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유영진1)
주변부 것들의 귀환
-『니가 어때서 그카노』(남찬숙 글, 이혜란 그림, 사계절, 2006)
누가 그랬던가? 소설은 모든 중심에서 밀려난 것들의 귀환이라고. 깡패, 곰배팔이, 양아치, 백수, 건달, 창녀들의 귀환이 바로 소설이라고.
동화와 소설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소설은 깡패, 곰배팔이, 양아치, 백수, 건달, 창녀들의 이야기지만, 동화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깡패나 창녀는커녕 동화에서 사투리까지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한 원로 동화 작가는 모 잡지를 통해, 동화는 어린이들이 읽어야 하는 글이기에 표준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불과 5년 전 일이다. 그 원로 동화 작가는 ‘동심천사주의’를 혁파하고자 외로운 투쟁을 했던 고 이오덕 선생님과 뜻을 같이하셨던 분인데도 ‘동심천사주의’의 본질적 한계는 그대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동심천사주의’자들은 동심은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동화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 어른의 더러운 이야기는 들려주면 안 되고, 왕자나 공주처럼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나 구름 위에 페가수스가 뛰노는 환상적 이야기를 건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2) 이 생각의 바탕에 어린이문학은 기존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교육적 도구’라는 통념이 깔려 있다. ‘동심천사주의’를 반대하고 소외된 어린이들의 삶을 힘차게 보여 주려 했던 그 원로 작가도 결국 ‘동심천사주의’가 갖고 있는 궁극적 한계, 즉 ‘어린이문학은 교육적 도구’라는 한계는 돌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해 전 출간된 『강마을에 한번 와 볼라요?』(고재은 글, 양상용 그림, 문학동네어린이, 2004)는 이런 통념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이 작품은 걸쭉한 사투리가 우리 동화에 얼마나 풍요로운 자양분인지를 보여 주었다. 물론 이 작품 이전, 이후에도 사투리를 잘 구사한 작품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2000년대라는 시대적 특성과 결부지어 이해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어린이문학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비평가들과 작가들은 이 르네상스는 어린이문학의 내적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사회 변혁을 갈망하고 몸으로 부딪쳤던 386세대가 학부모로 건강하게 성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물론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때 그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정말 ‘진보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보적’이었기에 ‘진보적’인 동화작가의 책을 찾아 읽었고, 그들을 재평가한 비평가 그룹과 시민운동 그룹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왜곡된 전집류 중심의 시장을 꼼꼼하게 정성이 들어간 ‘단행본’ 위주의 시장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히려는 게 정말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만이 목표였을까?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지금 부동산 투기와 사교육 열풍을 이끌고 있는 세대가 386세대라는 점에서 어린이들에게 ‘좋은 책 주기’는 결국 자기 아이가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의심은 설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얼마 전 <한겨레 21>(639호)에서 서울에 살고 있는 40대를 대상으로 이른바 대권주자 선호도 조사를 했다. 뉴타운으로 서울 곳곳에 아파트 투기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환경 파괴가 불을 보듯 뻔한 ‘경부 운하’를 중심 공약으로 내세운 대표적 개발론자인 이명박 씨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2000년대 초반 찾아온 어린이문학의 르네상스는 사실은 이른바 386세대 학부모의 폭발적 교육적 열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비록 읽을 만한 작품이 없었다곤 해도, 그 르네상스기에 서정적 장르인 동시는 여전히 답보 상태였고 계몽적 장르인 동화만 성장을 했으며, 이 동화의 호황 역시 금방 사그라지고 (동화 역시 아이들의 사회적 적응을 돕는 동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좀 더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논픽션 책으로 시장의 중심이 금방 넘어가 버린 걸 생각해 보자.
문제는 이때 동화작가들을 ‘예술가’가 아닌 ‘업자’로 잠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업자’로 착각한 작가는 어린이문학이 침체되며 다시 예술가의 자리를 되찾든지 제대로 된 업자의 길로 나서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고재은의 작품은 중심부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업자’의 길을 갈 것인가 주변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시절, ‘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힘, 주변부의 힘, 사투리의 힘을 보여 준 작품인 것이다.
남찬숙의 장편 동화 『니가 어때서 그카노』는 『강마을에 한번 와 볼라요?』에 이어 ‘사투리’의 지위를 끌어올린다. 이 작품에서 사투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알고 싶다면, 한번 이 작품의 문장을 몽땅 표준어로 바꾸어 읽어 보라. 그 비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 바꾸어 읽는 게 힘들다면 마지막 송연이가 경순이에게 보내는 편지라도 바꾸어 읽어 보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는 이 작품이 구현하고자 한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투리 자체가 메시지인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농촌’이라는 주변을 중심으로 불러낸다. 많은 농촌 이야기들이 대개 작가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상적 공간으로써 농촌을 그려 내거나 사업에 실패한 도시인이 잠시 쉬며 활력을 되찾아가는 역시 이상화된 공간으로 그려져 왔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진짜 농촌 아이들’의 삶은 그다지 많이 그려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이상화된 공간의 ‘이상화된 아이들’도 아니고, 도시 아이들에게 관찰되는 농촌 아이들이 아니다. 삶의 공간만 농촌일 뿐 학원을 다니고 남는 시간엔 컴퓨터 게임에 매달리는 도시 아이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진짜 현실의 아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농촌의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주변부 아이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도시, 특히 서울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송연이는 그런 콤플렉스가 하나도 없다. 송연이의 언니는 이 콤플렉스 때문에 도시 유학을 가고 학원을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송연이는 그저 나머지 공부나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고, 서울로 전학 간 친구에게 도시 아이들 때문에 기죽지 말라며 ‘니가 어때서 그카노!’라 외친다.
남찬숙이 불러낸 소외된 것들은 그밖에도 여럿이다. 여성, 공부 못 하는 아이, 중학교밖에 못 나온 엄마, 아빠, 부모의 별거로 시골로 온 아이 등등.
남찬숙이 외치는 ‘니’는 결국 모든 주변부의 소외된 것들이 아닐까? ‘사투리가 어때서 그카노?’부터 시작해서 그가 불러낸 모든 소외된 것들의 이름을 ‘니’에 대치시켜 보자. 이 작품이 갖는 단점인 턱없는 낭만성을 상쇄시켜 주는 강력한 예술적 함의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