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강나루,
강경순 선생님
순천만 갈숲에 이는 바람처럼 그날의 별빛 맑았습니다.
무엇이 그리워 해마다 철새들은 돌아오고
누구를 못 잊어 당신은 여기에 섰는가!
떠나야한다... 떠나야한다...
대대포구 흔들리던 그대 강나루를 보았습니다.
착한 마을마다 불빛들이 하나 둘 새벽 강가를 적실 때
밤새 잠 못 이루던 작은 새들이 일제히 아침노을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우리들 어진 본성의 수천수만 가창오리 떼도
함성소리 마냥 즐거웠습니다. 오, 기쁜 나의 동지들이여!
오, 거룩한 우리들 존재의 성좌여!
참으로 오랜만의 외출입니다. 경순이 형!
먼 산등성이에서 까마득한 들판을 무질러 그러니까 사반세기,
불길과 가시덤불을 헤쳐 오늘 반갑습니다.
우리가 만난 지상의 꿈이 실은 얼마나 먼데서 뒤척이던 강물인지
우리가 이룬 지상의 소임이 또 어디서 발을 구르는 포구인지
오늘따라 신산하고 새삼스럽습니다. 끝은 곧 시작이며
그리하여 진정한 우리의 항해는 이제부터입니다.
우리가 완성한 지난 수많은 뱃머리에 돛을 올리고
우리가 승리한 지난 수많은 갈꽃들의 숲을 지나
유유히 저 넓고 푸른 바다로 짓쳐갑시다. 그곳에서,
그대 안으로 타오르던 지난 촛불 한 사위의 춤과
그대 안으로 오래 깃든 아침 새들의 노랫가락을 들려주세요.
YMCA에서 영창피아노 4층으로,
거리에서 광장으로, 지리산에서 조계산으로
우리들 얼마나 그리운 참교육의 행렬이었습니까.
사랑스런 아이들, 믿음직한 벗들, 의로운 당신 합쳐
두물머리 세물머리 얼마나 뜨겁고 싱싱한 주막이었습니까.
형이 있음으로 우리 외로움은 외로움다웠고
형이 있음으로 우리 분노 또한 분노다웠음을,
왜 아닙니까.
참세상을 이룬다는 것이 다만 손바닥 뒤집듯 쉽던가요.
수없이 인내하고 남모르게 희생하고
말없이 실천하고 오래 기다리는 가운데
풀어내고 떠받들고 사랑하고 끌어안기를 매일매일,
난바다에 부서지는 한 너울 파도꽃처럼,
채우고 비우고 간직하고 펼쳐주기를
저 질척이는 개펄의 쓰라림 같지는 않았던가요.
참교육을 이룬다는 것이 글쎄
무심코 받아든 분필 한 조각만하던가요 어디.
우리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떠나서 다시금 돌아와야 합니다.
더 넓은 생의 바다에서 촘촘한 그리움의 그물을 던져보세요
더 넓은 민중의 바다에서
그대 도저한 열망의 은빛 물고기들을 끌어올리세요.
여수에서 광양으로, 광양에서 순천으로, 순천에서 보성 벌교
곡성 광주를 오가며 지상에서 가장 참다운 순간들만 길어 올리세요.
지난 세월이 비록 무심하다하여도 후회하지 않고
지난 세상이 비록 안타깝다하여도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행복한 순간들만 거둬들입시다.
오, 떠나서 돌아오는 뱃머리, 그대 나부끼는 만선의 붉은 깃발과
그대 힘차게 노를 젓는 팔의 힘줄과
그대 싱그러웠던 첫 출항의 추억으로만 달려오세요.
우리는 밤낮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새하얀 등대임을 잊지 마세요.
사랑하는 경순이 형.
당신과 함께했던 생애의 존재들을 잊지 마세요.
알 수 없는 너를 이해하고, 미워했던 나를 용서하며,
앞선 너를 존경하고 뒤선 나를 사랑해주세요.
형의 실천이 아우의 것이 되고 아우의 노력이 형의 바다에 이를 것이니,
보셔요, 철새는 해마다 날아와서 형의 강나루를 기웃거리고
형의 강가에서 알을 낳고 형의 갈숲을 흔들어 눈부시게 차오르며
형이 바라보는 그 하늘의 눈시울을 별처럼 맑게 닦아줄 것이니!
영예로운 퇴임에 부쳐, 여기 모인 당신의 미쁜 벗들과 함께
당신의 장도에 늘 서광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천지간에 가득한 뭇별들의 신께 기도합니다.
그대, 마침내 이기고 돌아온 아름다운 강나루, 강경순!
당신의 깨끗한 풀잎에 제 이슬 같은 경의를 매달아...
강경순 선생님 퇴임에 부쳐
2011년 2월 14일
삼가 김진수 모심
강경순
순천금당고등학교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순천,승주 지회장 2회 역임
. 순천교육공동체시민회의 공동대표 역임(2001-2006년)
. 순천청소년축제위원회 상임대표 역임(2001-2003년)
. 교육정상화(고입평준화) 시민회의 공동대표 역임(2002-2007년)
. 순천 YMCA 이사장 역임 (2004-2005년)
*
86년 3월.
나는 내 첫
부임지 여천
여양종고에서
순천금당고로 옮겼다.
80년대 초 중반, 나는 이름하여
'민중미술'로, 저항적 예술운동에 동참했고
생애 첫 개인전에서 그 탄압을 받았다. 특히 2차전인
광주展을 고집한다면 "어떠한 조치가 내려져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는 학교측 통보와 함께 고작 교직 2년차에 나는 짤렸
을 것! 그 이력이었을까 새 학교로 부임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같은
또래 한 교사로부터 이 학교의 입소문을 전해 듣게 되었다. "별 좌경용공의식
을 가진 이상한 * 이 온다." 했단다. 나는 앞 학교에 공채되어 두 달이 채 못된 어
느 날 출근길을 배웅 나온 아내를 다독였다. 다독였다기 보다 다짐이라고 해야 맞
겠다. "내가 언제고 이곳을 뜨자 하면 당신도 곰방 따라와 주겠지?" 였다. 오케이였
다. (내 아내는 나중에 전교조로 해직될 때도 앙탈 없이 나를 따라 주어 지금도 이 초
라한 풍신에 과한 자존심을 매달고 다니는지 모른다.) 그 학교에서 대들다가 한 번, 개
인전 사건으로 두 번의 사선을 넘었다. 그러고도 사립대 사립인 大 순천금당고로 풀떡
건너갈 수 있었으니 둘레의 부럼을 살만했지 싶다. 내 소문? 이 이러한데 당시 '평교사
협의회'가 모르쇠겠는가. 나는 순천교사협의회에 홍보출판부장 이름으로 그 첫 교사운
동을 시작한다. 이즈음 나는 내 삶을 곡진하게 끌어갈만한 까닭이 있는 두 사람의 동지
이자 형을 이 학교에서 만났다. 강경순! 김길희! 그 두렵고 안타까운 청춘의 교사시대
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 되었던, 그니까 나라와 정치와 사상과 투쟁 같은 뜨거운 불길
너머에 우리들 집과 사랑과 젊음의 행복한 뒤안길이 펼쳐져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어
디 오거리 선술집에서 아무 중앙시장 곱창골목이나, 어디 학교 복도 모퉁이에서 아무
교협사무실 창가에서나 늘 따뜻했고 넉넉하였다. 경순형 그 긴 다리를 창틀에 구부려
'ㄱ' 자로 서고 난 그 앞 창에 등을 기대어 심각히 그의 배꼽 근처에 시선을 놓으며 함
께 도모하고 결의하던 '전교조를 꿈꾸는 풍경'은 가위 금당고 교육운동사의 명작 그
림이 아닐가 싶다.^^ 명징하고 용감하게 발언을 잘하는 리더 강경순, 전 교사의 신
뢰를 받고 있던 설득력 있게 조근조근 설명을 잘하는 벌떡교사 김길희, 감정적 스
타일이라 덜떨어진 나 이렇게 셋이서 매일 조회 때 70 사원의 한 복판을 흔들었
으니! 나는 벅차는 감정을 아침마다 누를 길 없었는데, 그것은 교육운동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 보다는 이 두 분에 대한 경의와 인간적 유대의 정이 깊었기
때문이다. 물론 열 다섯 분의 동지가 교무실 곳곳에 믿음직스럽게 포진하여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힘까지... 아, 고맙고 자랑스럽고 행복한 이분들을
나는 지금껏 갚아드리지 못했고, 나눠드리지도 못했고, 얻어만 먹었다.
이제 싱그러운 후반. 오가며 보듬고 나누며 활짝 웃고 싶다. 길이 멀다
고 마음이 머랴! 이 통신시대에 엄살 피우지 않고 우리 "만남의 돌다
리나 사철 개울가에 슝슝 날려봅시다걍 경순형!" 갑자기 늙겠지만
서로 바라보며 살면 우리가 지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너스레
떨듯 곱사등이 쭈그렁탱이가 되어 망종(亡終)에 "하나도 늙
지 않았어." 하며 콧평수 늘려보고 가는 재미 어찌요 형^^
2011. 2. 18 김진수
첫댓글 어느덧 강산이 두번은 변했을 시간이 흘렀습니다.
원년모임의 장형, 경순형님의 명예로운 퇴임을 축하드립니다.
남은 시간들이 더욱 건강하고 복되고 오-지시길 기원합니다.
자네 퇴임 때도 내가 시 한나 읊어주까?^^ 우리 도담에서 함께 살문 그림도 주께 ㅎ / 어제 축가 한나 준비해 갈걸 아무리 노래를 잃었다기로손 그 자리에서 연호하는 '부용산' 같은 슬픈 노랜 하기 싫었네. 여가가 나면 통키타도 한번씩 들어보고 싶어. 내가 실은 작곡도 괜찮은데 말이지. 내가 또 지자랑일세. 자넨 시샘 안 낼 사람이니 믿고 잘난체 한번 했네. 아무튼 경순형이 키 크고 애틋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