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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에 반해서 본 영화
내용 전개는 좀 지루했지만 슈미트가 렌트 카를 한대 빌려서 여행 하다가
어느 숲에선 담요 뒤집어쓰고 차 위에 올라가 별을 헤아리며 보다가
신선한 아침 공기에 잠에서 깨던 광경이랑
1:1 결연을 맺어 후원하는 아프리카 꼬마 아이에게서 받은 편지 1통이
슈미트를 구원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은 정말 지루했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영화
고도원의 아침편지 아프리카 방문기를 읽다 눈물이 핑돌아서
1:1 후원을 하기로, 기아대책기구에 전화하고 나니
나도 또 한명의 '슈미트'가 된 기분이네
한달에 2만원 후원하고 나도 구원 받아야겠다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더 큰 부자가 되어야겠다 *^^*
http://www.mediamob.co.kr/leadblood/Post/PostView.aspx?PKId=35981
-허걱? 젊은 사람이 어쩜 이렇게 인간의 내면 셰계를 잘 궤둟고 잇는 지 넘 놀라워요
하하하 잭 니콜슨 을 왤케 만들었다냐?
http://pelle.egloos.com/1126674
<어바웃 슈미트>에서 미국 중산층의 교양과 도덕성을 파헤치며 유머감각을 보여주었던 시나리오 작가 겸 감독 알렉산더 페인이 <사이드웨이>를 통해 돌아왔다. 인생의 갈림길에 선 두 명의 평범한 중년 남자의 사랑과 우정, 외로움과 꿈을 엉뚱한 와인 탐험으로 보여주면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전미 주요 영화비평가협회의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은 물론, 2005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와인산지의 풍경과 와인,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화를 한층 유쾌하게 만들어준다.
캐릭터 측면에서 함 보자. 슈미트씨는 보험회사 직원이었다가 정년퇴임을 한다. 보험회사 직원은 무엇을 뜻하나? 나중에 슈미트의 아내가 죽고나서 슈미트의 독백에서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의 신상정보만 있으면 그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 비교적 정확한 확률로 계산해낼 수 있다. 지금의 나의 나이에 배우자를 잃었으므로 앞으로 9년더 살 확률은 73%다. 물론 재혼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다’(정확히 이 대사는 아닌데, 대충 이런 내용)… 인간의 삶을 수치화, 객관화시키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위의 독백에서 그러한 점은 특히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아내가 죽고나서도 자신의 삶조차 그렇게 객관화, 수치화시키고 있다. 나중에 한바탕 사건들을 겪고난후 슈미트는 결국 이러한 것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글타…저러한 수치들은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0점 몇몇살씩 늘어나더라도, 그것이 어제 교통사고로 죽은 20대중반의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평균보다 짧은 삶은 그 수치산출에 있어서는 의미가 있다.
또한 보험회사직원이라는 것이 보통 예술작품에서 갖는 의미는 보수성, 소심함, 완고함, 혹은 섬세함, 책상잡이등과 같다(이는 소설독법에서 ‘뚱뚱하고 대머리로 외모가 표현된 캐릭터는 탐욕스러울 것’이라는 수준의 얘기므로 ‘실제로 보험회사직원이라고 다 그런건 아니오!’라는 반응은 호나우도가 헛다리 짚으면서 수비수 제치듯이 제쳐버리겠다!!ㅎㅎ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보험회사직원은 우리영화나 소설등에 나오면 창작자가 타겟으로 삼는 이미지가 또 약간 다르다). 이런 암묵적이고 정형적인 성격묘사 또한 슈미트의 행동이나 지나가는 듯한 대사로 살짝씩 확인가능하다.
또한 이 영화는 각본자체가 좋다. 인생에 대한 성찰과 단상들을 슈미트의 심리묘사와 더불어서 마치 화학반응시킨듯이 영절스럽고도 절묘하게 녹여놓았으며, 이러한 성찰들로 극을 밀도있게 진행시키고 있다. 또한 거창한 성찰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소소하게 느끼는 것들도 ‘맞아!’하면서 넓적다리에 멍들게시리 손바닥으로 탁 치게끔 하고 있다. 예를들어서 아내에 대한 슈미트의 불만사항들을 보자. 슈미트는 늙은 아내의 모든 것이 싫다. 뭐 쓸데없는 것 모으는 것도 싫고, 자기 말을 탁탁 끊어버리는 것도 싫고, 심지어 의자에 털썩털썩 앉는 것도 싫다. 여기서 정말로 나의 허벅다리에 피멍들었다 ㅎㅎ…싫은 사람은 정말 사소한짓해도 싫다. 특히 아마 중년분들이라면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서 정말 공감하실 듯…(제발 양말좀 뒤집어서 벗어놓지 말아욧! 제발 안경좀 아무데나 놔두지마, 밟는다구! 와 같은 소리들은 하루에도 수백번 듣는 이야기들) 이런 얘기가 펼쳐지고 슈미트가 엔두구에게 보낼 수표와 편지를 붙이려고 나갈 때 슈미트의 아내는 부엌에 밀가루 같은 것을 쏟아놓고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칠칠맞기 까지…쯧쯧’하면서 슈미트는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아내는 급사했다. 그리고 진공청소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다. 화면은 진공청소기를 클로즈업한다. 특유의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시간은 모든 것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다. 사랑도, 관계도, 우리의 목숨도…진공청소기는 순식간에 아내의 칠칠맞음을 보여주는 물건에서 인생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도구로 바뀐다. 감독은 마치 마술사와 같은 신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이로 인해서 슈미트는 풀이 죽어서 지낸다.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그러다가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젊었을 때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고 분노폭주하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다가 캠핑카타고 다니는 사람과 만났다가 거기서 남의 아내에게 집적대게 된다. 아마 아내에 대한 배신감과 ‘젠장 평생 나는 한여자 밖에 모르고 살았어’와 같은 이유모를 억울함, ‘왜 내가 그 딴 여편네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지냈나’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경에서 그랬을 것이다(슈미트는 평생 바람한번 안피웠다는 사실을 걍 나혼자 추측해본다). 글타 무슨 발정나서 집적댄 것이 아니라 앞에 저러한 여러가지 사건들로 인한 ‘심리’로 인해서 남의 여자한테 본의 아니게 집적대게 되는 상황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이밖에도 하고 싶은 화면들에 대한 묘사와 뜻하는 것 해석은 많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다 써버리면 혹시나 안본사람에게는 너무 가혹한 글이 될까봐…마지막으로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도 잠자리에서만 풀면 다 풀린다는 내용만 또한 낄낄대면서 공감했다는 것만 적고 이번 단락은 끝내야 겠다(어머~나 미쳤나봐~ 결혼도 안했는데~ㅎㅎ…낄낄)
화면의 구성또한 뛰어나며 세밀하게 셋팅되었음도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어서 슈미트가 퇴직하고 나서 자신의 후임자에게 걍 찾아갔을때의 인물대비를 보자. 슈미트의 후임자는 화면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고, 그의 뒤에는 창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보이며, 그의 앞의 책상에는 수많은 서류들이 놓여져 있다. 전형적인 ‘바쁜 인물’에 대한 표현이다. 게다가 인물은 그의 팔을 약간 책상쪽으로 뻗은듯이 놓고 있다. ‘바쁜 상황, 하지만 그 상황의 완전한 장악’을 뜻하며, 자신감도 느껴진다. 반면에 맞은편의 슈미트는 화면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으며 약간 불편한듯한 의자에 약간 몸의 자세가 부자연 스럽다. 그리고 슈미트가 화면의 중심에서 비껴나 앉아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비게 되는 나머지화면 부분은 그냥 휑한 푸른빛의 흰 벽으로 채워져있다. 슈미트의 퇴직후의 공허함과 후임자를 바라보는 약간 꼬인 시선을 화면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슈미트가 아내를 싫어하는 이유를 줄줄이 댈 때 나왔던 화면중에 자기말을 툭툭 끊고 들어오는 게 싫다고 하는 그 화면을 또 보자.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약간 타원형같이 앉아 있는데 슈미트는 그 타원상에 앉아 있음에도 타원에서 살짝 삐져나온 듯이 보인다. 그 옆에서 슈미트의 아내는 그의 말을 끊고 신나게 얘기하고 있다. 슈미트가 대화상대들과 앉아는 있으나 아내 때문에 묘하게 소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배치다. 그밖에도 등등등~ 하지만 이것도 그만 적자 ㅡ.ㅡ;
과연 잭니컬슨은 적절한 캐스팅인가? 게다가 TV로는 성우의 목소리마저도 상당히 부드러운 톤으로 처리해서 기존의 잭니컬슨하면 ‘괴팍함, 똥고집, 짖궃음…’이라고 내 머리에 박혀있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맘에 안들었다. 그러다가 엔두구에게 편지를 처음으로 쓸 때 회사의 자신의 후임에 대해 쓰다가 ‘그 애송이가 뭘알아?! 무슨 철학이 있어? 그저 계산기나 두드릴줄 알지!!’라면서 폭주하면서 휘갈길 때 ‘오호~ 드디어 지대로 나오는데~?’ 하고 맘에 들어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아가면서 그러한 내머리에 박혀있던 사항들을 지우개로 지워야 했다(그나마 연필로 씌여있었던지 잘 지워지더라…여러분도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으세에요오~ㅡ.ㅡ;; 뭔소리냐). 어떤면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다른 사람들과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물침대에서 자다가 목이 뻣뻣해져서 바닥에 떨어져있을때와 사부인이 준 약먹고 몽롱하게 취한 표정을 보았을 때 최적의 캐스팅이라고 느꼈다.
엔두구는 슈미트의 내면, 자신, 자신의 인생이다. 이러한 것을 ‘아이’로 하는 비유는 다소 고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누구(아마 애니메이터 아니면 뭐 그런 쪽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확실치가 않아서)는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아이가 그린다’라고 한다. 아마 이런 비유를 하는 것은 아이때에 가장 자기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대한 또다른 증거는 영화의 제목 ‘슈미트에 관하여’이다. ‘슈미트씨에 관하여’도 아니다. ‘슈미트씨’라고 하면 남이 슈미트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되기때문이다. 즉, 제목은 ‘슈미트, 나자신에 대하여’라는 뜻이다(창작물에서 나오는 이름은 흔히 서양에서 정체성과 내면, 의미등과 관련된다. 아시아쪽은 고전적으로는 또 약간 그 의미가 달랐다). 또 슈미트라는 이름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꼭대기다(맞을…껄? 독어가 가물가물~). 꼭대기라는 것이 최정상, 최고의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더 이상 올라갈데는 없음, 이제 내려가야함을 뜻한다. 즉 인생에서 이제 황혼기를 뜻하는 것이다. 또 산에 올라갔을 때 최정상에 올라가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할까? 여러가지 하겠지만, 아마도 나는 올라온길을 다시 되돌아 보게 될 것 같다. 영화는 또한 그러한 되돌아봄, 자기성찰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슈미트가 결혼식전에 여행을 하면서 실제 화면으로 보이는 것은 초라하지만, 마치 흥미진진하고 대단한 여행을 한듯이 엔두구에게 늘어놓는 나레이션과의 부조화는 남에게 자신을 초라하게 보이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억의 미화를 뜻한다. 또한 이는 자아에게 약간 초라한 현실보다 더 나은 인식을 알려주려는 즉, 자기자신에게 초라해지기 싫어하는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삶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자기 자식에 대한 약간 과장된 슈미트의 표현들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슈미트는 자신의 딸이 전자회사인가 컴퓨터회사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고 엔두구에게는 얘기 했는데, 실제로 그녀의 딸은 배송부에 있다(배송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님. 독법일뿐. 호나우도는 또 헛다리로 수비수를 제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엔두구에게 딸자랑하면서 제2외국어로 그녀의 딸은 독어를 했었다고 하는데, ‘슈미트’라는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딸이 독어를 한 것은 별 대단한 것은 아니다. 엔두구에게 ‘너에게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겠지’라고 하면서 이렇게 쓰는 것은 ‘어차피 모를 아프리카 소년에게 구라치기’가 아니라 그러한 자기자신에 대해 초라해지기 싫은 슈미트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내내 슈미트가 자신을 돌아볼 상황으로 주변환경을 계속 조성해나간다. 퇴직, 배우자의 죽음, 그리고 앞에 둘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딸의 결혼이 있다. 슈미트는 딸의 남편감이 맘에 안든것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딸마저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이 두렵고 싫어서도 결혼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슈미트는 결혼식에서 결국 딸의 결혼을 축복해주고 결혼식에 갈때와는 달리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보니 엔두구를 돌보는 수녀에게서 편지가 와있다. 엔두구는 저번주에 눈병을 좀 앓았었지만, 잘 지내고 있으며 슈미트에게 고마워한다는 내용. 그리고 엔두구의 그림을 보여준다. 엔두구가 수녀와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슈미트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엔두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퇴직후부터 였다. 드디어 슈미트의 내면이 그에게 답을 했다. 엔두구가 저번주에 앓은 눈병은 슈미트가 저번주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내면의 작은 아픔을 뜻한다. 슈미트가 편지를 보내기 전에 엔두구는 밥도 잘 못먹고 다녔다. 슈미트가 내면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슈미트는 엔두구에게 밥도 주고, 아플때 약도 준다. 또한 여기서 엔두구는 아직 어려서 글을 못쓰기 때문에, 슈미트에게 편지를 써준 것이 ‘수녀’였다는 사실도 재밌다. 결국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종교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데에 종교가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보고 흘리는 슈미트의 눈물은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의 처지에 대한 자각때문도 아니고, 이제 자기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나마 엔두구가 있는데에 대한 고마움때문도 아니다. 그동안 굶다시피하면서 방치되어 있던 자신의 내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직시와 연민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두구는 슈미트에게 ‘고맙다’라고 한다. 인간은 결국 최후까지 함께하는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 또한 인생에 대해 보여주는 이 영화의 성찰중 하나다(물론, 반박가능한 결론이긴 하지만).
평생을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이제 막 은퇴한 새내기 백수 슈미트. 취미는 쭈글탱 와이프 구박하기와 곧 사위가될 렌달 무시하기, 주 특기는 화장실에서 앉아서 쉬~하기와 하루 77센트를 후원하는 탄자니아 꼬마에게 편지 쓰기다. 세상 모든 게 공허하게 여겨지던 어느날, 그만 와이프가 죽어버리는 대형 사고가 터진다.
튕기면 더 끌리고 없으면 보고 싶은게 사람 마음. 아내의 빈 자리를 되새기며 슬픔에 잠겨 물건을 정리하던 슈미트의 눈앞에 딱! 걸린 건 죽은 아내의 비밀 연애편지. 뒤늦게야 아내의 바람 사실을 안 그는 졸도를 넘어 환장수준까지 이르고...이제부터라도 자신의 행복을 찾으리라 결심해 보지만 직장도 마누라도 없는 슈미트에게 행복이란 딴 세상 이야기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결혼을 앞둔 유일한 딸.
예비 사윗감 렌달은 슈미트 만큼이나 듬성듬성한 머리 숱에 실적까지 나쁜 물침대 외판원이다. 딸의 결혼 방해를 인생의 목표로 정한 슈미트는 그 길로 딸이 살고 있는 덴버로 향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