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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지음
루비박스 / 2007년 12월 / 863쪽 / 24,900원
▣저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전사학자(戰史學者). 옥스퍼드 대학교(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1994년 동 대학원에서 고대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미권에서는 로마사와 로마 전쟁사에 관해 널리 알려진 학자이자 저술가이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들은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첫 저서 『전쟁에서의 로마군』이 학계로부터 특별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밖의 저서로는 『로마의 이름으로』, 『카르타고 전쟁』, 『로마군에 관한 모든 것』 등이 있다. 이 책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2006년 예일 대학교 출판부에서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로마의 이름으로』와 함께 ‘전쟁사학회’에서 우수서적상을 수상했다.
▣ 역자 백석윤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AP 기술연구원에서 일하며 좋아하는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엔더의 게임』(2008년 근간)이 있다.
▣ Short Summary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야기는 너무도 극적이었기에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작가들을 매혹시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도 버나드 쇼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장군 중의 하나였으며 자신이 치른 전쟁을 누구도 넘보기 힘든 탁월한 문장으로 남긴 저술가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공화정 로마의 최고 권력을 쥐었던 정치가였으며, 비록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취했던 적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황제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결코 잔인한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는 패배한 적들에게도 수없이 관용을 베풀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용서했던 2명이 주도하고 자신의 지지자들 다수가 참여한 음모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훗날 그의 양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옥타비아누스는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그 가계는 서기 68년에 황제 네로를 끝으로 끊겨버렸지만 그 이후에도 황제들은 계속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일개 귀족 가문, 그나마 유력하지도 않았던 가문의 명칭에 불과했던 그 이름이 궁극의 권력과 정통성의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은 카이사르의 전사를 연구하여 많은 것을 얻은 수많은 지휘관들 중 하나였다. 정치인으로서 카이사르는 400년 넘게 이어져 온 공화정 체제를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로마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지극히 지적이었으며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행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다. 연설가이자, 작가로서, 입법가이자 행정가로서, 그리고 군인이자 장군으로서 그의 재능은 다양했으며 극히 예외적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로마의 대중과 병사들 그리고 수많은 연인들을 매혹시켰던 매력이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카이사르는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장점이자 비결은 최소한 스스로라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극복하며 변화된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결국 승리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야심과 재능, 굳은 결심 그리고 그가 자랑하던 행운을 바탕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잘못도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애국자였다. 그것도 매우 유능한 애국자. 그는 싸웠다. 갈리아 전쟁에서, 내전에서, 그리고 결국 독재관이 되었으며 암살자들의 칼에 쓰러졌다. 잘한 일도 있었고 잘못한 일도 있었겠지만, 이보다 더 극적인 삶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 차례
서문 옮긴이 글
1부 : 집정관이 되기까지, 기원전 100~59년
1 _ 카이사르의 세계
2 _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3 _ 첫번째 독재관
4 _ 젊은 카이사르
5 _ 흰 옷을 입은 남자
6 _ 음모
7 _ 스캔들
8 _ 집정관
2부 : 프로콘술, 기원전 58~50년
9 _ 갈리아
10 _ 이주민, 그리고 용병: 첫 번째 출정, 기원전 58년
11 _ ‘갈리아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 벨가이, 기원전 57년
12 _ 정치와 전쟁: 루카 회담
13 _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 원정, 기원전 55~54년
14 _ 반란, 재앙 그리고 복수
15_ 베르킨게토릭스 그리고 갈리아 대반란, 기원전 52년
16 _ ‘갈리아 전체가 정복되었다.’
3부 : 내전, 그리고 독재관, 기원전 49~44년
17 _ 루비콘으로 가는 길
18 _ 전격전: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기원전 49년 겨울~가을
19 _ 마케도니아, 기원전 49년 11월~기원전 48년 8월
20 _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 그리고 동방, 기원전 48년 가을~기원전 47년 여름
21 _ 아프리카, 기원전 47년 9월~기원전 46년 6월
22 _ 독재관, 기원전 46~기원전 44년
23_ 3월 15일(THE IDES OF MARCH)
에필로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에이드리언 골즈워디 지음
루비박스 / 2007년 12월 / 863쪽 / 24,900원
1부 : 집정관이 되기까지, 기원전 100~59년
1 _ 카이사르의 세계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 세대 사람인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오로지 로마가 어떻게 해서 융성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사 Universal History』를 저술했다. 그는 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2~기원전 167년)에 직접 참여하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직접 목격했고 이후 인질로 로마에 끌려갔다. 그는 로마 귀족의 집에 살면서 그의 출정에 도의했으며 카르타고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로마 군사체계의 효율성에 주목하면서도 실제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은 그 정치 체제에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로마 공화정은 어느 한 개인이나 파벌이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균형을 유지하게 하여줌으로써 그리스 도시 국가 대부분에 재앙으로 작용했던 잦은 혁명과 국란으로부터 로마를 자유롭게 지켜준 체제였다. 내부가 안정되면서 공화정 로마는 어떤 상대도 필적할 수 없는 규모와 집요함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동시대의 어떤 국가도 한니발에게 유린당했을 시의 재앙과도 같은 치명적 손실을 입었다면 살아남을 수도, 계속 싸워 이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때 공화정은 400년간 지속되어 왔으며 그 체제하에서 로마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 로마의 성장과는 달리 공화정 체제는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훗날 카이사르는 공화정 로마가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내전에 의해 분열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로마인들은 공화정 체제가 이미 카이사르 생전에 무너졌다고 느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를 공화정을 암살한 주범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양자 아우구스투스가 스스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을 무렵에는 공화정이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빠른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2세기 말 로마 공화정은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징조와 함께 종말에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2 _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율리우스 씨족은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공화정 초기에 권력을 독점하여 많은 평민들을 통치했던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자세한 자료는 없지만 율리우스 씨족은 공화정 초기 200년 동안 10여 명의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성공적이었던 다른 씨족, 예를 들면 파비우스나 만리우스 씨족과는 달리 율리우스 씨족은 선조들의 업적을 잘 계승, 발전시켰던 것 같지는 않다. 상황은 변해가고 있었다. 여전히 몇몇 귀족 가문은 강력한 영향력을 고수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평민들의 요구가 점점 거세어짐에 따라 명문 귀족들이 독점하던 권력은 약해지고 있었으며, 부유한 평민 가문들이 계속해서 통치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사실상 거의 없다. 어쩌면 법무관을 지냈을 수도 있다. 그의 부인은 기원전 144년에 법무관을 지냈던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의 딸 마르시아였다. 그들은 적어도 2명의 아이를 가졌는데,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와 고모 율리아였다. 율리아는 나중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하게 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기원전 91년에 집정관이 되는 섹스투스가 그들의 또 하나의 아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유년 시절과 교육
카이사르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당시 로마 귀족들의 일반적인 생활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사실들로부터 유추해볼 수는 있다.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회에서 출산은 집에서 이루어졌다. 원로원 의원 가문에서 출산은 중요한 행사였으며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야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파는 아이를 바닥에 누이고 기형이나 결함이 있는지 또는 아이가 생존 가능한지를 살펴보았다. 이런 과정이 끝난 뒤, 부모는 아이를 받아들여 기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그 결정은 아버지에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 같은 강한 여인이 그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카이사르가 살던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들의 자녀들은 대개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2가지 언어를 구사하도록 키워졌다. 그리스어 조기 교육은 아마도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은 그리스 노예(paedagogus)가 맡았을 것이다. 또, 가문의 의식과 전통 그리고 로마의 역사에 대한 교육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로마의 역사에는 당연히 그 선조들의 업적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며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로마인이 알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끔 키워졌다. 물론 이는 아주 보기 드문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문을 이을 유일한 남자로서, 그리고 특별히 강하고 존경받는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그가 처음부터 남달리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점점 깊고 높게 키워갔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로마식 교육은 극히 실용적인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아이에게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귀족 가문의 소년에게는 공직과 가족을 위한 영광을 획득하는 것, 그리고 그가 언젠가는 가장(paterfamilias)이 되어 다음 세대를 키워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략 일곱 살이 되면 남자아이는 아버지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그 또래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하인을 감독하거나 옷을 만드는 등 어머니의 가사를 따라 배웠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따라가 그가 다른 원로원 의원들을 만나는 것을 지켜보거나 원로원 회의장 문밖에 앉아 토론을 듣는 것이 허용되었다. 결국 아이들은 누가 가장 영향력이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배우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공화국의 중요 사안들이 처리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그 세계의 일원이며 훗날 충분히 나이가 들면 자신도 그 세계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4 _ 젊은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모습은 흉상과 동전으로 남아 있다. 일부는 그가 살아 있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일부는 처음 만들어진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모두 중년시절의 그를 묘사한 것들뿐이다. 그것은 단호하고 강건한 모습, 주름진 얼굴과 가는 머리카락으로 표현된(최소한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들에 의하면) 위대한 장군 또는 독재관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힘과 경험과 엄청난 자신감으로 빛을 발하며 어떤 조각과 그림, 심지어 사진으로도 잡아낼 수 없는 한 인간의 개성을 어렴풋이나마 암시해준다. 사실 우리 스스로 고대 세계는 돌과 대리석의 세계라는 의식에 깊이 빠져 있기도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고대의 초상화는 과도하게 근엄해 보이고 생동감이 떨어지며 너무 단순해 보인다. 또, 아무리 잘 꾸며진 것이라 해도 흉상은 그 인물의 일면만을 내보여줄 뿐이다. 로마인들, 특히 귀족들에게 외모와 멋 내기는 무척 중요했다. 로마인들이 고안해낸 시설 중 가장 복잡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 시민들의 휴식과 청결을 위한 목욕장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의원들이 잠재적인 동료 또는 클리엔테스를 만나거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거리를 걷거나 하는 활동들이 공직 생활에 있어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들의 옷차림과 몸가짐은 항상 관찰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매우 멋쟁이였으며 그 옷차림은 유별나기는 해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는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부유한 이들의 경우에는 매우 비싸고 이국적인 소재를 구할 수도 있었다.
원로원 가문의 젊은 귀족들은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많은 노예와 함께 옷차림에도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또,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할 만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종종 빚을 져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풍조가 만연했다고 하더라도 카이사르가 외모에 들이는 정성은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당시에는 짧게 깎은 머리와 말끔히 면도한 모습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했는데, 카이사르가 머리카락을 제외한 모든 체모를 제거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외모와 모순되는 그의 성격이었을 것이다. 옷차림에 신경 쓰던 많은 로마의 젊은 귀족들은 생활에 있어서도 사치스러운 경향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경우 손님은 잘 대접했지만 본인이 먹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아 과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결국 그는 현대적인 방종과 전통적인 절제가 묘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8 _ 집정관
기원전 61년 9월28일과 29일, 위대한 폼페이우스는 세 번째 개선식을 치렀다. 해적들과 미트리다테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한 것이었다. 그 축전은 그의 45회 생일과 겹쳐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규모와 화려함으로 펼쳐졌다. 20년 전에 있었던 그의 첫 번째 개선식과는 달리 코끼리가 끄는 전차와 같은 터무니없는 장면은 없었다. 폼페이우스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원숙해졌으며 그런 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 역시 없었다. 그의 눈부신 업적은 과거의 위대한 장군들을 초라해 보이게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개선식은 결코 절제와 겸양이 요구되는 행사가 아니었다. 로마 귀족들이 흔히 그렇듯이 폼페이우스도 자신의 업적을 규모와 물량으로 나타내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행렬에 포함된 플랜카드에 의하면 그가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패배시킨 사람의 수는 1천 218만 3천 명, 나포하거나 침몰시킨 적함은 846척, 그에게 항복한 도시 또는 요새는 1천 538개였다. 그가 획득한 전리품을 실은 거대한 운반선에는 그가 정복한 왕국, 백성, 지역이 차례로 표시되었다. 그 뒤로는 주요 전쟁 장면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줄을 이었다.
모든 병사들에게는 각자의 10년치 연봉이 넘는 1천 500백 데나리우스가 지급되었고 국고에는 총 2만 탤런트의 금과 은이 새로이 채워졌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노력으로 연간 국가 재정 수입이 5천만 데나리우스에서 1억 3천 5백만 데나리우스로 2배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행렬 말미에는 당시 알려진 세계 각지의 전승 기념물들이 가득 실린 거대한 운반선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폼페이우스가 3개의 대륙을 정복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승리로 아프리카를, 두 번째 승리로 유럽, 특히 이스파니아를, 세 번째 승리로 아시아를 정복했다고 말이다. 폼페이우스는 전통 복장을 입힌 왕과 왕비와 공주, 부족장과 장군으로 이루어진 300명을 앞세워 행진했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보석으로 장식된 전차를 타고 미트리다테스로부터 빼앗은, 그가 오래전 알렉산더 대왕이 입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아피아누스는 그로부터 약 150년 후에 쓴 글에서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으나 폼페이우스 자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 정복자와 비교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폼페이우스의 업적은 규모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대단한 것이었다. 세심한 계획과 신속한 행동이 어우러져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던 해적 소탕 작전은 더 큰 성공의 서막이었을 뿐이었다.
2부 : 프로콘술, 기원전 58~50년
9 _ 갈리아
로마를 떠나 속주로 향한 카이사르는 이제 41세였다. 그는 앞으로 9년간 로마에 돌아오지 않을 운명이었다. 그의 남은 인생은 그야말로 전쟁으로 점철될 것이다.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그가 대규모 군사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해는 단 2년. 기원전 50년, 갈리아 정복이 완료되고 지역을 안정화하던 해와 기원전 44년, 대대적인 첫 다키아 원정과 연이어 계획된 파르티아 원정을 불과 며칠 앞두고 암살당한 해가 그것이다. 그 외 나머지 모든 해마다 그는 적어도 한 번, 대부분 여러 번의 전투와 포위 공격을 치르게 된다.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총 50회의 전투를 치렀다고 했다. 그 수치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투와 교전, 소규모 충돌을 구분 짓는 기준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저술가들의 기록이 널리 알려진 믿음, 즉 카이사르는 다른 로마 장군들보다 훨씬 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곧잘 비교되던 알렉산더 대왕은 소규모 집전을 제외한다면 단 5회의 회전과 3회의 대규모 공성전을 치렀을 뿐이다. 한니발은 큰 규모의 전투 횟수에서는 알렉산더를 뛰어넘지만 역시 카이사르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기록은 전쟁의 양상이 더 격렬해지고 일부 지휘관들이 카이사르 및 고대의 지휘관들에 비해 더 많은 날에 걸쳐 중요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던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깨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기원전 58년을 전후로 카이사르의 생애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그때까지 그가 이탈리아를 떠나 있었던 기간은 기껏해야 9년이었으며 대략 그 중반 정도가 군사 활동에 바쳐졌다. 이는 평균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로마 원로원 의원에게는 일반적인 기간이었다. 물론 대중의 눈에 띄기 위해 꾸준히 법정에 모습을 보였던 키케로와 같은 인물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자신의 화려함과 약간 수상쩍은 인물들과의 교류 그리고 집정관 시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일부 행동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경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최연소 연령 기준보다 2년 일찍 집정관이 되었기에 그는 전직 집정관(proconsul)으로서는 젊은 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폼페이우스와 비교한다면 그에게는 기회가 무척 늦게 찾아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의 나이로 죽었고, 한니발은 45세에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46세에 워털루에서 격돌했다. 비록 당시 블뤼허(Blucher, 웰링턴을 도왔던 프로이센 장군-옮긴이)는 73세였지만. 대조적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로버트 리 장군은 오십대였으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을 당시 미국 장군 패튼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및 최근 기준으로 본다면 기원전 58년의 카이사르가 지휘관으로서 나이가 많았다고 볼 수도 없다.
10 _ 이주민, 그리고 용병: 첫번째 출정, 기원전 58년
기원전 58년 3월 28일, 헬베티족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제네바 호수 근처의 론 강 유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동에 참여한 사람은 36만 8천 명으로 그중 4분의 1은 전투가 가능한 연령대의 남성들이었고 나머지는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현재의 스위스에 해당되는 고향을 떠나 보다 넓고 비옥한 정착지를 찾아 대서양 연안의 갈리아로 이동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 경로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3월초 그들의 이동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속주로 출발한 바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로마 외곽에 머물며 원로원과 포름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을 주시하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가장 쉬운 이동 경로를 희망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갈리아 트란살피나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방대한 통치 지역 중 북쪽 경계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여론은 위기에 빠져 있는 통치 지역의 총독이 로마 근처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 지휘권을 확보하기 위해 쏟아 부었던 노력과 그것에 딸린 기회를 생각한다면 카이사르는 어떤 종류의 실패도 감수할 여력이 없었다. 앞으로 자주 사람들을 경악시키게 되는 특유의 놀라운 속도로 그는 서둘러 북쪽으로 향했다. 하루에 145킬로미터를 행군했다. 8일 후 그는 론 강 앞에 서 있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헬베티족의 이주는 급작스런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 년에 걸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그 계획을 세운 것은 카이사르가 약간 못마땅한 어조로 “부족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부유했다.”라고 표현한 오르게토릭스였다. 헬베티족은 그 수가 많고 호전적이었으며 산과 론 강 너머의 로마 속주와 동쪽에 있는 라인 강으로 둘러싸인 그들의 고향이 좁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었고 이웃 부족들과 전쟁할 기회도 적었다. 이 점이 호전적인 그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갈리아에는 약탈과 습격이 만연해 있었지만 헬베티족이 바란 것도 그런 기회를 충분히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명목을 내세워 부족을 단합시킴으로써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것이 오르게토릭스의 저의였다고 주장했다.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헬베티족은 왕이 없었으며 부족장 회의 및 선출된 지도자 또는 행정관이 통치하는 체제였다. 오르게토릭스는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본인도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주조된 동전 중에는 ‘ORCIITIRIX’의 형태로 그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있다. 그는 부족장들의 동의를 얻은 뒤에 다른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이동할 길을 확보하려 했다. 부족 회의 또는 행정관보다 개별 부족장을 설득하는 편이 더 쉽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세콰니족의 카스티쿠스와 하이두이족의 둠노릭스의 동의를 얻어냈다. 헬베티족은 갈리아 중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들 두 부족의 영토를 통과하거나 근처를 지나며 서쪽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들의 도움 내지는 방관은 헬베티족의 이주와 정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13 _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 원정, 기원전 55~54년
기원전 56년에는 갈리아에서의 군사 행동은 소강상태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처음 2년간의 승세를 몰아가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그가 다음 목표를 브리타니아(영국)로 확정한 것은 군대가 월동하던 겨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브리타니아의 부족들이 자신과 싸우던 갈리아인들에게 지원군을 보내고 있었기에 그 원정이 꼭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갈리아 해안 부족들은 바다 건너에 있는 사람들과 밀접한 교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과거에는 정치적 연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갈리아 전쟁기』에서 베네티족과 다른 해안 부족들과의 전쟁을 다룬 부분에 브리타니아인들이 대거 개입했다는 내용은 없다. 물론 북유럽에서는 전사 개개인이 다른 부족의 유명한 족장에게 고용되는 일이 흔했고 일부 브리타니아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카이사르의 군단과 싸웠을 수는 있다. 결론적으로 브리타니아에 있는 부족들이 로마가 갈리아를 장악하는 데 군사적 위협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명목에 불과하며 브리타니아가 실제로 카이사르의 주의를 끌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먼저 당시에는 브리타니아에 값비싼 천연 자원이 풍부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수에토니우스는 특히 진주를 좋아하던 카이사르의 개인적 취향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브리타니아 연안에 질 좋은 진주가 많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또,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였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로마군을 이끈 최초의 인물. 브리타니아의 경우에는 여기에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이 더해진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육지를 모두 둘러싼 것으로 알려진 광대한 바다에 있는 나라. 브리타니아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없었고 브리타니아의 기묘한 생물들과 괴상한 관습에 대해서도 확인된 사실 없이 온갖 소문만 난무했다. 유럽이 세계를 탐험하던 시대, 사람들이 신세계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과 흡사하다. 브리타니아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로마에 있는 모든 계층 사람들의 관심을 휘어잡을 것이 틀림없었다.
16 _ ‘갈리아 전체가 정복되었다.’
갈리아에 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로마에 자신의 존재와 업적을 알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갈리아 전쟁기』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당시 그가 내놓은 결과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원전 54년 초,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갈리아 키살피나를 나와 북쪽으로 가면서 그는 두 권짜리 『유추론 De Analogia』을 쓰기도 했다. 이 『유추론』은 제목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지만 내용은 라틴어에 관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유추론』에서 라틴어 문법을 분석함과 동시에 말하기와 글쓰기에 있어서 고품의 형식 및 복잡한 표현과 대비되는 정확성과 간결성에 대해 논했다. 이 책은 키케로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는 키케로에게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이자 실질적인 수사학의 창시자”라는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매일 하는 연설은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하라는 충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극히 일부만이 전해진다. 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2차 브리타니아 원정 계획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에서도 이런 상세하고 권위 있는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은 그의 지능과 활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갈리아 전쟁기』와 비교하여 극히 소수의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독자층에는 문학에 탐닉한 많은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 계급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퓰라리스 정치가로서 카이사르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로서 카이사르에 대한 논란은 없었다.
카이사르에 대한 키케로의 찬사는 자발적인 것이었다. 물론 자신을 망명에서 돌아오도록 도와준 카이사르와의 관계에 일부 영향을 받기는 했을 것이다. 키케로는 자신의 글의 초고를 카이사르에게 보내고 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의 정치적 우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로마의 엘리트들에게는 문학을 도구로 쓸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저명인사들, 특히 유명한 장군들에게는 자신들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물을 건립하는 전통이 있었다.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는 두 번째로 집정관을 지내면서 전무후무한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역대 최대의 기념물을 건축했다. 그것은 거대한 극장이었다. 디오는 도시 로마에 건립된 최초의 석조 극장인 그 건축물을 일컬어 ‘이후 3세기 동안 로마 최대의 건축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극장의 돌로 만들어진 좌석에는 동시에 1만 명 이상이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준비성 있는 사람들은 방석을 지참하고 갔다).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위치한 그 극장은 여러 세기에 걸쳐 승리를 거두었던 장군들이 바친 신전들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안에 포함된 신전은 최소 5개, 중심이 되는 것은 ‘승리의 비너스(Venus Victrix)’였고 이 밖에 ‘명예(Honos)’, ‘용기(Virtus)’, ‘행운(Felicitas)’과 같은 덕목을 상징하는 신에게 바쳐진 신전들이 있었다. 원형에 가까웠던 그 극장에는 가로 175미터, 세로 130미터의 회랑이 붙어있었으며, 설계부터 건축 재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건설에 투입된 막대한 비용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3부 : 내전, 그리고 독재관, 기원전 49~44년
17 _ 루비콘으로 가는 길
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부와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기원전 50년에는 심각한 전쟁이 일어날 징후는 전혀 없었으며 처절한 실패로 끝난 반란의 경험, 그리고 카이사르의 세심한 외교적 배려가 결합되어 모든 면에서 갈리아는 공화국의 안정적인 새 속주로 정착하고 있었다. 갈리아 부족 지도자들 대부분이 기꺼이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였던 것은 카이사르 개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6년 후에 그가 암살되었을 때에도 이로 인해 갈리아에서 새로 소요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성공을 거둔 다른 지휘관들이 그렇듯 카이사르 역시 막대한 개인적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정복으로 로마가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이 빛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공화국은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하게 되었다(물론 속주 방어 비용과 균형을 맞추어야 했지만). 갈리아 트란살피나 그리고 이스파니아로 가는 중요한 교역로의 안전이 확보되었으며, 옛 킴브리족과 튜턴족 같은 북방 부족들의 침공에 대비한 완충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이탈리아도 더욱 안전해졌다.
물론 그 무렵에는 당면한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은 없었으며 처음 원정을 시작할 당시의 카이사르에게도 이것이 최우선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실존하는 위험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갈리아 정복이 공화국에 가져다준 이익은 그야말로 커다란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복 사업은 국가보다는 개인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향이 있는데 로마 제국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카이사르가 오기 전에도 로마인들은 갈리아와 많은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원정은 새로운 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준 격이었다. 로마인들은 무척 유리한 환경에서 사업을 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전리품과 노예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기에 그들도 곧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 본인은 재산을 유지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공공건물 신축, 시민들을 위한 오락 제공, 친분을 만들려는 사람들을 위한 자금 제공 또는 무이자 자금 융자 등에 아낌없이 돈을 썼다. 갈리아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갈리아 정복의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갈리아에서의 승리가 공화국과 시민에게 가져다준 어떤 이익도 카이사르 본인에게 가져다준 변화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기원전 50년 전에는 재산과 인맥, 업적과 경력 측면에서 카이사르와 비견될 만한 인물은 폼페이우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19 _ 마케도니아, 기원전 49년 11월~기원전 48년 8월
카이사르는 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이스파니아를 맡겼다. 호민관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이례적인 시기였고, 카시우스는 그 지역에서 회계감시관을 지내면서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훗날 이는 좋지 못한 선택이었음이 입증된다. 카이사르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은 누구든 환영했으며 자신에 대한 충성에 명예와 관직, 재물로 보답했다. 그는 자신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설령 강도일지라도 성심 성의껏 보답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키케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카이사르에게 모여든 사람들을 방종한 건달들의 패거리라고 멸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카이사르 측 사람들을 ‘상속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이제는 공화국을 통치하려 드는 떨거지들’이라고 표현했다.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기원전 49년 이전, 카이사르는 종종 농담 삼아 “그 사람들에게는 내전이 필요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명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인생 역전의 마지막 희망을 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케로와 폼페이우스 측의 일방적인 판단 또는 선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잘못일 것이다. 물론 일부를 제외하면 카이사르의 레가투스와 고위 막료들 중 내전에서 탁월한 능력 또는 인격을 보여준 사람은 없었다.
심각한 판단 착오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지명도만 보면 훨씬 우세했던 폼페이우스 측 인사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전직 집정관들 대다수는 과거 선거 부정협의로 기소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또, 카이사르에게 유리했던 것 중 하나는 항상 제 멋대로였던 도미티우스 에노발부스와 같은 인물들을 통제할 필요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카이사르가 현장에 있어야만 일이 제대로 풀렸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도 크레보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마실리아 공성 임무를 잘 완수했다. 쿠리오도 싸우지 않고 시칠리아를 확보했다. 폼페이우스는 카토를 보내 그 섬을 지키려 했었다. 하지만 휘하에 병력도 부족했던 데다가 가망 없는 방어전을 폈다가 손실만 입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카토가 탈출해 버렸던 것이다. 성공을 거둔 쿠리오는 기원전 49년 여름, 군단을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강력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패주시키기도 하면서 처음에는 잘 싸웠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유바 왕이 이끄는 누미디아 군대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쿠리오는 많은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죽었고 다른 병사들도 도주하다가 살해되거나 항복했다가 왕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결국 살아남아 탈출한 사람은 극소수였는데, 그중에는 아시니우스 폴리오도 있었다. 훗날 폴리오는 카이사르의 『내전기』의 일부 내용에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쿠리오에 대한 카이사르의 호의적인 묘사였다.
21 _ 아프리카, 기원전 47년 9월~기원전 46년 6월
카이사르는 9월 말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마케도니아로 떠난 뒤 20개월 만의 귀국이었으며 파르살루스에서의 승리 이후로도 1년 이상이 지난 뒤였다. 기원전 48년에도 그는 자신의 대리인들 및 여러 저명인사들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디오에 의하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패배를 전하기 위해 로마로 공식 사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이 별로 고상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 중에는 평소 그 많던 편지 왕래가 뚝 끊어졌다. 처음에는 적의 봉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랬지만 이후 봉쇄가 풀린 되에도 카이사르는 한동안 로마를 향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기원전 47년 6월에 보낸 키케로의 편지에는 카이사르로부터 6개월이나 소식이 없었다고 쓰여 있다. 카이사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와 같은 행동은 그가 피로에 지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유발하게 한다. 분명한 것은 예상보다 길었던 카이사르의 이집트 체류가 그에게 큰 문제를 야기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적들은 다시 모여 기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으며, 로마와 이탈리아에는 불확실한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지지자들 사이에는 ‘과거 카이사르의 호의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 대한 기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에 대한 충성심을 제외하면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었다. 마케도니아에서 전쟁이 진행되던 동안에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극소수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승리할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키케로와 활발한 서신교류를 했던 카일리우스 루푸스는 내전이 시작되자 일찍이 자신이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듯이 ‘군대가 훨씬 강해 보이는’ 카이사르 편에 가담했었다. 카이사르는 그를 기원전 48년의 법무관으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보다 높은 직급이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간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 예로 레가투스였던 트레보니우스에게는 전해에 마실리아가 맡겨지기도 했다. 심통이 난 카일리우스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려 했다. 카이사르의 온건한 정책을 미흡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그의 과격한 계획을 환영했다. 그는 더 나아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트레보니우스와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다. 원로원은 호민관 두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각 ‘최종 결의’를 발효했으며 집정관은 브룬디시움으로 향하던 신병들을 로마로 이동시켰다. 카일리우스는 도시에서 쫓겨났다. 당시 밀로는 카이사르의 사면 거부를 무시하고 망명지 마실리아를 떠나 이탈리아에 와 있었는데, 카일리우스는 그와 합류할 생각이었다. 예전 밀로가 망명을 떠났던 데는 폼페이우스의 역할도 지대했지만 이제 그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을 내걸고 반란군을 모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고 그는 카일리우스가 합류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카일리우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23 _ 3월 15일(THE IDES OF MARCH)
기원전 44년이 되자 카이사르는 55세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격렬한 활동을 하고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의 간질병이 악화되었거나 그의 초인적인 활력이 약화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로마인의 평균으로 보면 한창 때는 지난 뒤였지만 카이사르가 15년 또는 20년, 또는 그 이상 더 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기원전 44년 3월에 죽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암살자들도 가까운 시일 내에 그가 세상을 뜰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확실하다. 음모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카이사르의 죽음은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체제, 그가 하려던 일들의 상당 부분은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40년 넘게 절대 권력을 쥐었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서서히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지만. 우리는 카이사르가 하려던 일들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카이사르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 한다더라 하는 유의 수많은 소문이 이미 그의 생전에도 돌아다녔다. 때로는 아주 급진적인 것도 있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결국 내전으로 맞붙게 되는 양측의 뜨거운 선전으로 인해 카이사르의 진의는 더더욱 진흙 속 깊이 묻혀버리게 되었다. 기원전 44년 첫 세 달 동안에 쓰인 키케로의 편지가 출판되지 않은 것은 정말로 아쉬운 일이다. 그 격동의 시기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되었을 텐데. 카이사르의 장기적인 목표에 대해서도 일부 의문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최소 3년 이상 이탈리아와 로마를 떠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암살자들이 결행을 서두른 것은 독재관이 며칠 후에는 원정을 떠났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카이사르가 상대할 적은 외부의 적이었고 승리를 거둘 경우 내전에서처럼 그 영광의 빛이 줄어들 소지는 전혀 없었다. 그는 먼저 디키아의 왕 부레비스타를 칠 예정이었다. 기원전 58년부터 염두에 두었음직한 발칸 반도 원정을 결행하는 것이다. 그해를 넘기지 않고 원정을 마무리할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그 다음은 파르티아였다. 카레에서의 크라수스의 패배를 설욕하는 것이다. 최근 파르티아는 또다시 시리아를 침공했으며 내전을 재개하려던 폼페이우스 파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황제? 신? 카이사르?
기원전 45년 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실질적으로 황제였다. 그는 공화국 로마의 어떤 개인, 어떤 단체 또는 기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위치를 확보했다. 하지만 그 힘은 원로원과 시민들이 그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원래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로 한정된 것이었다. 카이사르와 비슷한 환경에 있었던 술라는 무제한의 권력을 쥐고 있다가 스스로 물러나 일반인으로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이런 술라를 정치적 문맹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는 이미 집정관이자 10년 임기의 독재관이었으며 이는 로마 전통으로 볼 때 상상하기 힘든 기간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44년 초, 이것은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바뀌었다. 이밖에 특별히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종신 감찰관의 권한도 주어졌다. 이런 명예는 대부분 상징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적발한 공로로 ‘국가의 아버지(parens patriae)’로 칭송되었지만, 카이사르에게도 그 호칭이 주어졌다. 카이사르에게는 개선식보다 위에 있는 유일한 의식을 치르는 것도 허락되었다.
‘최고전리품(spolia optima)’을 봉헌하는 그 의식은 일대일로 대결하여 적 지휘관을 죽인 총사령관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실제 그 의식을 행했다는 증거는 없다. 또 다른 예외적인 명예는 극장에서 호민관들 곁에 앉는 권리였다. 다른 공식 석상에서 그의 자리는 이미 집정관들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그가 집정관을 맡지 않은 경우), 그 상아 의자가 황금으로 치장된 의자로 바뀌었다. 그의 생일은 공식적인 축제일이 되었으며 그가 태어난 달의 이름은 율리우스(Julius)로 바뀌었다. 또, 그는 살아 있는 동안 경화(동전)에 모습이 새겨진 최초의 로마인이 되었다. 카이사르의 두상은 일부 동전에만 새겨졌지만 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널리 확대해서 시행했고 관행으로 만들었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질문을 던졌다. 은전에는 누구의 얼굴이 있느냐? 황제의 얼굴이 있었다.
에필로그
카이사르는 무척 많은 일을 했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사건도 많았고 기록도 풍부했다. 따라서 소설과 영화를 막론하고 그의 경력 전체를 다룬 것은 무척 드물다.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지배자들 Masters of Rome』은 각 권이 700~800페이지 분량으로 된 6권짜리 시리즈인데, 가장 방대하고 상세한 작품이기도 하다. 마리우스와 술라로부터 시작하여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까지를 다른 이 책은 실제 사실들에 기반을 두되, 주요 인물들의 사생활과 사료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을 작가의 창작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에만 얽매여야 하는 역사가들과 달리 소설가들은 상당 부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보다 가볍고 아담한 크기인 콘 이굴든의 『제왕 Emperor』 시리즈 중에는 영웅 카이사르의 모험담이 있다. 흥미진진하고 사건 전개가 빠르지만 역사적 사실에는 다소 소홀한 듯하다. 매컬로와 아굴든의 작품에서 카이사르는 다소 냉혹하긴 하지만 무척 호의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카이사르의 삶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모르는 것도 많고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어진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독립적,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공직 생활 및 개인 생활에 있어서 그가 느꼈던 감정, 그의 성격의 여러 측면들, 그의 종교적 믿음, 특히 말년에 그가 가졌던 야망의 실체 등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상상할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다. 각자는 각자만의 카이사르를 기억에 담을 수 있다. 숭배하건 혐오하건, 아니면 그 둘이 섞여 있건 간에. 2천 년도 더 지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지금 이 이야기가 그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