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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
본문 : 예레미야 20장 1-13절
『예레미야 선지자는 ‘죄악 가운데 사는 유다 백성들에게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뭘까요?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혀 돌이킬 생각이 없는 저들에게 ‘토기장의 비유’와 ‘깨진 옹기의 비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들이 심판을 받지 않길 원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하지도 않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길 원해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저들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바램대로 되었어야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바스훌’이란 대제사장에게 이유도 없이 매를 맞고, 목에 착고를 채워 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다음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예레미야는 속상하여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권유하신 대로 말씀을 전하였는데, 사람들이 종일토록 조롱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결과가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당하니 차라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자신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예레미야 선지자도 억울한 일과 어려움을 당하자, 불평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1. ‘원수 마귀는 우리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 책임자인 ‘바스훌 제사장’이고, 또 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문제는 바스훌 제사장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나무착고를 채우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에”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예언한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는 강대국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어느 쪽과 손을 잡아야 하느냐를 놓고, 두 패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기존의 강대국인 애굽과 손을 잡아야 바벨론을 물리칠 수 있다는 ‘애굽파’와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과 손을 잡아야 나라가 안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벨론파’가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만약에 두 나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그나마 고통이 덜 할 것이라’ 예레미야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여호야김 왕을 비롯 종교지도자들이 애굽파였기에 그런 예레미야를 좋아할 리가 없던 것입니다. 그래서 11장에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던 것이고, 오늘 본문에서 바스훌 제사장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상황이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차고 넘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빨리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바벨론으로 하여금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한계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돌이켰어야 하는데, 그런 말이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애굽과 손을 잡기를 원하는데, 자꾸 바벨론에게 항복을 하라는 소리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막고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원수 마귀도 이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는 우리들을 그냥 두질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로 하나님과 멀리하게 할까?’ 갖은 방법으로 우리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원수 마귀가 “나는 마귀이다” 하며 다가오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막을 수 있는데, 마귀는 항상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자 보십시오.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둔 사람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제사장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의 총 책임자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일을 막을 것이라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오늘날도 윈수 마귀가 주의 종을 가장하고, 믿음 좋은 사람으로 가장하여 우리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려고 하면, “왜 그리 미쳐서 그러느냐?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또 열심히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너만 믿으면 되지, 왜 유난을 떠느냐?” 핀잔을 주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우리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장난입니다. 결코 마귀의 장난에 속아 믿음이 떨어지거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줄 믿습니다. 원수 마귀는 반드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3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를 때리고, 목에 착고를 채우고 옥에 가두었던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으로 바꿔주십니다. ‘사방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으로, 그에게 저주가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어떻게 되느냐? 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6절에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무슨 말에요? 저들이 성공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시험에 들거나 복음 전하는 일에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이것은 마귀의 장난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함에 있어, 또는 복음 전하는 일에 하는데 비록, 핍박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중 단 한 사람도 원수 마귀의 미혹에 속아 넘어지거나 복음 전하는 일을 중단하는 자가 없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주의 일과 복음 전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9절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는 ‘예레미야’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떠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말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냐? 7절에 보면 자신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한 것인데, 사람들에게 종일토록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면, 말씀하신 대로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기에 백성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그러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환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자기가 전한 것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아 거짓말쟁이, 사기꾼 소리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뜨거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골수에 사무칠 것 같아서, 죽어갈 저들을 생각하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어서 여호와를 선포하며 그의 이름으로 전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레미야의 환경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모욕을 주고, 고소를 하고, 원수를 갚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예레미야는 당연히 여호와를 선포하고 싶은 마음과 그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어떤 마음을 가졌어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골수에 사무칠 것 같은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은 뜨거운 열정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입니다. ‘주의 일과 복음 전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지금의 환경 때문에 복음 전하기는 고사하고, 내 믿음 지키기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때,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마음을 달리하면 어떨까요?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결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이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불이 붙은 것처럼, 이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골수에 사무칠 것 같은 마음’ 말입니다. 자 여러분! 예레미야가 이런 마음으로 바뀌게 되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12절입니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분명 7절과 8절로 환경을 보고 낙심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였던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환경을 볼 때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자,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보복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여러분도 환경만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길 소원합니다. 어떤 마음일까요? ‘여러분이 의인인가?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같은 사랑이 있는가?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의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여줄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갈급함이 있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붙 붙는 것 같은 뜨거운 열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실 줄 될 줄 믿습니다.
3. ‘저주받은 인생일지라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이게 무슨 말일까요? 마치 욥기에서 나오는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어머니가 저주를 받아 자신을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18절에선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며, 이 땅에 태어나 고생과 슬픔을 보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는 것이 속상했을 것입니다. 분명 멸망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저들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앞에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여기서 ‘가난한 자’는 ‘예레미야를 비롯 박해를 받는 의인’을 말하고-, 또한 ‘행악자’는 ‘의인을 박해하는 악인 또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요?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셨을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자 보십시오. 분명 14절이하에서 ‘자신이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가난한 자의 생명, 다시 말해서 저주 받은 인생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구원 받은 의인으로 바꿔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한탄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주 받은 인생인지라도 의인으로 바꿔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저주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셨나요?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그것도 갑절로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복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더 이상 저주 받은 인생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의인이 된 줄 믿습니다.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찌 보면, 고난을 받은 예레미야의 푸념이요, 원망의 소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속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입니다. 첫째는 ‘원수 마귀는 어려움을 통해 우리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갖은 방법으로 믿는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입니다. 둘째는 ‘주의 일과 복음 전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레미야의 환경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불 붙는 것 같은 마음을 가졌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는 ‘저주 받은 인생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 손에 붙들려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되길 소원합니다. 따라서 어떤 환경일지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러분도 의인이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욥과 같이 갑절의 복을 받고, 예레미야와 같이 크게 쓰임 받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