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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새김은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인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는 무조건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또한 올바른 정진은 팔정도에서 다른 선행하는 도덕적 계기들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새김의 과정은 올바른 도덕적 관계로 열려진 마음을 통해 고요하고 민첩하게 현존하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판단적 사유나 해석적인 숙고는 인지되자마자 버려진다. 마음은 확고하게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성과정에서의 의식은 현재의 주어진 지각현상과 더불어 인식과정이 시작되면서 단순히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숙고에 의해 개념적으로 확산되어간다. 원래의 대상은 개념적으로 확산된 희론적 지각현상에 의해 오염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현존하는 대상은 희론의 구름 속에 비치는 희미한 달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인식과정을 소멸시켜 청정하게 할 때 올바른 새김이 성립하며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개현시킨다.
따라서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개현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도록 하게 하지 않는다.
새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서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새김의 토대에 대한 대경(大念處經)]에서의 올바른 새김의 정의는 올바른 정진을 조건으로 하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와 함께 주어져 있다.
[붓다] "무엇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신체에 관해 신체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감수에 관해 감수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물에 관해 사물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가지 새김의 토대는 올바른 정진을 수반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기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열반을 깨닫는 길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붓다] "새김의 토대는 곧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고 열반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러한 새김의 네가지 가운데 첫번째는 육체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신과 관계되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관찰은 수습적으로 다른 것에 우선하며 감수를 비롯한 마음의 관찰의 조건을 형성하고 끝으로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새김이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관찰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내외적으로, 즉 공간적으로 수행되며 생성적으로 소멸적으로 그리고 생멸적으로, 즉 시간적으로 수행된다.
1. 신체에 대한 관찰(身隨觀,kaya anupassana)을 행할 때 가장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호흡에 의한 몸의 움직임이다. 그래서 호흡새김(安槃念, anapanasati)이 신체에 대한 관찰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룰 뿐만 아니라 명상의 근본적 토대(根本業處-호흡에 대한 새김이나 관찰은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불린다. 호흡새김은 단지 육체적인 훈련이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를 이끄는 기반이다.
[붓다] "호흡에 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네가지 마음새김의 바탕일 닦고 익히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원만히 하며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익히면 명지(明智)에 의한 해탈을 원만하게 한다."
호흡에 관한 관찰 내지 새김을 실천하려면 우선 숲 속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우고 새김을 현전하도록 해야 한다. [맛지마니까야]의 '호흡새김의 경(安槃念經)' 에 의하면 호흡에 대한 새김은 네가지의 기본적인 단계를 갖고 있다.
(1) 처음 두가지는 긴 들숨과 날숨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는 것과 짧은 들숨과 날숨을 일어나는 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숨이 들고나는 것을 그 길고 짧음을 알아채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2) 마음에 새김이 점점 깊어지면 들숨과 날숨의 시작에서 경과와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3) 전신을 분명히 지각하면서 호흡하게 되며, (4) 육체적인 기능이 고요해지면서 호흡이 극도로 미세하고 청정하게 된다.
경전은 그밖에 정신적인 상태와 관련된 호흡새김의 수행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호흡의 관찰은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새김의 토대나 깨달음의 고리 등의 정신적인 것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몸에 관한 관찰로서 잘 알려진 것은 몸의 정태적, 동태적 활동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1) 걷거나, (2) 서 있거나, (3) 앉거나, (4) 자거나, (5) 깨어 있거나, (6) 말하거나, (7) 침묵할 때나 어떠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주의 깊게 세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는다고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알며 자세를 바꿀때는 바꾼다고 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몸은 자아나 자아의 소유가 아니며 단지 의도라는 조건에 따라 작용하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거나 오거나 앞을 보거나 옆을 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옷을 입거나 먹고 마시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잠들거나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그러한 과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正知所作)를 통해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또한 몸에 대한 관찰로 중요한 것은 몸의 실재적인 모습을 분석적으로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그 가운데는 피부로 덮인 여러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신체의 각 부분이나 장기에 대한 관찰, 땅, 물, 불, 바람으로 구성된 신체에 대한 관찰 및 무덤에 버려진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이러한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신체에 대한 관찰은 갈애에 수반되는 육체적 쾌락이나 성적 충동을 제어하고 소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부정관(不淨觀)은 몸을 감각적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인식하는 지각의 토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인 쾌락의 욕구를 소멸시킬 수 있다.
감각적 욕구는 지각을 조건으로 한다. 육체적인 매력은 피상적인 관점에서 유래하며 부정관은 사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한다. 경전은 마치 두개의 구멍을 가진 푸대자루에 여러 가지 곡물이 들어 있듯이 이 신체를 32가지 부정물 - 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피부, 고기,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임파액, 침, 정액, 관절액, 오줌 - 로 가득 차 있는 푸대자루처럼 하나 하나씩 그 내용물을 열거하면서 분석적으로 그 더러움을 관찰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은 혐오감을 함축하는 성냄을 생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쾌락으로부터 싫어하여 떠나 그 조건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신체에 대한 관찰방법으로는 네 가지의 비인격적인 요소인 땅, 물, 불, 바람의 사대로써 분석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경전은 숙련된 도살자가 소를 도살해서 네 거리에 부분 부분을 나누어 놓는 것같이 신체의 부분을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로 분류해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의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에서는 우리의 신체는 내부적인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반적인 지수화풍은 외부적인 것으로 나눔으로써 순환적인 생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붓다] "(1) 내부에 각각 거칠고 견고한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머리카락, 털, 손톱, 등과 기타의 개체적이고 거칠고 견고한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 모두 내부적인 땅의 세계이며, (2)내부에 각각 액체나 액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담즙, 가래, 고름, 피 등의 각각 액체나 액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물의 세계이며, (3)내부에 각각 불이나 에너지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열, 노쇠, 소화,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현상 등을 수반하는 각각 불이나 에너지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모두 내부적인 불의 세계이며, (4)내부에 각각 기체나 기체적인 것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를 들어 상향풍, 하향풍, 위주풍, 하복주풍, 지체순환풍, 출식풍, 입식풍 등의 각각 기체나 기체적인 것은 모두 내부적인 바람의 세계이다."
이러한 내부적인 원소들은 무상한 외부적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신체가 죽은 뒤에 다시 흩어져 외부로 돌아간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져온다.
[붓다] "벗이여, 그 외부적인 땅의 세계가 위대할지라도 무상한 것이 알려질 것이며 소멸하는 것이 알려질 것이며 사라지는 것이 알려질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 알려질 것인데, 하물며 이 갈애가 취착된 조그마한 육체에 '나' 또는 '나의 것' 또는 '나는 있다' 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없는 것이다."
외부적인 원소의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을 통해 그와 동일한 내부적인 원소의 끝없는 변화를 관찰하여 그 가운데 '나, 나의 것, 나는 있다' 라는 실체적 관념을 없앰으로써 육체에 대한 집착을 소멸시키는 것이 수행의 중요한 성과이다.
또 다른 육체에 관한 분석적인 관찰로는 죽은 후에 몸이 해체되는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사체가 묘지에 유기되어 며칠이 경과한 뒤에 시체가 팽창하고 푸르게 멍든 어혈이 있고 고름이 가득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까마귀, 독수리, 개, 승냥이 등의 각종 생류가 잡아먹거나 뜯어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관찰이 있으며 그밖에 사체에 살과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은 없지만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과 피가 없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관절이 풀어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손뼈,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뼈, 척추뼈, 두개골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해골들을 관찰하는 수행법이 있다.
이러한 관찰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그것과 비교하여 관찰하는 것을 수반한다.
[붓다] "이 몸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며 이와 같이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수행은 이미 올바른 정진 가운데 수호에 의한 노력과 동일한 내용을 함축하는 것이다. 단지 수호에 의한 노력은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고름이 가득찬 시체에 대한 지각,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 등의 특정한 지각현상을 수호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것을 토대로 새김에서는 그러한 사체의 현상에 대한 지각이 자신의 살아 있는 육체에 대한 관찰과 병행하면서 진행된다.
2. 감수에 대한 관찰(受隨觀,vedananupassana)은 여섯 감관의 접촉의 계기마다 강하거나 약하거나 분명하거나 불분명하거나 쾌, 불쾌의 정서를 일으키므로 감수에 대한 새김은 이러한 조건에 대한 관찰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즐거운 감수는 탐욕을, 괴로운 감수는 성냄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성적인 감수는 어리석음을 수반한다. 이때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또한 무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감수에 대한 새김은 이러한 오염의 조건을 알아챘을 때 그 오염을 소멸시키고 궁극적으로 감수마저 소멸시킴으로써 감수 자체를 경험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새김의 토대경]에 나타난 감수에 의한 새김은 단순히 즐거움의 감수를 느낄 경우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괴로운 감수나 중성적인 감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각각의 감수는 다시 육체적인 것(자양분이 있는)과 정신적인 것(자양분이 없는)으로 분석적으로 관찰된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어떻게 감수 가운데 감수를 관찰하는가? 여기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육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끼면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감수를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새김의 원리에 따라 감수도 공간적으로 내외(자신과 타자)로 시간적으로 생멸을 통해 관찰된다. 여기서 시간적 관찰은 곧 전형적인 연기의 인과연쇄에 의한 고리로서 감수를 파악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을 수반하는 새김은 단지 감수의 속성에 대해 '분명히 아는 것(了知,pajanana)'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것이 감수의 점차적인 소멸로 이끄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감수의 속성에 대한 통찰은 곧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소멸로 이끌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3. 마음에 대한 관찰(心隨觀,cittanupassana)이 감수에 대한 관찰 이후에 놓은 것은 정신적인 특수한 요소인 감수로부터 그것이 소속되는 일반적인 마음에 대한 관찰로 명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의식(識) 자체가 마음(心)이라고 불린다. 마음은 사실상 모든 정신적 요소를 함축한다. 그 가운데 가장 일차적인 것이 의식이다. 의식은 전형적인 연기에서 보면 감각영역에 최초로 수반되는 정신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의 작용(心所,cetasika)을 수반한다. 여기에는 감수, 지각, 형성 등이 수반된다. 의식 자체는 순전히 대경과 감관 사이의 순수한 체험에 불과하다. 의식은 스스로 식별되지 않으며 오로지 수반하는 그 작용들에 의해 분별된다. 의식의 작용이 마음을 물들이며 마음에 구별하는 성격을 부여한다. 우리가 마음을 관찰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의식을 관찰하여야 한다. 경전에서는 16가지의 마음의 작용을 수반하는 의식, 즉 마음에 관해서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제시되고 있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는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 밖에 경전에서는 탐욕의 유무 이외에 성냄의 있고 없음, 어리석음의 있고 없음, 과밀하거나 흩어짐, 계발되었거나 되지 않음, 열등하거나 최상임, 집중되었거나 되지 않음, 해탈했거나 하지 않음의 도합 16가지의 마음의 작용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마음의 작용에 대한 관찰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의 유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음이 어떠한 작용을 수반하더라도 마음의 상태로서 단지 관찰할 뿐 거기에 '나' 또는 '내 것' 또는 '나는 있다' 라는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새김은 순수한 마음이건 오염된 마음이건 간에, 최상의 마음이건 열등한 마음이건 간에 탐착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오직 분명히 알아챌 뿐이다. 예를 들어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을 때 성내는 마음이 생겨났다면 그러한 감정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감정적이 아닌 마음의 관찰로 대체함으로써 혼란한 감정은 소멸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김이 깊어지면 불건전한 감정들은 점차 소멸된다. 거기에 수반하는 불필요한 사유의 확장도 막을 수 있다. 희론이나 과대망상이나 자학, 피해망상, 정신분열, 자기정당화, 위선 등의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는 소멸된다. 이 과정에서 마음에 관한 더욱 많은 지식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더욱 마음의 관찰이 진행되면 어디에서부터 오지도 않고 어디로 가지도 않는 순수한 마음 또는 의식의 흐름의 지속만이 남게 된다.
[붓다] "불건전한 의도,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함으로써 마음은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고 잘 닦여진다."
물론 이 때의 잘 닦여진 마음은 궁극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롭고 지혜를 갖추게 되며 따라서 열반에의 도달을 가능하게 한다.
4. 사물에 대한 관찰(法隨觀,dhammanupassana)은 내적 외적인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내적인 사물이란 정신현상을 말하고 외적인 사물이란 외적인 감각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에서 일반적으로는 그것들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진리로서의 법(法)에 대한 관찰을 의미한다. 그 진리는 신비적이거나 비교적(秘敎的)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붓다] "법은 현세적이고 무시간적이고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법은 현세에서 실체적인 통찰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 새김(念,sati)이다. 법에 대한 관찰은 육체와 지각현상 그리고 의식이나 마음에 관한 관찰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때 기계적으로 따를 수 있는 보다 궁극적인 관찰이다.
[새김의 토대경]에 의하면 법에 대한 관찰은 주로 정신적 혹은 정신물리적 작용의 현상과 그것과 연관된 해탈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모든 관찰은 정형화된 연기에 관한 관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 경전에서는 법에 관한 관찰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다섯가지 장애의 현상(五障法)에 대한 관찰은 무지의 원인이 되는 번뇌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의심이 있다. 우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관찰방법에 관해 논의해보자. 나머지는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에 한 수행승이 있어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없다' 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버려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2)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의 현상(五取蘊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물질은 이와 같고 물질의 발생은 이와 같고 물질의 소멸은 이와 같다.... 감수... 지각... 형성... 의식... 이와 같이 내적 현상에 대하여 현상의 관찰을 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서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의 현상에 대하여 현상의 관찰을 한다."
역시 이 존재의 취착다발에 대한 관찰도 내적으로 자신에 대해, 외적으로 타자에 대해,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찰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취착다발의 소멸을 지향한다.
(3) 여섯가지 내외적 감역의 법(六內外處法)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시각을 분명히 알고 형상을 분명히 알며 그 양자를 조건으로 결합이 생겨나면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결합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미 생겨난 결합을 버리게 되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미 버려진 결합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경전은 시각과 형상과 그 결합뿐만 아니라 청각과 소리와 그 결합, 후각과 냄새와 그 결합, 미각과 맛과 그 결합, 촉각과 감촉과 그 결합, 정신과 사물과 그 결합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들 감각의 장들에 대한 관찰도 내적으로 자신에 대해, 외적으로 타자에 대해,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감각의 장의 소멸을 지향한다.
(4)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七覺支)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있다면 '나에게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있다' 고 분명히 알며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없다면 '나에게 내적으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없다' 고 분명히 알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며 이미 생겨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수습되어 원만해지면 수습되어 원만해지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러한 설명은 이미 올바른 정진에서 언급한 깨달음의 다른 여섯 가지 요소에 관해서도 경전 상에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내적 외적으로 그 생성과 소멸에 관한 과정적 관찰도 동시에 언급된다.
(5)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관찰은 다음과 같다.
[붓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단순한 관념적 이해에서 벗어나 점점 더 깊은 새김의 차원으로까지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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