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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卽位之日大雨 是年自正月至四月 不雨 故民皆歡慶
왕의 즉위(卽位)일에 큰 비가 내렸다. 이해에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백성들이 경사를 기뻐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머리기사 발췌
是年自正月至四月 不雨 及王卽位之日 大雨 百姓歡慶
이 해에 정월부터 4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가, 왕이 즉위하던 날 큰 비가 내렸으므로 백성들이 즐거워하며 경축하였다.
元年 正月 受朝 月宮
원년(A.D.257) 정월 월궁(月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奈音伊伐飡
내음(奈音)을 이벌찬으로 하였다.
二年 正月 謁始祖廟
2년(A.D.258) 정월 시조묘(始祖廟)를 참배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岳門伊伐飡 發仁稟主
악문(岳門)을 이벌찬, 발인(發仁)을 품주로 하였다.
三年 正月 受朝 南桃
3년(A.D.259)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黃長伊伐飡 柿姬稟主
황장(黃長)을 이벌찬, 시희(柿姬)를 품주로 하였다.
四月 壤井楊柳樹王 老臥多年 忽自起 皆稱其慶 乃行昔鄒只珍大祭
4월 양정(壤井)의 버드나무 수왕(樹王)이 늙어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저절로 일어났다. 모두 그 경사스러움을 칭송하여, 이에 석추(昔鄒)와 지진(只珍, 지진내례)의 대제(大祭)를 지냈다.
五月 西路大水 免其一年租調
5월 서로(西路)에 큰 비가 내려, 그 곳의 일년 동안의 조조(租調, 조세로 받던 곡식과 지방의 특산물)를 면제하였다.
七月 遣謁休 巡視撫恤
7월 알휴(謁休)를 보내어,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어루만지며 구휼하도록 하였다.
吉完伊伐飡
길완(吉完)을 이벌찬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년 기사
3년 4월 시조묘 앞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수재를 당한 주와 현에 1년의 세금을 면제하였다.
7월에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四年 七月 夫余侵境
4년(A.D.260) 7월 부여(夫余)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4년 기사
4년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美羅生 河道女河羅
미라(美羅)가 하도(河道)의 딸 하라(河羅)를 낳았다.
五年 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大師國良陳 王道十二條 上嘉納之 賜衣酒
5년(A.D.261) 7월 태백(太白, 금성)이 낮에 보이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대사 국량(國良)이 왕도12조(王道十二條)를 말하니, 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국량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5년(A.D.200) 기사
5년 7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견해≫ 태백(太白, 금성)이 낮에 보인 천문현상이 신라사초(남당유고)와 신라본기(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천문학적으로 어느 시기가 타당한지 검토대상이다.
角干南亥卒
각간 남해(南亥)가 죽었다.
九月 大閱於閼川
9월 알천(閼川)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美理神生 河道女河理
(가야) 미리신(美理神, 神은 접미사)이 하도(河道)의 딸 하리(河理)를 낳았다.
六年 二月 加耶請和 先是與夫余內應謀反 故將以大兵拔之 其君臣懼而服之
6년(A.D.262) 2월 가야(加耶)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예전에 부여(夫余)와 내응(內應, 남몰래 적과 내통함)하여 모반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대병(大兵)을 일으켜 치려고 하였다. 그 임금과 신하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6년 기사
6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해왔다.
3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자,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였다.
2. 남당유고 백제왕기 초고왕 28년 기사
二十八年 癸酉 三月 置狗原行宮
加耶女君美理神王遣使 獻絹及龍舟 請得王子爲婿 及弓矢槍刀 王命賜大刀七柄 槍五十而送之
28년 계유(A.D.253) 3월 구원(狗原) 행궁(行宮, 임금이 나들이 할 때 머물던 별궁)을 설치하였다.
가야(加耶) 여군 미리신(美理神, 神은 접미사)이 사신을 보내어 명주와 용주(龍舟, 임금이 타는 배)를 바치고 왕자로 남편을 삼고, 활과 화살, 창과 칼을 얻기를 청하여 왕이 큰 칼 7자루와 창 50개를 주어 보냈다.
≪견해≫ 가야와 백제가 내응한 기록은 오직 백제왕기에만 나타난다. 포상8국의 난과 연결된다.
三月 大旱 錄內外囚 放其輕罪
3월 크게 가물었다. 나라 안팎의 죄인을 조사하여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풀어주었다.
淡王太子薨
담왕(淡王)태자가 죽었다.
七年 正月 玄公伊伐飡 世羊稟主
7년(A.D.263) 정월 현공(玄公)을 이벌찬, 세양(世羊)을 품주로 하였다.
二月 內禮太后崩 春秋七十八
2월 내례(內禮)태후가 춘추 78세로 죽었다.
七月 板興伊伐飡 國元稟主
7월 판흥(板興)을 이벌찬, 국원(國元)을 품주로 삼았다.
八年 正月 行靑神祭
8년(A.D.264) 정월 청신(靑神=甲申)제를 행하였다.
七月 夫余入寇 利音擊破之
7월 부여(夫余)가 도둑질하여, 이음(利音)이 격파(擊破)하였다.
十月 末曷入寇 萱堅擊退之
10월 말갈(末曷)이 도둑질하여, 훤견(萱堅)이 쳐서 물러나게 하였다.
桃李再華 忽宗伊伐飡 晉氏稟主
복숭아와 오얏(자두)꽃이 다시 호화로웠다. 홀종(忽宗)을 이벌찬, 진씨(晉氏)를 품주로 하였다.
國中行疫 禱于桃山
나라 안에 전염병이 돌아, 도산(桃山)에서 기도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8년 기사
8년 10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백성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九年 二月 眞忠伊伐飡 發萱稟主
9년(A.D.265) 2월 진충(眞忠)을 이벌찬, 발훤(發萱, 아달라와 내례의 딸)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 2월 기사
10년 2월 진충을 일벌찬에 임명하여 국정에 참여시켰다.
九月 穀大登 行大場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年 三月 國良伊伐飡 雲童稟主
10년(A.D.266) 3월 국량(國良)을 이벌찬, 운동(雲童)을 품주로 하였다.
紫凰太后崩
자황(紫凰)태후가 죽었다.
七月 霜雹交下 南郊 公穀多被傷 尼今憂之 遣柒公 祀郊梪及畯職 而歸
7월 남교(南郊)에서 서리와 우박이 번갈아 가며 내렸다. 나라 또는 관청에서 소유한 많은 곡식들이 상처를 입었다. 왕이 걱정하여 칠공(柒公)을 보내어 교외 독두나무(梪)에서 준직(畯職, 농사를 담당하는 관리)과 함께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太史斗宣奏 太白犯月
태사(太史) 두선(斗宣)이 아뢰어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고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A.D.205) 7월 기사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
≪견해≫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범한 천문현상이 신라사초(남당유고)와 신라본기(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천문학적으로 어느 시기가 타당한지 검토대상이다.
八月 弧鳴于金城梪壇 翌日又鳴于壤井廟庭 尼今歎曰 “寡人否德 奈何” 是日 紫井太子薨 黃雲覆天 人皆以爲昇天 仙術甚高故也
8월 여우가 금성(金城)의 독두나무 제단(壇)에서 울었다. 다음날 양정(壤井)의 사당의 뜰에서 또 울었다. 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덕이 없음이로다.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날 자정(紫井, 일성과 자리의 아들)태자가 죽었다. 누런 구름이 하늘에 퍼졌다. 사람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며, 선술(仙術)이 심히 높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 8월 기사
8월 여우가 금성과 시조묘의 뜰에서 울었다.
≪비교≫ 독두나무(梪)가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 알 수 없다. 독두(禿頭)가 대머리라는 뜻이 있으므로 늙어서 나뭇잎이 없는 나무를 일컫는 것으로 보이며, 자정(紫井)태자가 아마도 대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利音請 加戍西路 許之
이음(利音)이 서로(西路)의 병사를 늘려주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十一年 三月 巡視 西路
11년(A.D.267) 3월 서로(西路)를 돌며 살펴보았다.
五月 夫余與浦上 通謀
5월 부여(夫余)와 포상(浦上)이 통모(通謀, 비밀리에 통하여 공모함)하였다.
十月 吉斗使加耶
10월 길두(吉斗)를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十二年 正月 利音伊伐飡兼視軍政
12년(A.D.268) 정월 이음(利音)을 이벌찬 겸 군정(軍政)을 살피는 일을 겸하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2년 기사
十二年 春正月 拜王子利音〈或云奈音〉爲伊伐飡兼知內外兵馬事
12년 정월 왕자(王子) 이음(利音)〈혹은 내음〉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五月 述明使加耶
5월 술명(述明)을 가야(加耶)에 사신으로 보냈다.
十三年 二月 西巡一善沙伐至管城 撫慰將士 歷捺己召文 而還 凡十有七日
13년(A.D.269) 2월 서쪽으로 일선(一善)과 사벌(沙伐)을 돌아 관성(管城)에 이르러 장사(將士)를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날기(捺己)와 소문(召文)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다. 무릇 17일이었다.
立五太子祠 小光板公汗昔左玉紫井五仙也
다섯 태자의 사당을 세웠다. 소광(小光), 판공(板公), 한석(汗昔), 좌옥(左玉), 자정(紫井) 다섯 신선(五仙)이다.
四月 倭人犯境 利音率輕騎 擊退之
4월 왜인(倭人)이 경계를 넘어와, 이음(利音)이 경기(輕騎)를 이끌고 가 부딪혀 물러가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3년 기사
13년 2월 왕이 서쪽의 군과 읍을 순찰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九月 加耶入朝 報河道新立 命美知往吊孝修
9월 가야(加耶, 대가야)가 입조하여 하도(河道)가 새로 왕이 되었음을 보고하였다. 미지(美知)에게 가서 효수(孝修)를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十四年 正月 行白虎祭
14년(A.D.270) 정월 백호제(白虎=庚寅)를 행하였다.
七月 加耶于考太子入 告浦上八國入侵 請求 乃命于考與利音將 六部兵往求之
7월 가야(加耶, 아라가야)왕자 우고(于考)태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포상8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입하였으니 구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우고와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 기사
14년 7월 포상의 8국(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 왕자가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여덟 나라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 명을 잡아 돌아왔다.
≪견해≫ 우로(于老)의 어머니는 조분의 여동생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의 즉위기사에서 조분이 어려서 내해가 섰다고 하였다. 내해의 즉위 초에 우로의 어머니는 임신할 수 없는 나이가 확실하다. 그럼에도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가라(加羅)를 구원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八月 利音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群臣賀之 乃獻俘獲 于祖廟
8월 이음(利音)이 8국의 장군을 쳐서 죽이고, (아라가야의)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군신(群臣)들이 치하하며, 빼앗은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河道以其女大理妻美知
(가야의) 하도(河道)가 그의 딸 대리(大理)를 미지(美知)에게 시집보냈다.
十五年 四月 旱久 發使 錄囚 除二死餘皆放之
15년(A.D.271) 4월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다. 사신을 보내어,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죽을죄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는 풀어주었다.
≪견해≫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5년 기사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신을 보내 군읍의 죄수들을 조사하여 두 종류의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죄수는 모두 석방하였다.
七月 述明伊伐飡 淵蓬稟主
7월 술명(述明)을 이벌찬, 연봉(淵蓬)을 품주로 하였다.
十六年 正月 連同伊飡 骨忠稟主
16년(A.D.272) 정월 연동(連同)을 이찬, 골충(骨忠)을 품주로 하였다.
萱堅伊飡 允宗一吉飡 白凰稟主
훤견(萱堅)을 이찬, 윤종(允宗)을 일길찬, 백황(白凰)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6년 기사
16년 정월 훤견을 이찬에 임명하고, 윤종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十七年 三月 加耶王子來 質
17년(A.D.273) 3월 가야(加耶, 아라가야)왕자가 와서 인질로 삼았다.
五月 大雨 漂毁民屋
5월 큰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7년 기사
17년 3월 가야가 왕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5월 큰 비가 내려 민가가 유실되었다.
大理生 美知子車理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아들 차리(車理)를 낳았다.
十八年 正月 牛芻伊伐飡〈南忠〉
18년(A.D.274) 정월 우추(牛芻)를 이벌찬, 〈남충(南忠)을 품주로 하였다.〉
骨正妻玉帽生 帝子沾解 帝洗之
골정(骨正)의 처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첨해(沾解)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즉위기사에서 첨해(沾解)는 조분의 동모제(同母弟)라 하였다.
七月 以骨正女紅帽爲后
7월 골정(骨正)의 딸 홍모(洪帽)를 후(后)로 삼았다.
沙飡孫光隧吳人米會 入吳
사찬 손광(孫光)이 오나라 사람 미회(米會)를 따라서 오(吳)나라로 갔다.
≪견해≫ 손광(孫光)은 미추(味鄒)의 스승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신라본기(新羅本記)와 아도본비(我道本碑)의 기록이 다르다 하면서, 하나는 미추왕(味鄒王)때요, 하나는 비처왕(毗處王, 소지마립간)때라 하였다. 신라사초와 비교해 보면 기년이 다르거나 내용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신라사초 미추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도(仙徒)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 있으므로, 당시의 기록을 불교의 전파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교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十九年 三月 大風 折木
19년(A.D.275)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實理生 高知子宣知
실리(實理)가 고지(高知)의 아들 선지(宣知)를 낳았다.
七月 仙權伊伐飡 忽仁稟主
7월 선권(仙權)을 이벌찬, 홀인(忽仁)을 품주로 하였다.
扶余來功腰車城 殺城主薛夫 命利音率精兵六千 伐夫余 破沙峴城
부여(扶余)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6천을 거느리고 가 부여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9년 기사
19년 3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였다.
7월 백제가 나라의 서쪽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였다. 왕이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6천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을 격파하였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河道獻 其女河羅
(대가야) 하도(河道)가 그의 딸 하라(河羅)를 바쳤다.
十二月 雷震 行禱
12월 천둥번개가 쳐서 기도하였다.
二十年 正月 行火神祭
20년(A.D.276) 정월 화신제(火神=丙申)를 행하였다.
乾臣伊伐飡 陽元稟主
건신(乾臣)을 이벌찬, 양원(陽元)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加耶于考太子歸
7월 가야(加耶, 아라가야)의 우고(于考)태자가 돌아갔다.
大理生 美知女索理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딸 색리(索理)를 낳았다.
二十一年 正月 暖檍伊伐飡 連色稟主
21년(A.D.277) 정월 난억(暖檍)을 이벌찬, 연색(連色)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行射馬選科 于北川
3월 북천(北川)에서 궁병과 기병의 병과를 선택하였다.
玉帽生帝女乳帽 于宅 命骨正洗之
옥모(玉帽)가 왕의 딸 유모(乳帽)를 댁에서 낳았다. 골정(骨正)에게 아기를 씻기도록 명하였다.
紅后生于老太子
홍후(紅后)가 우로(于老)태자를 낳았다.
四月 行先今祭
4월 선금(先今, 벌휴)의 제사를 지냈다.
二十二年 正月 索孝伊伐飡 駿仁稟主
22년(A.D.278) 정월 색효(索孝)를 이벌찬, 준인(駿仁)을 품주로 하였다.
八月 行大嘉俳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綠帽生 仇道子末昕
녹모(綠帽)가 구도(仇道)의 자 말흔(末昕)을 낳았다.
二十三年 正月 汗忠伊伐飡 柿月稟主
23년(A.D.279) 정월 한충(汗忠)을 이벌찬, 시월(柿月)을 품주로 하였다.
七月 武庫兵物自出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나왔다.
孫光還自吳
손광(孫光)이 오(吳)나라로부터 돌아왔다.
夫余來圍獐山城 上親擊破之
부여(夫余)가 쳐들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니, 왕이 친히 부딪쳐 깨뜨렸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3년 기사
23년 7월 무기고의 병기가 저절로 밖으로 나왔다.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격퇴하였다.
二十四年 正月 布喜伊伐飡〈板忠〉
24년(A.D.280) 정월 포희(布喜)를 이벌찬, 〈판충(板忠)을 품주로 하였다.〉
玉帽生 帝子仲解 帝洗之
옥모(玉帽)가 왕의 아들 중해(仲解)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七月 興失伊伐飡 亥文稟主
7월 흥실(興失)을 이벌찬, 해문(亥文)을 품주로 하였다.
河羅生 帝女守羅
하라(河羅)가 왕의 딸 수라(守羅)를 낳았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二十五年 正月 行白牛祭
25년(A.D.281) 정월 백우제(白牛=辛丑)를 행하였다.
三月 旱
3월 가물었다.
發門伊伐飡 病免
발문(發門)이벌찬이 병으로 그만두었다.
六軍頭上利音薨
6군두상(六軍頭上) 이음(利音)이 죽었다.
忠萱伊伐飡兼執軍政 成氏稟主
충훤(忠萱)을 이벌찬 겸 군정(軍政)으로 처리하도록 하고, 성씨(成氏)를 품주로 하였다.
≪견해≫ 무관(武官)들이 나라의 정권을 잡은 시기라는 의미도 있다.
七月 大閱 陽山西
7월 양산(陽山)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5년 기사
25년 3월 이벌찬 이음이 사망하자 충훤을 이벌찬에 임명하고,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7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加耶女君美理神殂 命述明往吊之
가야여군(加耶女君) 미리신(美理神)이 죽었다. 술명(述明)에게 가서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二十六年 七月 凉宮成
26년(A.D.282) 7월 양궁(凉宮)이 완공되었다.
虹公伊伐飡 臼燕稟主
홍공(虹公)을 이벌찬으로, 구연(臼燕)을 품주로 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거행하였다.
加耶河道殂 女河理立
가야(加耶)의 하도(河道)가 죽어 딸 하리(河理)가 섰다.
二十七年 四月 雹傷麥
27년(A.D.283) 4월 우박이 내려 보리가 상했다.
南新懸豪民諸馬武身死 體溫微歷月 其妻不忍葬之 抱而摩之 乃醒言 夢見陰司治獄之事 其設多符合 衆信奇之 稱諸先生 以車馬迎之 聽法
남신현(南新懸) 호민(豪民, 세력이 있고 재물이 넉넉한 백성) 제마무신(諸馬武身)이 죽었다. 몸이 체온이 미약하게 1달을 보냈다. 그의 처가 참지 못하고 장사를 지내려고 끌어안아 남편을 어루만졌는데, 이에 깨어나며 말하기를 꿈에 음사(陰司, 내력이 올바르지 않은 귀신을 모셔 놓은 집)와 치옥(治獄, 형률을 관장하는 자)의 일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설명 중에 부합(符合, 틀림없이 꼭 맞음)하는 부분이 많아서 대중들이 그 기이함을 믿었다. 제선생(諸先生, 諸는 성씨인 듯)이라 칭송하였다. 거마(車馬)를 보내어 맞이하고 법(法, 불가의 진리)을 청취하였다.
七月 柒公伊伐飡 休介稟主
7월 칠공(柒公)을 이벌찬, 휴개(休介)를 품주로 하였다.
十月 夫余入寇牛頭州 忠萱與賊戰 于熊谷 失利 命連珍代之 貶萱爲牛頭鎭主
10월 부여(夫余)가 우두주(牛頭州)를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충훤(忠萱)이 웅곡(熊谷)에서 적과 싸웠는데 손해를 보았다. 연진(連珍)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고, (충)훤을 낮추어 우두진주(牛頭鎭主)로 삼았다.
連珍大破夫余兵 獻俘
연진(連珍)이 부여(夫余)의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포로를 바쳤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27년 기사
27년 4월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가 상했다. 남신현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음 달에 다시 살아났다.
10월 백제 군사가 우두주에 들어 왔으므로 이벌찬 충훤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막으려 하였으나, 웅곡에 이르러 적에게 패하자 혼자 말을 타고 돌아왔다. 왕은 그를 진주로 강등시키고 연진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二十八年 正月 連珍伊伐飡兼知軍事 淡眞稟主
28년(A.D.284) 정월 연진(連珍)을 이벌찬 겸 지군사(知軍事)로 삼고, 담진(淡眞)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行壤井)를 행하였다.
加耶入朝
가야(加耶)가 입조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二十九年 正月 昔盧伊伐飡 江氏稟主
29년(A.D.285) 정월 석노(昔盧)를 이벌찬, 강씨(江氏)를 품주로 하였다.
三月 骨井太子薨
3월 골정(骨井)태자가 죽었다.
七月 連珍大破夫余 於烽山下 殺獲一千餘級 請築城而防之 命康萱築烽山城
7월 연진(連珍)이 봉산(烽山) 아래에서 부여를 크게 깨뜨려 1천여 명을 죽여 수급을 얻었다. 성을 쌓아 방어하기를 청하여, 강훤(康萱)에게 봉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螺碧伊伐飡 采氏稟主
나벽(螺碧)을 이벌찬, 채씨(采氏)를 품주로 하였다.
三十年 正月 淵于伊伐飡 馬淡稟主
30년(A.D.286) 정월 연우(淵于)를 이벌찬, 마담(馬淡)을 품주로 하였다.
四月 閱馬 于桃山
4월 도산(桃山)에서 말을 검열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紅后生 帝女阿爾兮 有五色雲覆之
홍후(紅后)가 왕의 딸 아이혜(阿爾兮)를 낳았는데 오색구름이 감싸고 있었다.
九月 行一善大場
9월 일선(一善)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扶余君古尒殂 子責稽立
부여(扶余)의 왕 고이(古尒)가 죽어, 아들 책계(責稽)가 섰다.
三十一年 正月 國興伊伐飡 白兮稟主
31년(A.D.287) 정월 국흥(國興)을 이벌찬, 백혜(白兮)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國良卒 孫光大日大師
2월 국량(國良)이 죽어, 손광(孫光)을 대일대사(大日大師)로 하였다.
三月 旱不雨 行禱
3월 가물었으나 비가 오지 않아, 기도를 행하였다.
加耶女君河理禪 于其夫孝道
가야(加耶) 여군(女君) 하리(河理)가 남편 효도(孝道)에서 선위하였다.
六月 中外祈雨 行赤羊祭
6월 나라 안팎에서 비가 오기를 빌고, 적양제(赤羊=丁未)를 행하였다.
七月 汗達伊伐飡 黃珍稟主
7월 한달(汗達)을 이벌찬으로, 황진(黃珍)을 품주로 삼았다.
孫光祈雨 於陰山 七日 乃大雨
손광(孫光)이 음산(陰山)에서 7일 동안 기우제를 하였는데, 이에 큰 비가 왔다.
發倉廩 賑飢民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十月 放輕囚
10월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命助賁太子 巡視州郡
조분(助賁)태자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펴보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1년 기사
31년 봄에 비가 내리지 않다가 7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10월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죄질이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三十二年 正月 碧正伊伐飡 隆主稟主
32년(A.D.288) 정월 벽정(碧正)을 이벌찬, 융주(隆主)를 품주로 하였다.
二月 巡狩西南郡邑 紅后助賁從之
2월 왕이 나라의 서남(西南, 혹은 서로와 남로)의 군읍(郡邑)을 살폈다. 홍후(紅后, 홍모)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
三月 還都
3월 도읍으로 돌아왔다.
七月 康萱伊伐飡 同忠稟主
7월 강훤(康萱)을 이벌찬, 동충(同忠)을 품주로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2년 기사
32년 2월 왕이 서남쪽 군읍을 순행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파진찬 강훤을 이찬에 임명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三十三年 正月 行土鷄祭
33년(A.D.289) 정월 토계제(土鷄=己酉)를 행하였다.
七月 允宗伊伐飡 邊月稟主
7월 윤종(允宗)을 이벌찬, 변월(邊月)를 품주로 하였다.
三十四年 正月 元豆伊伐飡 昌兒稟主
34년(A.D.290) 정월 원두(元豆)를 이벌찬, 창아(昌兒)를 품주로 하였다.
命助賁太子 監國
조분(助賁)태자에게 나라를 살피도록(監國) 명하였다.
四月 蛇鳴 南庫三日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九月 地震
9월 지진이 있었다.
十月 大雪深五尺
10월 큰 눈이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4년 기사
34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9월 지진이 있었다.
10월 눈이 크게 내려 다섯 자나 쌓였다.
三十五年 正月 薛白伊伐飡 牛忠稟主
35년(A.D.291) 정월 설백(薛白)을 이벌찬, 우충(牛忠)을 품주로 하였다.
三月 帝崩 紅后立母兄助賁太子 爲尼今 行祥登祚
3월 왕이 죽었다. 홍후(紅后)가 오빠(母兄) 조분(助賁)태자를 세워 니금(尼今)으로 하였다.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35년 기사
35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견해≫ 1. 홍모(紅帽)는 어느 기사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따라 죽은 듯 하다. 또한 홍모(紅帽)의 이전에는 왕비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은, 즉위 초에 보황(宝凰, 아달라와 자황의 딸, 326년 8월 기사 참조)이 40대 초반이었으니 왕비(王妃)로 생각에 두었으나 어머니 내례(內禮)와의 갈등으로 이루지 못한 듯 같다.
2. 벌휴이사금부터 첨해이사금 사이의 석(昔)씨 왕들의 기록은 신라사초의 다른 왕의 기록과는 달리 유난히 기록이 짧다. 석(昔)씨 왕들은 고구려와 화친하고 백제와 가야는 견제한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석(昔)씨가 고구려에서 출자한 이유에서 인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