 여로보암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주전 621년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때까지 여로보암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역대하 평행본문을 읽어보면 ‘제사장들의 뼈’라고 되어 있습니다(대하34:5). 우상에게 분향하는 제의를 집례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그중에 여로보암도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요시야가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라고 예언합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던 장면을 살펴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분명해집니다.
왕하23:15-16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는 불과 8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당시 힘을 가진 우상 숭배자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그의 통치 18년째, 즉 26살이 되었을 때 그는 드디어 성전 보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성전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됩니다. 성전에서 율법 책이 '발견' 되다니…. 당시의 남유다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찾은 율법책이 서기관을 통해 전해지고, 율법책의 말씀을 읽은 요시야 왕이 자기 조상들과 유다의 죄를 깨달으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그 내용은 솔로몬 이후 세우진 산당을 헐어버린 것입니다(왕하 23:13). 그 산당들을 무너뜨릴 때 해골로 더럽혀, 다시는 우상 숭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하는 기간 앗수르의 장악력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땅이 열린 것입니다. 요시야가 여로보암의 세운 벧엘의 제단과 산당들도 헐고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산당에 한 것과 같이 그 산당에도 해골들을 가져다가 제단을 더럽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그것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제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금송아지 옆에 무엇이 세워졌는가 하면 ‘아세라 목상’이 세워졌습니다. 아세라 목상은 바알 신상의 짝꿍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바알 신으로 섬겼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여로보암이 세운 종교 정책은 우상 숭배로 완전히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요시아 왕은 그 우상들도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재를 빻아 흔적도 없앴습니다. 그리고 그 불태우는 과정에서 먼저 산에 있는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벧엘의 제단에 더럽힌 후에 불살랐다는 것입니다(16절).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요시아 왕에 의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조>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성취될 때까지는 사람들이 그 말씀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명의 대언자는 하나님의 징조를 보여줍니다.
3~5절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그 ‘징조’의 내용은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제단에서 쏟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는 희생 제사를 드리고 난 뒤 남은 재를 가리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규례에 따르면 재는 제사장이 긁어모아 제단 동편 진 바깥의 재 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레 1:16, 6:10.11). 그런데 여기에서 재사 제단에 쏟아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희생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로보암 왕은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기보다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의 교만이 이제 끝까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제단 위로 손을 내밀면서 “그를 잡으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잡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내어 뻗은 여로보암의 손이 마비되어서, 다시 오므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정말 예언자가 말한 그대로 제단이 갈라지면서 재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반드시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그제야 여로보암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6절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멀쩡하던 손이 갑자기 마비되어 쓸 수 없게 되자 여로보암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무명의 대언자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니 하나님만이 고치실 수 있다고 여로보암은 판단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니 손은 다시 전과같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말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입니까? 여로보암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네 하나님’이라고 그러면 안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그러던가, 아니면 ‘우리 하나님’이라고 그래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로보암의 영적인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고, 그 자신도 수단으로 하나님께 분향을 드렸던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한 하나님의 사람>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려 하였습니다.
7~10절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자 했습니다. 예물도 주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의를 하게 된 이유는 회유(懷柔)에 목적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처음에 그 하나님의 사람을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재물의 유혹으로 그 하나님의 사람을 유혹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을 축복의 예언으로 바꾸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왕에게 왕실 재산의 절반을 준다고 하여도, 나는 함께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떡도 먹지 않겠으며, 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을까 궁금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예언자에게 주신 또 다른 사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벧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사명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북쪽에 있는 ‘단’으로 가서 똑같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제의는 벧엘과 단에서 모두 거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유다에서 온 예언자는 벧엘을 떠나 북쪽을 향해 갔던 것입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불의를 묵과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교훈하실 때 귀담아듣고,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은 하나님의 계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고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행위인지를 경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불의를 모른 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경고를 주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을 듣는 우리 자신들의 태도입니다.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자신이 혹시라도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때로 우리의 마음에 찔림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만나게 될 때, 1) 애써 외면하거나, 2)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에게 반감을 갖게 되거나 3) 아니면 시험에 드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때로 그렇게 찔리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구원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혹시 찔림이 있거든 속히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즉시 여로보암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아니, 기왕에 벌을 내리셨으면 정신 차릴 때까지 그냥 좀 내버려 두시지, 그러지 않고 왜 그렇게 빨리 고쳐주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여로보암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서라도 그를 변화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여로보암이나 북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들이 망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손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가 이제 정신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기적으로 체험했음에도, 여로보암은 벧엘의 제단을 폐쇄하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기적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기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가까운 장래이든 먼 장래이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예언은 그대로 요시아 왕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4~35)고 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재림의 약속. 벧후3:4~10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넷째,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참 하나님의 ‘대언자’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왕 앞에서라도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입니다.
대언자(代言者)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대언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아가 그는 왕과의 친밀한 관계도 거절하였습니다(권력). 재물도 거절하였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이 무엇입니까?(마4장)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과시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시험 -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육체의 욕구(탐욕) 자극).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며 물리치셨습니다.
둘째 시험 -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인정, 명예 욕구 자극).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셋째 시험 -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권력 욕구 자극).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권력의 유혹도 물질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왔던 길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특히 목회자)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탐욕과 명예, 권력에 욕구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찔림이 있으면 회개하고, 변화되어,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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