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작가나혜석이 태어난 시대인 조선은 유교사회의 성리학에 의한 신분사회의 불평등으로 조선 왕조 5백년의 역사는 처절한 역사의 뒤안 길을 가고 있는사회이다. 士.農.工.商으로 구분되어 왔으며, 특히 양반계급과 천민계급 의 구분, 남존여비의 차별이 심화 되어 모든 사회가 양반과 남성중심의 불 평등 사회의 심화로 여성의 블평등은 더욱 더 악화 되었다.
왕권이 강화되고 세습제로 내려오니 세자로 책봉이 되어 그 왕권이 이어 진다면 그의 왕세자의 왕권으로 이어지고 그의 주변에는 늘 세도정치 아 니면 수 많은 후궁의 치마폭에 둘러 쌓여서 조성왕조의 왕권의 역사는 이 어 지고 ,양반사회의 사대부들은 수많은 첩(妾)을 거느리면 그의 권위와 재력(財力)에 따라 첩들을 거느리는 숫자가 다를 정도이며, 당파 싸움이나 일 삼고 백성들은 살기가 힘든 조선왕조 봉건시대이다.
여성들은 단지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을 하여 단지 남자의 소유물로 전 락하여 가계를 잇는 자녀나 생산하고, 노동력이나 이용하는 신분이었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왕권정치 그리고 양반들이 과거급제 를 하여 나라와 사회를 이끌고 가고 다수의 천민 계급들 즉 노예, 농민.중인들의 계급의 생활로 비참하고 처절한 인간 이하의 사람 취급을 받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페로 항상 착취를 당하며 ,주변에 강대국의 사이에 끼어 항상 조선을 넘보며 툭하면 강대국의 지원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 할려는 하는 허약고 비참한 중국과일본에 끼인 나라이다. 그래서 급기야는 임.병란의 전란으로 국가와 사회는 어려운 난국에 처하게 되며 민심은 흉흉하고 국민들은 살기가 힘들게 살아 왔다.
1215년 경 서구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위한 인권과 민주주의 사상이 싹이 트기 시작하여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권리장전‘등으로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싹이 트기 시작을 하고 인근 프랑스의 ’시민대 혁명‘이 발발하고 1776년 미국의 ’버니지아의 권리장전 등으로 서구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사상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작가 나혜석은 1910년 진명여학교를 우등으로 1913년에 졸업을 하고 졸업후 오빠의 주선으로 일본의 도쿄 사립미술학교를 입학하게 된다. 일본은 이미 서구의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교육,경제사회,군사 등으로 서구의 민주주의와 정치제도 군사등의 문물을 받아 들어 국가발전의 역량을 발휘하는 시기였다. 억압된 조선의 현실에서 이미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나혜석은 일본의 새로운 시각을 갖고 일본에서 미술의 화가로 그리고 문학인으로 인권운동가로 때로는 1919년 3.1운동을 여성들에게 확산 하는데 참여를 한 독립운동가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작가 나혜석은 1920년도에 행정가 김우영과 결혼을 하였으나 행복 하지는 못 하였다.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하여 1926년’천후‘이라는 작품이 특선이 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1927년 남편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나혜석은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맞나 열애에 빠지게 되어 남편과 이혼하게 되며,1934년 여성 일방의 희생을 강요당하는 봉건적인 인습에 지배 받는 남편과 조선사회를 고발하는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고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하여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나혜석은 사회적인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슬한 생활을 하면서 병마에 시달렸다.1937년 수덕사에 있는 김일엽스님이 있는 수덕여관에서 몸을 붙이고 있던 나혜석은 광복 후 양로원을 거치면서 1948년 서울시립 자제원 무연고 병원 에서 신분을 숨기면서 홀로 눈을 감았다.
나) ’경희‘작품의 줄거리
경희의 작품은 일제강점기의 1920년대의 이야기로 전개 되어 간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시기에 작품의 주인공 ’경희(瓊姬)는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사돈마님과 가족들간의 이야기가 경희가 일본까지 가서 유학을하여공부를 많이 하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라는 등으로 이어지며 남자도 많이 배우도 써 먹지 못하는 시대에 여자가 많이 배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등이며 여자는 시집을 잘 가서 아이들 잘 낳고 기르고 시집의 가정을 위하애서 잘 지키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경희는 여자도 많이 배우고 남자가 첩도 얻지를 못하게 하는 그러한 여권의 신장을 위하여 경희를 일본에까지 가서 공부를 많이 하여야 하고 또한 여성으로서 대접도 받고 재봉틀질도 하게 되고 여성의 가사 수업도 받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사돈네 마님한테 이야기 하고 있다.
경희는 이렇게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하고 신여성으로써 많이 배우고 국내의 여자들은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그러면서도 살림도 잘 하고 청소도 잘 하여 여성으로써 어디다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규수감 이다.
마침 경희의 아버지 이철원은 아내와 경희의 결혼문제를 상의를 한다. 자기 친구인 사람이 재산도 넉넉하고 가문도 좋고하여 경희의 그 집안으로혼사를 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경희는 일본에서 공부를 다 하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가문도 좋고 문벌도 좋은 대가집으로 시집을가서 여자의 삼종지도도 지키며 시부모님의 사랑과 남편의 뒷 바라지를 하면서 부유한 가문의 영화와 부귀를 가질수 있는 좋은 집안으로 결혼은 하여 자녀들을 많이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기대 할 수도 있는 결혼문제
그러나 경희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요 사람이다. 조상의 덕으로 그냥 편하게 살아 가고 남편의 뒷을 따라 또한 편하게 밥을 먹고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살아가는 것은 금수(禽獸)와 같다는 논리로 여자도 배우고 노력을 하여 인간으로 자기의 노력을 하여 보리밥이라도 자기의 손으로 살아 갈 수 있는여성의 모습을 이상으로 기대 하면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다) 작가 나혜석과 작품에 나타난 문제의식 작가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의 국난의 어려운 시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의 조선에서는 신 여성으로써 화가로써 문인으로써 깨어 있는 지식인 여성으로써 1918년 조선도쿄 유학생기관지‘학지광’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여 구 여성의 설득하여 신 여성의 각성된 삶의 방식을 동의 하개 만드는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나혜석은 문학과 미술의 양 방면으로 활동을 하면서 최승구. 이광수.염상섭등 신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작가 나혜석은 경희를 포함하여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남성에 대한 평등을 주제로 한 가족사의 작품들을 발표하여 여성은 가문과 재산이 많은 가정으로 시집이나 가서 금수와 같은 생활을 거부하고 깨어 있는 여성 지식인 으로써 조선사회의 봉건사회의 인습에 젖은 여성의 삶을 개척한 작가로 오늘날의 여성의 남녀평등을 가져올 수 있는 작가로 그리고 신 여성으로써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소설 1936년‘현숙’그리고 1937년 10월달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등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여 국가발전과 사회발전에 초석을 놓게 된 효시(嚆矢)라고 보아진다.
우리나라는 해방 100년도 않 되는 신생 독립국가로 교육의 힘과 민주주의의 힘 경제발전의 도약으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고 가정의 자녀교육을 위하여헌신적인 노력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교육의 힘에 의하여 직업을 갖고 여권신장이 되어 결혼을 기피하고 신생아를 낳지 않아 인구의 감소를 가져 오는 현상을 가져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