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한(곽정욱)은 독립운동가 유태권(장동직)이 공중부양하는 것과 무술 연습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두한이 자신의 모습을 숨어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안 유태권은 두한을 불러 무술을 배우고 싶냐고 묻는다. 두한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고두심)와 어머니(전미선)의 복수뿐만 아니라 독립군이 되려면 싸움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대답한다. 유태권은 강한 훈련이 필요하다며 새벽마다 달려서 삼각산을 갔다오라고 말한다.
원노인(이순재)이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냐고 묻자 두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원노인은 일본사람들의 교육을 받으면 일본인밖에 더 되겠냐며 조금 더 크면 만주에 있는 독립군 군관학교를 보내주겠다고 위로한다.
며칠 후 원노인과 유태권은 김좌진(최동준) 장군이 급서했다는 전보를 받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두한과 친할머니(정영숙), 큰어머니(이덕희)도 큰 충격을 받는다. 반면 미와(이재용) 경부는 김좌진이 같은 조선인한테 목숨을 잃어서 잔치를 벌일 일이라며 좋아하는데….
# 1 그 밖
(지난 회에 이어)
어둠 속에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유태권의 모습이 보인다. 기 운동을 하고 있는 유태권. 손을 모으며 기를 모으고 있다. 작은 기합 소리가 계속 해 나오고 있다. 웃옷을 벗고 있는 그의 근육질에서 가득한 김이 오르고 있다. 두한은 문틈으로 계속 보고 있고 이윽고 기를 다 모은 유태권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2 그 방 안
충격이다. 두한은 충격으로 보고 있다. 공중부양으로 떠오르던 유태권이 그대로 회전하여 허공을 돌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권법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연이어지면서 발차기와 주먹이 순식간에 수십 합을 뻗어낸다. 주먹 단련용 말뚝이 휘청거리고 샌드백이 공중으로 춤을 춘다. 그는 마치 한 마리 새처럼 유연하고 날카로운 동작을 계속 한다. 다시 유태권의 손 끝 찌르기를 맞은 샌드백이 찢어지며 모래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유태권은 마치 한 마리의 성난 독수리처럼 안광을 번득이며 자세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데 그 시선이 두한 쪽을 보고 있는 듯 하다. 두한, 놀라서 얼른 잠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한다.
# 3 동 사동옥(아침)
가게 안에는 손님들로 부산하다. 원노인과 유태권이 손님들을 맞고 있다. 박군은 주방 일을 돕고 있다. 너무도 태연하게 일을 거들고 있는 유태권을 존경처럼 보고 있는 두한. 손님이 반찬을 청한다.
손님 여기 깍두기 좀 더 주슈.
원노인 예. 두한아, 깍두기 좀 더 올려드려라.
두한이 그제서야 시선을 돌리며 주방에서 깍두기를 가져다준다 유태권이 빙그레 웃는다. 두한은 괜히 몸 둘 바가 몰라진다.
유태권 (원노인에게) 두한이를 학교에 보내야 되지 않을까요?
원노인 학교라고 해봤자, 왜놈들 학교요. 일본 것을 배워서 뭣에 쓰겠소?
유태권 하지만.......
원노인 우선 장사나 거들게 하면서 뭔가를 생각해 봐야겠지요. 가르칠 거야 많지 않겠습니까?
다시 들어서는 손님들을 맞는 원노인. 두한은 여전히 놀라운 얼굴로 유태권을 보고 있다.
# 4 신문사 외경
중외일보의 간판이 보인다.
# 5 동 신문사 안
여전히 편집실은 부산하다. 국장과 최동열이 담배를 피우며 얘기 중이다.
국장 미와 경부가 지금쯤 펄펄 뛰고 있겠구만. 백야 장군의 가족들을 그렇게 안전하게 모셨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일세.
최동열 그러게 말입니다. 다 어른들의 도움입니다.
국장 다행이야. 그런데..... 그 분들께서 곧 큰 모임을 갖는다는데.... 알고 있나?
최동열 예, 만해 스님에게 들었습니다. 조선일보 계 신석우 부사장과 홍명희 선생이 주동이 되시고 만해 스님도 동참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국장 그 모임 명칭이 신간회라고 한다더군. 곧 창립 대회를 연다는데 자세히 좀 취재해 봐야겠어.
최동열 알겠습니다.
국장 이번 모임이 결성된다면 일제 치하에서 가장 합법적이고 대규모적인 단체가 될 가능성이 높다더군.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애.
최동열 그렇겠지요. 민족을 대변하는 유일한 단체가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이런 모임이 없었으니까요. 아주 기대할 만 합니다. 신간회, 신간회라..
국장 썩은 고목나무에 새싹이 돋아난다는 뜻이 아니겠나? 대단한 이름일세.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새 정기를 불어넣자는 그런 뜻이 아니겠나?
# 6 종로서
미와가 수북한 정보 보고서들을 계속해 훑어보고 있다.
미와 알다가도 모르겠군. 도대체 경무국에서는 왜 자꾸 이러는 지 모르겠어. 김좌진이의 가족을 그냥 놔두라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또 신간회 창립을 허가한다구?
오무라 조선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규모가 아주 커요. 전국적 규모라고 합니다.
미와 이것들에게 집회, 결사의 자유를 준다는 것은 화약 뭉치에 뇌관을 다는 것과 같은 거야. 미치겠구만.
오무라 아예 속 썩이는 단체들을 하나로 합법화 해주고 저들의 활동이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감시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미와 어리석은 소리야. 저들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제국은 득이 될 게 없다. (계속 서류를 보고 치우며) 명단을 파악해. 거기 참여하는 자들의 이름을 샅샅이 정리해 봐.
오무라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창립선언문도 만든다고 하던데요.
미와 뭐, 뭐? 선언문? 그 취지가 뭐야? 도대체 어디서 주관을 하는 거야?
오무라 조선일보계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목적은 뻔하지요.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불온한 단체입니다.
미와 이건 철저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 헌병대에도 연락을 해라.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창립 선언문도 철저히 조사해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이 있으면 모조리 압수해라.
오무라 알겠습니다, 경부님.
오무라가 대답하며 문 형사에게 눈치를 줘 함께 나간다. 김태서가 밖에서 들어온다. 미와가 소리를 빽 지른다.
미와 자넨 김좌진이의 가족 일을 알아보는데 웬 시간이 그렇게 걸리나. 뭐 좀 알아봤어?
김태서 예, 경부님. 저들은 삼청동 쪽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긴또깡은 사동옥이라는 설렁탕 집에 가 있습니다.
미와 설렁탕 집? 거긴 왜? 거기 누가 있는데.....?
김태서 원씨 성을 가진 늙은이가 운영하는 가게입니다. 백정들의 모임인 형평사의 경성 부회장이라고 합니다.
미와 형평사? 보나마나 사상이 불온하겠구만. 그러니까 김좌진의 아들을 거두었겠지. 자넨 계속해서 그 자들의 뒤를 염탐해보도록....
김태서 알겠습니다.
미와 오늘은 오무라를 도와주도록 하게. 신간횐가 뭔가가 시끄러울 모양이야.
김태서 예, 경부님.
# 7 기독교 청년 회관 외경
기독교 청년 회관 앞을 일본 경찰들과 헌병들이 삼엄하게 지켜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 주변을 지켜보고 있다. 군경의 경계 속에 신간회 임원들이 들어서고 있다.
# 8 동 기독교 청년 회관 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최동열과 기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단상에 홍명희가 서서 강령을 반포하고 있다. 오무라 등 형사들과 헌병들이 지켜보고 있다.
홍명희 나 홍명희는 몸이 불편하시어 오늘 이 자리에 못나오신 이상재 회장님을 대신하여 우리 회의 활동강령을 반포합니다. 총 규약은 25개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합니다.
박수가 쏟아지고 있다. 강령은 계속 이어진다.
홍명희 둘째,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셋째로는 일체의 기회주의를 배척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홍명희의 상기된 표정에서 그 위로 해설.....
(해설) 신간회! 일제 치하에서 3.1운동과 6.10만세 사건을 잇는 거국적인 민족운동이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좌우합작으로 YMCA에서 창립 총회를 연 이 모임은 조선일보 부사장 신석우를 발기인으로 하여 회장에는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 부회장에는 홍명희와 천도교 쪽의 권동진이 맡았다. 이외에도 훗날 동아일보 사장이 되는 송진우, 건국 후에 대법원장이 되는 김병로, 그리고 조병옥 등과 허헌, 김준연, 백관수, 이갑성, 이승훈, 한위건, 최원순과 만해 한용운 등 35명의 간사로서 그 출발을 보았다. 회장인 월남 이상재가 창립 한 달만에 세상을 뜨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신간회는 많은 민족의 문제에 앞장을 서고 투쟁하였는데 1931년, 해산할 무렵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무려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긴장한 총독부는 이들의 노골적인 민족화운동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감시와 핍박의 족쇄를 늦추지 않았다.
계속해 강령을 반포하고 있는 이상재와 만해, 홍명희 같은 이들의 열렬한 박수를 치는 모습들하며 감동 같은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최동열의 표정에서....
# 9 종로 거리
인파 속을 최동열과 만해가 걸어오고 있다. 거리를 순시중인 경찰들의 모습도 보인다. 최동열은 좀 들떠있고 만해도 즐거운 표정이다.
최동열 스님, 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총독부가 이 집회를 허락했을까요?
만해 이유가 있지. 지금 이 모임에는 좌익과 우익의 여러 민족 지도자들이 모두 참가해 있어. 총독부로서는 감시와 관리가 용이하거든. 한 그물 안에 몽땅 넣어두고 보자는 것이야.
최동열 아하........
만해 간섭과 경계가 극심할 것이야. 벌써 그런 현상이 나타났지. 오늘 우리는 창립 선언서도 낭독하지 못했다. 온 조선 민중에게 보내는 선언서는 왜놈 순사들이 압수해 갔어. 내용이 불온하다는 거야.
최동열 ...........?
만해 하지만 그 까짓 선언서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문제는 행동이다. 얼마만큼 말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줄 수 있을 지 그것이 과제가 될 것이야. 저기 가서 요기나 하고 가자.
만해는 길가에 있는 선술집을 가리킨다. 그 곳엔 몇몇 행인들이 파전이며 탁주를 마시고 있다.
# 10 그 선술집
길가에 목로집이다. 주인 아낙이 빈대떡과 잔술을 내준다.
만해 보살님, 잔술 말고 동이 술로 주시요.
아낙 예, 스님. (잠시 보다가).....만해 스님이시지요?
만해 허허허. 그건 왜 묻소?
아낙 이 경성에서 근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술동이 곧 가져올게요.
몇몇 술꾼들도 이미 한용운을 알아보았다. 곁눈질을 하며 수근거린다.
최동열 헌데 스님, 사회주의자들과 민족 진영 사람들이 끝까지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만해 (마시며) 쉽지는 않겠지.
최동열 결국 언젠가는 서로가 주도권을 쥐려고 싸움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만해 네 놈도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최동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해 나도 대답하기 어렵구나. 허지만 지금의 목표는 하나도 독립이요, 둘도 독립이다. 내분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독립을 하자는 건 양 쪽 모두가 똑같은 생각이다. 오늘은 그것만 생각하자꾸나.
주모가 동이 술을 내다 준다. 거침없이 그릇으로 휘휘 저어 퍼 마시는 만해. 최동열도 따라 마신다.
만해 어찌 되었던 간에 다시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이 나라의 뜻이 있다는 사람들은 다 모였어.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독립운동이 시작 됐단 말이다. 독립운동, 독립운동.....
거침없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자 술꾼들은 "독립운동"을 운운하며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주모도 어쩔 줄 모른다.
만해 이제 모두 다 거리로 나와야 한다. 우리 불교도 산 속에서 거리로 나와야 하고 천도교도, 기독교도 모두 다 쏟아져 나와야 한다. 이천만 동포가 지난 3.1운동 때처럼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야. 아, 정말 기쁜 날이다. 기뻐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술꾼들 ........(눈치 보며 불안한 듯)
만해 최군, 이 좋은 날 노래 한 자리 없어서 되겠느냐? 내 한 번 불러보지.
또 동이에서 술을 퍼 마시고는 이별의 노래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장단을 치며 신명 나게 부르기 시작한다.
만해 (노래) 동해물과 백두산이...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한 만세. (계속)...
주인 아낙은 사색이 된다. 술꾼들은 그에 불안을 느끼며 일어나 나간다. 최동열은 웃고 있고 만해의 목청은 갈수록 높아진다. 거의 개방된 술집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하나 둘 그런 만해를 본다. 애국가는 2절로 넘어간다. 어느덧 최동열도 웅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그에 아낙이 다가와 만류한다.
아낙 스님.... 스님, 그만 좀 하세요. 여긴 순사들이 자주 지나갑니다요. 아이구 이를 어쩌나?
그러나 만해는 노래를 끝까지 부른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안을 기웃거리며 보고 있다. 바로 그때 일본 경찰 둘이 들어선다.
일경 누군가? 누가 그런 불온한 노래를 부르는 거야.
만해 하하하, 날세. 왜 뭐가 잘못 되었는가? 우리 노래를 우리가 부르는데 뭐가 잘못 됐나?
일경 (만해를 알아보고) 헤헤헤. 만해 스님이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많이 드십시오. 노래가 듣기 좋습니다.
만해 그런가?
일경 예, 좋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황망하게 되돌아 사라지는 일본 경찰. 아낙은 뻥해서 사라진 경찰 쪽과 만해를 본다.
# 11 그 술집 밖
경찰 하나가 도리질을 한다.
일경 저 중은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아. 미와 경부도 따귀를 얻어 맞았다구. 못 말리는 중이야.
# 12 동 술집 안
최동열 일본 경찰들도 역시 스님은 무서운가 봅니다. 하하하.
만해 내 노래가 썩 괜찮은 모양이야. 한 잔 마시고 계속 불러보자. 노래란 참으로 좋은 것이야. 때때로 속이 후련하거든. 하하하하하.
술잔을 들이키는 그 모습에서....
# 13 사동옥 근처 골목길
정진영과 양코가 오고 있다. 해가 지고 있다. 양코가 부지런히 두리번거리며 앞에서 걷는다.
정진영 양코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양코 응, 이 쪽으로 한번 가보려고.
정진영 이 쪽으로는 우리가 다니는 길이 아니잖아.
양코 (주변 살피며) 이 쪽 어디라고 했는데...........?
정진영 뭐가?
양코는 드디어 사동옥을 발견했다. 얼굴에 환한 기쁨이 인다.
양코 저기야, 저기라구! 설렁탕 집 이름이 사동옥이라고 했잖아. 대장이 저기 있을 거야.
정진영 ...............
양코 대장을 만나보자구. 아주 반가워 할 거야.
급히 사동옥으로 가려고 하는데 정진영이 잡아 제친다.
양코 어, 어... 왜 그래?
정진영 두한이는 왜 만나려고 하는 거야?
양코 우리들 대장이잖아.
정진영 그게 아니지? 너 거기서 동냥을 하겠다는 거냐? 이 바보 같은 놈! 넌 쓸개도 없어? 어서 돌아가자.
양코 싫어.
정진영 가자니까.
양코 싫다니까. 난 대장이 보고 싶은 거라구. 솔직히 소고기국도 먹고 싶어. 대장은 줄 거야. 우릴 못 본 척 하지 않을 거라구.
정진영 이리 와. 이리 오란 말이야. 어서 따라 와.
양코 왜 이래. 싫어, 싫다구. 얼마나 고깃국이 먹고 싶었는데..... 어젯밤에도 신나게 먹는 꿈을 꾸었단 말이야. 이거 놔. 가기 싫으면 나 혼자 갈 거야.
그러자 정진영이 주먹 한 방을 먹인다. 양코가 얼떨떨해서 본다.
정진영 그러니까 거지라는 거야. 적어도 대장에게 동냥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양코 씨.........여기까지 왔는데.....
정진영 정말 이럴 거야? 돌아갈래, 아니면 나 하구 한 번 싸워볼래. 한 번 해 볼 거야? 덤벼, 임마!
그러자 풀이 죽는 양코. 사동옥을 보면서 그 미련을 떨구지 못하며 돌아선다.
양코 (울듯이) 난 쌀밥에 소고기국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쌀밥에 고기국 말이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구....대장은 꼭 줄 텐데.....
정진영 어서 가.
# 14 사동옥 안
손님도 없이 한산하다. 가게 안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다. 저 만큼 골목길에서 양코를 앞세워 돌아서는 정진영이 보인다. 아까부터 그 모습을 원노인이 보고 있었다. 그때 가게 안 쪽에서 나오던 두한도 정진영들을 보았다.
두한 ......진영이에요. 진영이하고 양코예요, 할아버지.
원노인 그냥 놔두어라.
두한 ...........?
원노인 진영이라는 아이가 내키지 않는 것 같구나.
두한 ......하지만 할아버지........
원노인 저 놈은 커서 제 몫을 할 것 같구나. 비록 거지지만 자존심이 있어.
두한 ..............
원노인 다음에 시간이 되면 네가 가서 만나보거라. 그게 나을 거다.
두한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들을 본다. 괜스레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 골목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 15 그 사동옥 외경의 밤(부감)
또다시 유태권의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 16 동 집 뒷마당
어둠 속에서 유태권의 권법이 이어지고 있다. 그 날렵한 동작과 수 없이 변화무쌍하게 펼쳐지고 있는 자세들. 새로 바뀌어진 샌드백이 유태권의 주먹에 춤을 추고 있다. 공중으로 치솟아 회전하는 발차기는 마치 곡예를 하는 듯 하다. 그 담 모퉁이 한 쪽에서 두한이 숨 죽여 보고 있다. 여전히 경이로운 눈빛이다. 유태권이 권법 훈련이 끝나자 다시 양손을 벌려 기를 모으며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더니 우레와 같은 기합소리와 함께 정권 단련용 말뚝 세 개를 연속해 번개처럼 빠르게 쳐나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나무에 감겨 있던 새끼줄이 각기 터져 나가면서 세 개의 나무기둥이 모두 부러져 나가는 것이다. 그 엄청난 파괴력을 보며 얼어붙는 두한. 어느새 유태권이 그런 두한을 보며 미소 짓는다.
유태권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오거라.
두한 ............
유태권 이리 와.
멈칫하던 두한이 눈치를 보며 가까이 간다.
유태권 어제 밤에도 나를 보았지?
두한 .........(끄덕인다)
유태권 무술을 배우고 싶으냐?
두한 네.
유태권 왜 배우고 싶지?
두한 혼내줄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나석주 아저씨의 복수도 해줘야 해요.
유태권 그래. 넌 그렇게 하겠다고 했었지.
두한 그리고 또 독립군이 되려면 싸움을 할 줄 알아야 해요.
유태권 그래, 옳은 말이다. 좋은 생각이야. 이제 너도 혼자 사는 법을 배울 때가 되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네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지.
두한 가르쳐 주세요, 아저씨.
유태권 가르쳐서 되는 것은 하수라 하고, 스스로 깨우치는 사람은 상수라 한다. 상수란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어.
두한 ..............?
유태권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강한 훈련이다. 기를 모으는 것과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을 익히면 모든 것은 저절로 될 게다. 운동을 배우기보다 주먹을 배워라. 이 시대엔 그것이 필요하지.
두한 ...............
유태권 새벽마다 저 삼각산을 한 번씩 올라갔다 오너라. 절대로 중간에 쉬거나 걸어서는 안 된다. 계속 달려야 한다. 할 수 있겠어?
두한 .....할 수 있어요.
유태권 좋아. 그럴 수 있다면 너는 3년 안에 저 담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거야. 즉 나처럼 공중을 날아올라 상대를 대적할 수 있다는 거지.
두한 그렇게 하겠어요.
유태권 기를 모은다는 것은 제가 갖고 있는 무서운 파괴력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두한 네, 아저씨.
유태권 분명히 말하지만 너는 혼자서 하는 거야. 그리고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처음부터 너를 알아보았어. 넌 체질적으로 타고난 싸움꾼이야. 타고난 싸움꾼에게는 아무리 훌륭한 무술도 소용이 없단다. 너는 주먹 왕이 될 거야.
두한 ............?
유태권 주먹의 왕 말이다.
두한 .......(그 각오와 결심 같은...)
# 17 사동옥 외경(새벽)
사동옥과 그 주변 거리가 부감으로 보여 온다.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 오고 있다. 지난 행인 하나 없이 주위는 어둠과 정적에 잠겨 있다. 사동옥 문이 천천히 열리고 누군가 밖으로 나선다. 두한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심호흡을 하는 두한. 어디론가 달려가며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사동옥에 불이 켜진다. 그리고 원노인이 밖으로 나와 두한이 달려간 쪽을 바라본다.
원노인 그 녀석.. 오늘도 여지없이 삼각산에 가는구나. 피는 못 속인다더니... 과연... 과연 장군님의 아들이야..
흐뭇하게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 18 삼각산
두한이 산을 뛰어오르고 있다. 두한의 입에선 거친 숨소리와 함께 허연 입김이 연신 뿜어져 나오고 있다. 더욱 단단해지고 어른스러워진 모습이다. 그 위로 유태권의 소리가 들려온다.
유태권 (E)달려라. 달려야 한다. 절대로 중간에 쉬거나 걸어서는 안 된다. 계속 달려야 한다. 계속!
두한이 입술을 앙다물고 계속 오른다.
유태권 (E)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과의 싸움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두한이 넌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어.
계속해 달려가는 두한의 모습에서...
# 19 삼각산 공터
두한이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고 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힘을 다한다. 그 한 켠에서도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들이 여럿 보인다. 섀도우복싱을하며 지나치는 사람도 있고 역기를 드는 사람도 있다.
두한 백 하나.... 백 둘... 서른... 백... 세....엣
장면 전환 되면 두한이 철봉에서 내려와 다시 윗몸 일으키기를 하기 시작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두한의 모습 위로 원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원노인 (E)하하하.. 참으로 대견하지 않습니까?
# 20 사동옥 안(아침)
원노인과 유태권이 마주해 엽차를 들고 있다. 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흰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다.
원노인 두한이 말이에요. 아. 저 삼각산이 어딥니까? 저기가 얼마나 오르기 힘든 산이냔 말이에요? 허지만 두한이는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어요. 단 하루두요.
유태권 정신력이 아주 강한 아이입니다.
원노인 맞아요. 개성에서도 그렇고, 또 거지촌에서도 그렇고... 보통 아이라면 견뎌내지도 못했을 겝니다.
유태권 하지만 아직은 어린아이 일 뿐입니다. 험한 세상을 스스로 헤쳐나가려면 더욱 강해져야지요. 그래서 무술을 가르치기에 앞서 자신을 이기는 수련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원노인 잘 하셨습니다. 우리 두한이는 잘 해낼 겁니다. 이렇게 좋은 스승을 모셨는데 잘못될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유태권 저야 곁에서 지켜만 볼뿐이지요. 두한이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해 낼 아이입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이미 보았습니다. 분명히 두한이는 해 낼 겝니다.
원노인 (흐뭇하게 끄덕인다)
그때 문이 열리고 두한이 들어온다.
두한 다녀왔습니다.
원노인 오, 어서 오너라. 날씨가 꽤나 쌀쌀하던데 힘들지 않았냐?
두한 하나도 춥지 않아요. 보세요. 이렇게 땀이 나잖아요?
원노인 허허허.. 그렇구나.. 배고프지? 어여 씻고 아침 먹자꾸나.
두한 예, 할아버지.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원노인이 그런 두한을 흐뭇하게 본다.
# 21 삼청동 방안
오씨가 자그마한 상을 들고 들어온다. 친조모가 바느질감을 물리고 상을 받는다. 보리밥에 반찬은 멀건 국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뿐이다.
조모 (수저를 들며) 들자.
오씨 .....죄송합니다, 어머님. 이번 바느질삯을 받으면 장을 좀 봐 오겠습니다.
조모 일없다. 이렇게 이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지금 이 시간에도 만주 벌판에서는 수많은 동포들이 먹지 못하거나 얼어죽어 가고 있어. 이만해도 호강이다. 네가 죄송할 게 없다.
오씨 ................
조모 국 식는다. 어서 들어라.
오씨 ....예.... (수저를 들다가) 그리고 어머님..
조모 말해보거라.
오씨 여러 날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두한이를 이리로 데려오는 것이 부모 된 도리가 아닐런지요?
조모 두한이를 말이냐?
오씨 예, 어머님.. 그 아이는 아범의 단 하나 뿐인 핏줄입니다. 저렇게 남의 손에 맡겨 놓는다는 것은...
조모 그런 소리 말아라, 저 아이는 사내아이다. 우리 아녀자들이 무얼 해줄 수가 있단 말이냐? 여기서 자랄 아이가 아니다.
오씨 하지만..
조모 그리고 지금 형편을 보아도 될 수 있는 한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좋다. 사방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느니라. 독립군 사령관의 아들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져서 무에 좋을 것이 있겠느냐?
오씨 ...............
조모 그리고 원서방은 남이 아니다. 평생을 이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이다. 우리 두한이를 잘 길러줄 게다.
다시 수저질을 하는 친조모. 오씨가 얕은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에서....
# 22 사동옥 외경
일군의 손님들이 우르르 밖으로 빠져 나온다. 박군이 따라 나와 문 앞에서 인사를 한다.
박군 안녕히 가십쇼! 또 오세요!
# 23 동 안
박군이 들어오며 한숨을 내쉰다.
박군 휴.. 이제 한숨을 돌리겠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손님이 많은지..
유태권 여기 사동옥의 설렁탕은 내가 먹어봐도 정말 일품이거든... 한번 먹어본 사람은 다시 오게 되어있단다....
유태권이 빙긋 웃으며 방금 나간 손님들의 그릇들을 들고 주방으로 간다. 두한이 그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두한 저도 신이 나는 걸요.
박군 뭐야, 그럼 이거 어느새 나만 불평분자가 됐잖아? 하하하, 이거 참 애매하게 됐네 이거....
두한 아이, 참 형도.....(닦으며) 사실 형이 이 집에서 제일 많이 힘든 사람이에요. 이 집은 형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구요. 정말요.
박군 그래, 그렇지? 역시 두한이 밖에 없다니까..
두한이 미소 지으며 행주질을 한다.
원노인 두한아..
두한 (돌아보면).....?
원노인 그만 하고 이리 좀 와 보거라.
두한 예.. (행주를 박군의 쟁반에 슬쩍 올려놓고 원노인에게 간다)
원노인 힘들지?
두한 (미소) 아니요. 일하는 게 재밌어요.
원노인 말은 그렇게 해도 힘이 들 게야. 식당 일이라는 게 그렇거든. 하지만 이것도 다 공부니라. 일을 하면서 얻는 보람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거든.
두한 예, 할아버지.
원노인 하지만 아직 너는 어리다. 하루 내내 이곳에 있자면 박군과는 달리 많이 갑갑할 게다. 이제부터 오후에는 밖에 나가서 놀거라. 또래 친구들도 사귀고 또 세상 구경도 하고.. 그렇게 하거라.
두한 .........하지만..
원노인 그래 두한아.. 여기 일은 걱정 말고 나가서 놀아. 군것질도 하고 전차두 타보구 말이야.. 여기 종로 통은 가 볼 곳이 많단다.
두한 (미안하고)...........?
유태권 그렇게 하거라. 아침 운동 말고는 통 밖에 나가본 일이 없잖느냐?
원노인 (5전 짜리 지폐를 주며) 돌아다니자면 돈이 좀 필요할 게다. 받거라.
두한 이렇게나... 많이요?
원노인 허허허.. 남으면 내일 또 쓰면 되지 않구.
두한 .............
# 24 종로거리
종로는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친다. 그 붐비는 거리를 지나치며 두한이 오고 있다. 넋이 나간 듯 주위를 둘러보는 두한. 딱히 갈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때 저 만치서 교복을 입은 소학교 학생들이 떼지어 몰려온다. 두한이 길을 피해주며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부러운 것이다.
# 25 옛 두한의 집 골목
두한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옛집 골목을 걸어오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집은 이제 남의 집인 지 오래다. 한참 보고있으려니 순간적인 환상이 지나친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웃으며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박계숙 두한아. 아, 뭘 해 학교 늦겠다.
외조모 두한아, 두한아.....
두한 어머니, 할머니......?
두한이 그 환상 속에서 달려가려 하면 그네들의 모습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다. 갑자기 허탈해지는 두한의 표정에서.........
# 26 다시 종로 거리(현실)
두한이 걷고 있다.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두한이 멀어져 가는 차를 멍하니 보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막막하게 돌아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뭔가가 생각난 것이다. 그는 웃으며 힘을 내서 걷기 시작한다. 걸음이 빨라진다.
# 27 거지촌
정진영이 대나무와 천, 새끼줄, 노끈 따위를 잔뜩 늘어놓고 망태기를 만들고 있다. 양코와 다른 거지 아이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양코 그런 걸 만들어서 뭘 하려구?
정진영 장사를 할거라구 그랬잖아.
양코 장사라니, 그걸루?
정진영 그래.. 언제까지 구걸을 해서 먹고 살 수는 없잖아. 넝마나 종이를 주워다가 파는 거야.
양코 그게 될까...?
정진영 부지런히 돌아다니면 소득이 있을 거야. 돈을 벌어서 판잣집도 짓고.. 공부도 해야지..
양코 공부...? 난 그런 건 흥미가 없어. 그리구 이거.... 힘만 들구 아무 것도 없는 것 아냐?
정진영 두고 봐. 돈을 많이 벌 꺼야, 자 다들 봤지? 이렇게 만들면 되는 거야. 너희들도 각자 자기꺼를 만들도록 해.
거지들이 재료들을 챙겨 망태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양코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다.
정진영 언제까지 빌어먹을 수는 없어. 스스로 사는 힘을 배워야 해. 얻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 말이야. 그러자면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각오해야 해.
양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지...?
정진영 다같이 힘을 합치면 돼. 모자라면 서로 도와주고 남으면 나누어 갖고 그러는 것이야. 해보자구. 할 수 있다구. 돈이 되는 것은 뭐든지 하는 거야. 다 함께 말이야.
양코 난 자신 없어. 도무지 될 것 같지 않다구.
정진영 해야 해. 다 함께 하는 거야. 누구 하나가 빠지면 안 된다구.
양코 아이 씨... 빌어먹는 게 편한데...
정진영 어서 해. 이러다 하루 다 가겠어.
그렇게 열심인 정진영의 표정에서..
# 28 주택가 거리
두한의 발길이 아이들과 함께 오가던 그 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거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두한 (소리) 어떻게 된 거지? 진영이 애들이 아무도 보이지가 않네.
그렇게 가는데 어디선가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두한이 돌아보면.. 저만치 담벼락 아래서 일본 중학생들이 자신들보다 목 하나는 작은 조선 학생 아이를 둘러싸고 윽박지르고 있다.
일학생1 야 조센징.. 아휴 마늘 냄새..
조선학생 왜, 왜 그래?
일학생2 왜 그래? 그걸 몰라서 물어? 너희 조센징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며?
조선학생 이, 이러지마..
일학생3 가만있어 자식아...
하면서 작은 학생의 뺨을 후려친다. 작은 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그리고 안경이 떨어져서 깨졌다. 쓰러진 작은 학생 위로 발길질이 쏟아진다. 그 때다. 두한이 보다가 뛰어들며 그들을 좌우로 밀친다.
두한 그만둬! 이게 무슨 짓들이야?
일학생2 .....? 넌 뭐야? (두한을 찬찬히 보다가) 옳아... 너두 같은 조센징이라 이거냐?
두한 비겁한 놈들.. 여럿이서 한 사람을 때리는 건 옳지가 않아.
일학생1 (우습다는 듯 보다가) 이 자식 갖구는 성이 차지 않았는데 잘 됐다. 몸 좀 제대로 풀겠어. 안 그러냐?
두한 말로 할 때 다들 물러서. 어서.
일학생1 이 놈이 우리를 자꾸 웃길려고 그러네. 비키지 못해? 죽고 싶어?
두한 이 아이를 보내 줘.
일학생2 못 보내주겠다면...? 이게 어디서 겁도 없이
하며 그대로 주먹을 날린다. 그러나 두한이 슬쩍 몸을 피한다. 일학생2의 주먹은 그대로 담벼락에 부딪친다.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감싸 쥐는 일학생2.
일학생1 이 조센징 놈... (일학생3에게) 야, 다 덤벼!
일학생1이 주먹을 크게 휘두르지만 두한이 피하면서 엉덩이를 걷어찬다. 그리고 연이어 날아든 일학생3의 주먹을 옆구리에 맞았다. 그러나 두한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두한이 돌아서며 노려보자 일학생3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대로 일학생1,2,3을 번개처럼 누인다. 모두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모르는 채 나뒹굴어 있다.
두한 한 번 더 해볼 거야?
그러자 일학생1이 다시 입을 앙다물며 덤벼들자 두한은 그대로 발차기로만 연거푸 두 번 세 번 걷어차자 그대로 뻗어 버린다. 일학생2,3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도망을 친다. 맞고 있던 어린 학생이 인사를 한다.
작은 학생은 안경을 받아 든다. 그때 일학생1이 비실거리며 일어난다. 두한 앞에 어쩔 줄을 모른다.
두한 너..
일학생1 예, 예, 형님..
두한 또다시 이유 없이 조선 학생들을 괴롭히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일학생1 하이.. 하이..
두한 가봐.......
두 학생이 가고 두한은 씩 웃는다. 그렇게 다시 걸어간다.
# 29 사동옥
손님은 없지만 박군은 여전히 바쁘다. 그때 두한이 들어선다.
박군 어서 옵쇼...(하다가) 오... 두한이구나..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 더 놀다 오지 않구.
두한 ........할아버지는요?
박군 응.. 안에서 유태권 아저씨랑 얘기 중이셔. 왜, 재미가 없었냐?
두한 그냥요...(두한은 그렇게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박군 헤헤헤.....촌놈...갈 곳이 그렇게 없었어? 이런.....
# 30 동 마당
두한이 들어오는데 밀실에서 원노인과 유태권이 막 나오고 있다. 유태권은 외출복 차림에 가방을 들었다.
원노인 오 두한이 왔냐?
두한 예.. 어디 가세요?
원노인 좀 다녀오실 데가 있으시단다. 내일이면 오실 게야.
두한 예......
유태권 다녀오마, 두한아... 나올 것 없다.
두한 예.. (인사를 하며) 다녀오세요.
원노인과 유태권이 밖으로 향한다. 두한이 한숨을 내쉰다.
# 31 동 사동옥 앞
원노인과 유태권이 나온다. 무슨 일인지 그들은 다소 긴장된 표정이다.
원노인 조심하세요, 유동지.
유태권 염려 마십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어디론 가로 향한다. 원노인이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반대편 방향에서 두한에게 맞았던 일본학생 아이들이 기모노를 입은 어머니들과 함께 사동옥 쪽으로 오고 있다. 원노인이 눈을 크게 뜬다.
원노인 웬일...들이십니까?
일여인1 그 아이 어디 있나? 여기 조바아이 말이야...
원노인 조바라니요? .. 누굴 찾으시는 지요?
일여인1 야, 여기 어린아이 있잖는가? 당장 데리고 나오시오.
원노인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 집 아이가 뭘 어떻게 잘못했다는 것인지...?
일여인1 진정이고 뭐고 그 아이를 데려오라니까.
원노인 허허..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그게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일여인2 이 집 아이가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봐요. 이 얼굴 좀 보란 말이에요.
원노인 우리 두한이는 이유 없이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뭔가 사연이 있었을 겝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우리 일꾼이 아니라 제 외손줍니다.
일여인2 외손주고 뭐고 데리고 나오란 말이에요.
일여인1 하여간 조센징들은 알 수 없는 족속들이야. 외손주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식당에서 잡일을 시키다니...
원노인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일여인1 어쨌거나 어서 그 아이나 데리고 나오시오. 어서..
그때 두한이 나온다.
두한 저 여깄어요. 우리 할아버지 욕하지 말아요.
일학생2 어머니, 저... (숨으며) 저 녀석이에요.
두한 .............
원노인 두한아... 아는 아이들이냐?
두한 ....예...
원노인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이랬어?
두한 저 일본 아이들이 저보다 작은 조선 아이 하나를 몰매를 때리고 있었어요. 저는 그 아이를 구해주려구 그랬어요.
일여인1 저저저..
원노인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일여인들에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 손주를 대신해서 사과를 드리지요.
일여인1 이게 사과를 받아서 될 일인가? 너 이 녀석 이리 오너라. (팔을 나꿔채며) 주재소로 가자. 감히 조센징 따위가 일본 학생들을 때려?
원노인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를 베푸십쇼. 치료비는 저희가 전액 물겠습니다. 예, 박군아.. 금고 좀 이리 가져오너라..
박군이 인상을 쓰며 금고로 다가간다.
원노인 이 늙은이를 봐서라도 제발 용서를 해주십쇼. 예, 마님들?
일여인1 .....그렇게 까지 말하는데 야박하게 굴 수는 없지.. 영감님을 봐서 참는 거요. 아시겠소? 너 이 녀석 운 좋은 줄 알아..? 갑시다. 어서 병원으로 가요..
원노인 고맙습니다, 마님들.. 치료비는 나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두한이 애써 분노의 눈물을 참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런 두한을 원노인이 안쓰럽게 보다가...
원노인 괜찮다. 다 끝났다.
# 32 사동옥 방 안
두한과 원노인이 마주해 있다. 두한은 무릎을 꿇고 있다.
두한 죄송해요, 할아버지. 저 때문에 일본 사람들한테...
원노인 뭐가 말이냐? 허허허.. 불의를 보고 외면한다면 그건 사내 대장부가 아니지.. 암.. 더군다나 왜놈의 자식들이 아니었냐? 편히 앉거라. 어서..
두한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한참 두한을 보다가
원노인 두한아..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보내주랴?
두한 ...............?
원노인 다니고 싶겠지.. 왜 아니 그렇겠느냐? 하지만 말이다. 할애비는 너를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구나. 왜 그러는지 아느냐?
두한 ............
원노인 왜놈들의 교육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이니라.. 왜놈들의 교육을 받으면 왜놈밖에 더 되겠느냐?
두한 .............
원노인 조금만 기다리거라. 네가 조금 더 크면 만주로 보내주마. 그 곳에 가면 민족 학교도 있고, 독립군 군관 학교도 있느니라.
두한 .............?
원노인 두한아, 너는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님의 아들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하고는 달라. 너는 전사로 커야 한다. 독립군 전사 말이다. 알겠느냐? 독립군 전사!
두한 ..........?
# 33 거지촌 외경(밤)
그곳 대부분의 움막이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가운데, 진영의 움막에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비가 오려는 듯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 34 동 안
정진영이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 뒤로 진영모가 누워 있다가 몸을 뒤챈다.
진영모 진영아...
정진영 (돌아보며) 아직 안 주무셨어요?
진영모 이제 그만 자야지?
정진영 괜찮아요, 어머니 먼저 주무세요.
진영모 하루 내 일하고 피곤할 텐데.. 공부하는 게 그렇게 좋을까...?
정진영 어머니를 편히 모시려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죠.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거예요.
진영모 기특도 하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꼬.. 다 에미 죄다. 좋은 부모를 만났으면 학교두 다니고 그 좋아하는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을 텐데......
정진영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어머니가 좋아요. 세상 누구보다 어머니가 좋다구요. 전 어머니 아들이에요.
진영모 아니다.. 이 에미가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눈물)
정진영 아니에요, 어머니. 다른 아이들도 얼마나 부러워 한다구요. 두한이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계시니까 좋겠다구요.
진영모 (눈물) 착한 것.......그래... 에미가 또 괜한 소리를 했구나.. (목이 메인다)
정진영 어머니.. 목이 마르신가봐요? 제가 물 떠올게요.
진영모 .............
정진영이 움막 밖으로 나온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진영이 그렇게 비를 맞고 서 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정진영 내가 나중에 다 해드릴께요. 꼭 다 해드릴께요... 두고 보세요.
그런 진영의 표정에서....
# 35 사동옥 외경
깊은 밤이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고 천둥 번개도 요란하게 울어댄다. 카메라, 사동옥 쪽으로 다가가면..
김좌진 (E)(에코) 두한아... 두한아...
# 36 동 두한의 방(꿈)
두한이 박군과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다. 김좌진의 소리가 계속해 들려온다.
김좌진 (E)두한아.. 아버지다. 아버지다, 두한아.
두한이 눈을 번쩍 뜬다.
김좌진 (E)두한아..
두한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 37 동 마당(꿈)
두한이 뛰쳐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김좌진을 찾는다.
두한 아버님, 어디 계세요?
김좌진 (E)두한아, 여기다..
돌아보면 김좌진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인자하게 웃고 있다.
두한 (기뻐) 아버님..?
달려가 안긴다 김좌진이 넓은 품으로 안아준다.
김좌진 그래. 두한이로구나.. 내 아들 두한이야.. 그 동안 많이 컸구나.
두한 어떻게 오셨어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아버님?
김좌진 네가 보고 싶어 왔다.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을 말이야. 나는 곧 가야 한다.
두한 (시무룩해지며) 그렇게 빨리요...? 지금 오셨잖아요?
김좌진 (한없이 슬픈 표정이 되며) 두한아... 이제 아버지는 아주 먼 곳으로 가야 한단다. 아주 먼 곳이다.
두한 .................?
김좌진 굳세게 자라야 한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절대 굽히거나 물러서서는 안 된다. 사나이답게, 이 김좌진의 아들답게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두한 어디로 가시는 건데요? 예, 아버님?
김좌진 대답을 하거라.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
두한 ........예, 아버님.
김좌진 그럼 됐다. 이리 오너라.
두 팔을 벌려 두한을 안는다. 부자가 포옹을 한다.
김좌진 아버진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알겠느냐? 나는 늘 너의 곁에 있어. 시간이 없구나. 자, 그럼... 가야겠구나. 잘 있거라, 두한아.
다시 천둥번개가 친다. 그 때다. 두한은 어둠 속에서 김좌진의 등에 총을 겨누고 있는 미와의 모습을 보았다. 경악하는 두한.
두한 안돼.....!! 미와, 안돼! (에코) 안돼.
미와가 잔인하게 웃으며 그대로 방아쇠를 당긴다. 엄청나게 큰 총성과 함께 김좌진이 그대로 주저앉는다. 두한이 당황해 하며 아버지를 부축한다.
두한 아버님? 안돼요 아버님.. 어서 일어나세요. 죽으면 안돼요, 아버님..
두한의 절규와 미와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에코로 이어지며...
# 38 다시 두한의 방(현실)
두한이 아버님을 애타게 계속 부르다가 깨어난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피지만.. 꿈이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두한. 밖에서 빗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박군 (잠이 덜 깬 채) 왜 그래? 나쁜 꿈 꿨어?
두한 (한참만에) 예, 아버님이 꿈에 오셨어요.
박군 그랬구나. 어서 더 자거라.
두한 아니요, 그만 잘래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친다. 박군이 이불을 더욱 끌어당기며 잠꼬대처럼 말한다.
박군 운동 가려구?
두한 예..
박군 그래.. 다녀와라.. 난 한숨 더 자야겠다.
두한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 39 사동옥 마당
두한이 나온다. 꿈속에서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는 두한. 그러나 사동옥은 조용히 잠들어 있다. 두한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린다.
두한 아버님......
두한의 그 모습에서 디졸브 되면..
# 40 거지촌
날이 밝았다. 이 곳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움막 문이 열리더니 양코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온다. 거지 아이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다.
양코 (내리는 비를 보다가) 젠장... 오늘도 또 공치겠네. (침을 찍 뱉고) 야, 꽁초 좀 가져와봐.
거지아이1 예, 형님.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진영이 자신의 움막에서 화톳불을 들고 나온다.
정진영 일어들 났구나?
양코 (심드렁하게) 응.. 잘 잤냐?
거지아이1이 양코에게 담배꽁초를 가져다준다.
양코 불?
거지아이1이 성냥을 그어 붙여준다. 양코가 한 모금 빨다가 켁켁대다가 버린다.
양코 에이씨.. 뭔 담배가 이렇게 써?
정진영 그러니까 피지 마. 어린놈이 무슨 담배냐?
양코 어리긴 누가 어려? 나두 이젠 열 네 살이야. 이제 어른이라구. 이 거지촌의 오야지라구.
정진영 (피식 웃는다)
양코 아무래도 어제 동냥을 나갔어야 했어. 괜히 망태긴지 뭔지 만들자구 해갖구서..
정진영 ......왜, 먹을 게 없어?
양코 그래.. 조금밖에...
정진영 (한숨) 그거라도 나눠먹어야지... (하늘을 보고) 오후가 되면 비가 그칠 거야.
양코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다가) 두한이는 좋겠지.. 날마다 흰쌀밥에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고깃국을 먹을 텐데..
정진영 또 그 소리야? 자꾸 그러면 두한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야. 우리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그렇게 될 수 있어.
양코 쳇 또 공부타령이야. (늘어지게 하품하고) 에이 동냥 나가기도 글렀구 난 한숨 더 자야겠다.
양코가 그렇게 들어가면 거지들도 쭈빗거리며 따라 들어간다. 내리는 비를 보며 뜻 모를 한숨을 짓는 진영의 모습에서..
# 41 사동옥 외경
계속해 비가 내리고 있다.
원노인 (E)광교에 다녀오겠다구?
# 42 사동옥 홀
손님들이 군데군데 앉아 밥을 먹고 있다. 박군이 분주히 설렁탕을 나르고 있고, 원노인과 두한이 카운터 앞에서 마주해 있다.
원노인 그 아이들을 만나러 말이냐?
두한 예, 할아버지. 어제 보니까 거리에 나오지 않았더라구요.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요.
원노인 그래......?
두한 오늘은 그 곳에 있을 거예요. 비가 오면 동냥을 나가지 못하거든요.
원노인 (끄덕이며) 하긴 그 녀석들 못 본 지도 꽤나 오래 되었지? 진영이 하고.. 양... 양..
두한 양코예요, 할아버지.
원노인 그래 맞다. 양코라고 그랬지.. 허허허. 그럼 잠시만 기다리거라. 오랜만에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 거기 진영이라는 아이의 어머니가 함께 사신다면서?
두한 예.
원노인 내 사골하고 고기를 좀 싸줄테니 갖다 드리거라. 얘, 박군아.
두한 .......(존경 같은)......
# 43 종로 거리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두한이 우산을 쓰고 보자기에 싼 큼지막한 통을 들고 걸어온다. 저만큼 오고 있던 최동열이 두한을 발견하고 반색을 한다.
최동열 두한이 아니냐?
두한 .....(돌아보고 반가워) 아저씨!
최동열 (다가오며) 오랜만이로구나. 그 동안 잘 지냈느냐?
두한 예.. 아저씨.
최동열 어디 심부름을 가는 모양이구나?
두한 예, 광교에 가는 길이에요.
최동열 광교? 아아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구나. 한데 참... 학교는 어떻게 하구? 오늘 쉬는 날이냐?
두한 ......저.....학교에 다니지 않아요.
최동열 ..그래...? 아니 왜...? 이상한 일이구나. 왜 학교에를 안 다녀?
두한 그만 가볼게요. 비가 그치면 아이들이 종로로 나올지도 모르거든요.
최동열 그래.. 가보거라.. 학교를 안 다닌다? 학교를....왜 그럴까?
최동열이 그렇게 서서 두한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도리질을 친다.
# 44 사동옥 앞
중절모를 푹 눌러쓴 유태권이 골목길을 돌아 사동옥으로 향한다. 따라오는 이가 없는지 주위를 살피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 45 동 밀실
유태권과 원노인이 자리에 앉는다.
원노인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유태권 만주에서 온 동지를 만나 무사히 군자금을 전달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국경을 넘고 있을 겁니다.
원노인 (안도의 한숨) 수고하셨습니다, 유동지. 참으로 수고가 많았어요.
유태권 한데... 만주 형편이 몹시 어려운 모양이더군요. 장군님께서도 당분간 무장투쟁을 중단하시고 동포들의 교육과 조직사업에 주력하실 예정이랍니다. 자금 형편도 좋지 않아 장군님께서 직접 정미소를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원노인 정미소라구요? 허 이런... 장군님께서 정미소를 하시다니.. 장군님께서...
유태권 그리고 독립진영 내에서 좌우의 대립이 상상외로 심각하다더군요. 중국이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어서 그 영향이 큰 모양입니다.
원노인 .....(한숨)........
그때 박군의 소리가 들려온다.
박군 영감님.. 접니다.
원노인 들어오너라.
박군이 안으로 들어온다.
박군 전보가 왔는데요.
원노인 전보.....?
박군이 건네준 전보를 본다. 그리고 숨이 멎듯 경악한다.
원노인 이, 이게 무슨 소리요? 이게 무슨...
두 사람 ...........?
원노인 자..장군님께서.. 급서를 하시어..?
비틀한다. 박군이 놀라 원노인을 부축한다.
유태권 왜 그러십니까, 영감님....? 무슨 전보입니까?
원노인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
유태권 무슨 일입니까? 장군님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원노인 잘못된 게야...그래 뭔가 잘못됐을 게야.. 장군님이 어떤 분이신데.. 장군님이 어떻게....?
유태권이 원노인이 떨어뜨린 전보를 펼쳐본다. 거기엔 '김좌진 장군 급서(急逝)'라고 적혀 있다. 경악하는 유태권의 표정에서.... 지난날의 김좌진의 모습이 잠시 스쳐가며, 해설로 이어진다.
(해설) 김좌진, 김두한의 친부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명여, 호는 백이다. 충남 홍성 출생으로 일찍 개화에 눈을 떠 나이 열 다섯에 이미 집안의 종문서를 불살랐으며 집을 허물어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만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일천구백이십년 청산이 전투에서는 이천오백의 병력으로 무려 오만의 일본군을 맞아 그 중 삼천삼백 여명을 섬멸하는 독립군 전투 사상 전무후무한 대 성과를 수립하였다. 일천구백삼십년 일월 이십사일, 안타깝게도 같은 동포인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으니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 46 종로서 외경
미와 (E)(놀라) 뭐라? 김좌진이 죽어?
# 47 동 사무실
미와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고 있다.
미와 (멍해) 믿기지가 않는구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김좌진이 죽다니.. 그 자가 어떤 자인데... 그렇게 쉽게 죽어?
오무라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자가 제 동족의 손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미와 ........? 동족의 손에 죽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오무라 조선인 박상실이라는 자에게 저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같은 조선인에게 말입니다. 하하하..
미와 그으래? 정말 그랬단 말이지? 조선인에게, 같은 조선인에게 죽었단 말이지?
오무라 그렇습니다, 경부님.
미와 오 정말 믿기지가 않는구만.. 청산리의 영웅이 제 부하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하 하 하하하하하하.. 이야말로 잔치를 벌릴 일이 아닌가?
미와가 미친 듯이 웃는다. 그때 최동열이 들어선다. 의아하게 미와들을 보다가 그 쪽으로 다가간다.
최동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미와 오..최기자. 마침 잘 왔소. 내 기쁜 소식 하나 전해 드리리다. 아니아니 최기자가 들으면 좀 충격이겠지. 그 자에게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니까. 하하하하...
최동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미와 최기자, 놀라지 마시오.
최동열 말해 보시오.
미와 김좌진, 김좌진이가 죽었소.
최동열 .........! 지금.. 농담하는 거요?
미와 농담이라니.. 사실이요. 조선인의 영웅 김좌진이 안타깝게도 조선인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고 하오.
최동열 .....(충격) 그... 그게 사실이오?
미와 역시 놀라시는구만... 소위 민족지의 기자 양반이신데 왜 아니 그렇겠소? 하하하하.. 이야말로 특종 감이 아니오? 특종이오, 특종.
형사들이 모두 함께 웃는다. 최동열은 얼이 빠진 모습이다. 그 당황스러운 표정에서..
미와 (계속) 죽었다.. 김좌진이가 죽었다. 김좌진이가 죽었다.... 김좌진이가 죽었다....
# 48 거지촌
두한이 오고 있다. 저만큼 거지패들이 다리 밑에서 깡통을 두들기며 장타령을 부르고 있다. 그때 한 아이가 두한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두한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진영모 그래.. 너두 잘 지냈니? 할아버지두 잘해 주시고?
두한 예..
진영모 잘 됐다. 정말 잘 된 게야.
두한 .....참! 진영아, 이거...
두한이 사골 통을 내민다. 벌써부터 양코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정진영 이게.... 뭐니?
두한 사골하구 고기야. 할아버지께서 싸주셨어. 너희 어머니 갖다 드리라구.
양코 (눈이 휘둥그래진다)
정진영 이렇게 귀한 걸......?
진영모 아니다. 아니야.. 성의는 참으로 고마우시다만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내가 그런 걸 먹어서 뭣하려구.. 너희들끼리 나눠 먹거라.
두한 아니에요. 어머니께서 드셔야 해요. 아이들꺼는 제가 나중에 또 가져올 게요.
양코 정말?
두한 그래...
양코 이야... 이 양코도 소원 한 번 이뤄보겠구나.
정진영 고맙다 두한아..
두한 뭘.. 난 그냥 심부름 온 것뿐인데.....
정진영 ..........
두한 참 양코야.. (주머니에서 알사탕 봉지를 꺼내) 받아. 아이들 줄려고 가져 왔어.
양코 이야.. 이거 왕사탕이잖아? 이거 어디서 났니? 하긴 너는 이런 거 많이 먹겠다. 그치?
두한 .....(미소)
양코 아이들이 되게 좋아할 거야. 그럼 난 나가볼게.
양코가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진영모 원 녀석두.. 그렇게 좋을까...?
두한과 정진영이 마주보며 웃는다.
# 50 동 밖
양코가 나와서 콧노래를 부르며 알사탕들을 세어 본다.
양코 하나, 둘, 셋, 넷.. 이야.. 서른 개도 넘겠다.
그때 한 거지 아이가 지나가다가 양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거지아이 양코 대장.
양코 (놀래) 응? 왜?
거지아이 그거... 뭐야?
양코 (감추며) 아 아무 것도 아니야.. 넌 알 것 없어.
급히 걸어가는 양코. 거지아이가 양코의 뒤를 졸졸 따라 붙는다.
거지아이 뭐냐니까? 나두 좀 보여줘.
양코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저리가 임마.
그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데 저 만치서 박군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박군 얘들아.. 얘들아!
양코 가만 좀 있어봐.. 왜 그러세요?
박군 여기 두한이 왔지? 우리 두한이 말이야.
양코 (경계) 왜요? 왜 두한이를 찾아요?
박군 어딨니? 지금 어디에 있어?
양코 왜 그러냐니까요?
박군 급한 일이야. 빨리 두한이를 찾아야 해.
양코 ..........?
그때 두한이 움막 안에서 나온다.
두한 형?
박군 두한아... (달려온다)
두한 웬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박군 두한아..(글썽인다)...
두한 왜 그래요 형?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박군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야.. 가자.. 나랑 같이 삼청동으로 가자.
두한 형...?
박군 가보면 알아.. 영감님이 널 그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두한 할아버지가요?
# 51 삼청동 집
경악하는 친조모와 오씨. 원노인이 그 앞에 와 있다.
원노인 큰 마님...?
오씨 원노인께서 뭔가 잘못 아셨겠지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원노인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북만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확인을 했습니다.
오씨 .......(절망)......
조모 (눈을 질끈 감는다)..
원노인 ..................
조모 ......아범이... 죽다니...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눈물)
원노인 큰 마님... (어깨를 들썩이며 더욱 흐느낀다)
모두들 한동안 말이 없이 눈물과 통곡만 한다. 한참만에 친조모가 입을 뗀다.
조모 두한이는... 우리 두한이는 알고 있는가?
원노인 박군을 보내 이리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조모 (끄덕이며) 그랬구먼. 그 아이가 얼마나 상심이 클꼬...? 그만 울음을 그치게. 두한이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아니 되네... 어멈두.
오씨 .....예(눈물을 옷고름으로 닦는다)
잠시 후 박군의 소리가 들려온다.
박군 (E)큰 마님, 박군입니다. 두한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조모 들어오게.
두한이 박군과 안으로 들어온다. 방안의 어두운 기운을 느끼고 멈칫한다.
조모 두한아... 이리 와 앉거라..
두한이 그 앞에 가 앉는다.
조모 두한아...
두한 예..
조모 지금부터 이 할미가 하는 얘기 잘 듣거라.
두한 ...........?
조모 ....두한아...(그러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오씨 (눈물).............
두한 .............?
조모 두한아.. 네 아비가.. 네 아비가 세상을 떠났단다.
두한 ..............?
조모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말이다.
두한 (충격) 아, 아버님이요? 아버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