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런 생각으로 머릿속은 뒤엉킨 수세미 같았다. 씨티촬영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발가락 끝을 통하여 죄다 빠져나갔다. 고무장갑을 낀 채였다. 장갑 안에서 후끈한 수증기가 진득하게 느껴질 때까지 나는 꼼짝하지 않고 결과를 알리는 전화를 기다려야 했다. 2년에 한번씩 남편은 직장단위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검사를 받았었는데 폐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엑스레이 직접 촬영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내게 말한 것 같지만 나는 그 말을 건성으로 들었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였던 남편은 곧바로 병원부터 들른 모양이었다. 김장을 하려고 절인 배추의 양념을 준비하던 아침나절이었다. '그놈의 담배 때문일 거야' 아이들이 나무젓가락 끝에 꽂힌 알사탕을 빨듯 계속해서 남편은 담배를 빨았다. 내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 연기를 피울 때면 입에 거품을 물고 별별 야만스런 독설을 퍼붓는데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줄기차게 태웠다. 담배가 몸에 이로운 영양제라면 하루에 열 갑을 태워도 말하지 않겠다고 얼르기도 하지만 그 애착을 버리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담배를 파는 동네 입구 가게에서부터 연초 제조창까지 당장 달려가 차근차근 부숴버리고 싶은 분노가 복받쳐 왔다.
남편은 남달리 체구가 작고 허약해 보이는 사람이다. 태풍이 세게 불어도 종잇장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은근히 걱정하며 살아왔던 터다. 고무장갑을 벗어 주방에 던져 놓고 경황없이 소파에 앉으니 두 배의 중량감으로 의자는 깊숙이 가라앉았다. 엑스레이 직접 촬영을 하고 또다시 씨티촬영이라는 정밀검사를 받는다는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고 의학 상식이 부족한 나는 두렵고 앞이 캄캄했다.
가족을 위해 모진 추위와 비바람을 혼자 맞으면서 말없이 버텨온 느티나무와 같은 사람. 그를 만나 살아온 생애가 스크린을 흐르는 필름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젊었을 적 어느 해 여름이었다. 퇴근 길 시내버스에서 내렸을 때 길 건너 찻집에서 시원한 주스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냥 왔다고 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그 무렵 누에가 뽕을 단숨에 먹어치우듯이 쓴 것 단 것 없이 한창 먹으며 자랄 때였다. 집에서 농산물 도매시장까지는 삼십여분이 걸렸지만 나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다녔다. 양이 많고 못난 사과를 한 상자씩 사서 머리에 이고도 남편의 말이 목에 걸려 시내버스를 타지 않았다. 비록 마시고 싶었던 주스 한 잔 마실 수 없었던 남편이나 시내버스비마저 아끼고 싶어 고개가 휠 것처럼 무거운 과일 상자를 이고 걸어 다녔던 나도 그것이 결코 서글프진 않았다. 어린 새끼들 웃음소리가 담 밖으로 새는 그때 우리는 행복하였다. 이제 아이들은 다 출가하였고 남은 우리 내외는 마시고 싶은 주스도 실컷 마시고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가 늙고 병드는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그런 대로 큰 병 앓지 않고 지내왔다. 그런데 내 남편이 중병 환자가 찍어야 한다는 씨티촬영을 하게 된 것이다. 친구들이 한 번쯤은 부부 동반하여 다니는 외국 여행 한번 우리는 떠나보지 못하였고 귀여운 손자도 아직 안아보지 못하였다. 가슴 한 군데가 뚫린 것처럼 시려왔다.
적막을 깨우며 전화벨이 울렸다. 결과가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택시 안에서 휴대폰으로 몇 마디를 남기고 끊어버린다. 목소리는 평소 여느 때처럼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애태우는 나에게 택시를 타기 전 전화하여 결과부터 알려 주지 않는 것은 그의 타고난 성격이다.
냉수 한 컵으로 나는 마른 목을 적셨다. 내 손으로 아직 전등 한번 갈아 끼워본 일 없었다. 주말이면 유리창 청소는 남편이 맡아 놓고 해주었다. 크고 작은 심부름도 남편이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가장 큰 의지는 생활수단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절대적인 존재로 새삼스럽게 인식되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지극한 이기심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가운 기계 속에 몸을 맡기고 미라처럼 누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의 시 구절처럼 서글프게 내 영혼을 깨우는 구두 발자국 소리와 함께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으로 들어선 그의 손에는 노란 큰 봉투가 들려 있었다. 거실 바닥에 힘없이 내려놓으며 폐에 기포가 생겼고 결핵이라는 판독이 나왔다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였지만 어두워 보였다.
간호사 생활을 오래 하였다는 아래층 K시인을 불렀다. 그는 우리 집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고, 그의 남편은 의과대학 교수였다. K는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베란다 창 쪽에 펼쳐 보더니 나름대로 아는 체를 하였다. 명랑하고 입담이 좋아 평소에도 장난스럽던 그는 오후에 남편이 돌아오면 상의해 보자면서 은근히 겁을 주는 얘기들을 쏟아 놓았다. 결핵 환자는 양 볼에 도화색을 띄고 늘 발그레한데 이제 보니 선생님이 그랬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욕이 무척 강해지는 병이라고 스스럼없이 남편을 폐결핵 환자로 내놓고 떠들었다. 하지만 요즘 결핵은 잘 먹고 편히 쉬면 쉽게 낫는다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병 주고 약도 주고는 내려갔다.
남편은 온종일 서재에서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양념을 버무려 김장을 담그는 동안 별별 생각이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올 겨울 이 김치를 남편과 마주 앉아 함께 먹을 수 있을까, 결핵을 앓는 남편은 마산 어디쯤에 있다는 요양소로 격리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를 찾아가 슬픈 상봉을 해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폐에 기포가 생겼으니 척추를 가르고 대 수술을 해야 한다고, 남편의 사진 판독을 듣고 K가 저녁에 올라왔다. 폐암이 아닌 것에 순간 감사하면서 올 것이 왔구나 싶더니 차라리 마음은 침착해졌다. 오진이 있을 수도 있어, 내가 잘 아는 성당의 교우 중 흉부외과 의사인 바오로씨 집으로 사진을 들고 늦은 밤 찾아갔다. 사진으로 보아 결핵이라며 요즘 공해로 인해 결핵환자가 부쩍 늘어나는 추세라고 그가 말하였다. 그는 결핵 정도는 중병으로 생각지도 않는 눈치였다.
다음날 우리는 대학병원 결핵전문의를 찾아갔다 뷰박스에 사진을 끼운 의사는 잠시 그것을 주시하였다. 긴장한 남편은 말썽을 피우다 잡혀온 아이처럼 주눅이 들어있었고 나는 가슴이 떨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의사가 뷰박스에서 사진을 빼내고 테이블 앞에 앉자 나도 모르게 성급하게 말이 튀어 나왔다. "담배 때문이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 사진으로 나타난 증상은 젊었을 때 자각증상이 없이 결핵을 앓았다가 저절로 치료된 흔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핵은 담배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였다. 뒤에 서 있던 나를 돌아보며 남편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담배를 피운다고 너무 구박하지 말라는 듯한 얄미운 미소.
택시 승강장까지 앞서 걸어가는 남편의 걸음이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나에게는 쓸쓸하게만 보였다. 가난한 마음 하나를 신념으로 살아온 사람, 삶이 고달플 때마다 내가 내리찍은 흔적들이 그의 뒷모습에서 어른거린다. 우리가 병원 문을 빠져나올 때 근조 화환을 실은 작은 트럭이 영안실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남편은 어둠이 내린 베란다 구석에 서서 빨간 꽃잎 같은 불꽃을 물고 있다. 저 멀리 무등산 등성이 쪽으로 향하여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지 나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