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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라도
지각이 유리할 때도 있구나.
'아 산티아고'는 50여개의 2층 침대가 몇개의 홀에 분산되어 있는 사설 알베르게다.
대부분의 알베르가가 하는 것처럼 순례자들이 도착하는 대로 방을 채워가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18명 정원의 너른 방을 한 영감 홀로 지키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 도착한 순례자이므로 당연히 단 둘이 사용하게 되었으니까.
연 이틀을 최고로 편하고 분위기 좋은 방에서 보내는 것이다.
식사도 순례자(peregrinos)를 위한 특별메뉴라는 10유로 짜리 정식인데 심한 공복
에는 안성맞춤인 갈릭 수프(garlic soup)가 특히 맘에 들어 더 달라 해서 먹었다.
해발772m, 티론 강(rioTiron)가에 위치한 벨로라도(Belorado)는 거주인구가 2천여
명인 큰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교구, 지자체, 사설 등 각기 특징있는 4개의 알베르게가 있다.
두 병원과 아홉 교회도 있단다.
순례자들이 이 시설들을 통해 정신적,육체적 평안을 얻는 유서깊은 카미노마을이라
하나 내가 여기에 머문 까닭은 어이없게도 단순하다.
단지 몸이 따라주는 만큼 걸어서 도착한 마을일 뿐이니까.
77살 늙은이가 29km, 35km, 40km, 연3일의 강행은 참으로 무리하고 위험한 짓이다.
부르고스에 일요일 도착하는 것이 너무 나태하다면 토요일에 도착하여 하루 휴식을
취한 후 월요일에 대학교를 방문해도 되련만 왜 이랬는가.
과유불급이라는데 이처럼 무리해서 몸에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내가 나를 모르니까 불가사의로 돌린다.
많이 자거나 숙면을 취하는 것이 아닌데도 자고난 새벽의 몸이 늘 가뿐하다는 것.
그래서 쉬엄쉬엄 걷겠다는 생각을 뒤집어버린다는 것.
의욕이 아무리 강렬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벨로라도의 새벽 역시 그래서 미명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옆자리에 대한 배려 때문에 어둠속에서 짐꾸리느라 애를
먹는 여느 새벽과 달리 어제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되어 더욱 편한 새벽이었다.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마크를 찾느라 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다가 맨먼저 발견한 것은
반도전쟁 200주년 기념안내판(Bicentenario de la Guerra de la Independencia/
Bicentenary of the Peninsular War).
순례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목가적인 마을 이미지와 달리 그들의 근대사에 핏자국을
남긴 반도전쟁이라는 이름의 독립전쟁이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카미노를 피로 물들인 전투가 여기 벨로라도에서도 있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정규군과 에스포스 이 미나(Espoz y Mina) 장군의 자원 게릴라
군이 여기 벨로라도 성 비탈에서 치열하게 싸운 1810년 11월 11일을 기념하기 위해
벨로라도 의회가 2010년 11월 11일에 세웠다.
스페인의 수호신 성 야고보가 또 프랑스를 물리치고 스페인을 구했는가.
그럼, 이 때로 부터 125년 후에 발발한 스페인 내전(Civil War)에서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절벽에 다름 아닌 바위 아래에 자리한 산타 마리아 교회(Iglesia de Santa Maria)가
윤곽을 들러낼 만큼 밝아왔다.
한데, 이 교회의 건축공사는 부실이 숙명인가.
최초의 건축시기는 알 수 없으나 16c에 재건했는데도 안전하지 못하여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1910년에 또 재건했다고 안내판이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교회 앞에 서있는 또 하나의 빨간 간판은 "산티아고순례길(Camino de Santiago)이
1993년에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설명판이다.
카미노는 알베르게 콰트로 칸토네스(Cuatro Cantones)가 있는 긴 골목길을 벗어나
교외에 이르러서 토산 강 나무다리(인도교)를 건넌 후 널따란 농로로 변한다.
순례자 마을들
N-120도로를 만났을 때는 동녁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아침 해가 모습을 드러내려는 듯 한데 2시 방향 저 먼 데의 눈 덮인 장대한
산맥이 솟아오르는 햇살을 받아 눈부신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줌으로 당겨보았으나 한계가 있나 실제같지 않아 실망스럽고 산맥 이름이라도 알고
싶으나 순례자들은 나보다 나을 게 없고 현지인들은 기상 전이니 어쩐다.
비록, 산솔에서는 속았지만 아침 해맞이가 일과처럼 된 순례길이다.
떠오르는 태양으로부터 받는 힘찬 정기가 해맞기 위해 할애하는 귀한 시간에 대하여
보상하고도 남는 듯 하므로 결코 밎지는 장사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백두대간 종주 때 통비닐 비박 후 산 속에서 맞는 찬란한 태양의 정기에
날아갈 것 같던 기분이 카미노에서 재현되는 듯 해 이 아침에도 해맞이에 열중했다.
얼마간 나란히 가던 도로를 떠나 다시 비포장 농로가 된 카미노는 인구 60명 미만의
작은 마을이지만 알베르게가 있는 토산토스(Tosantos)를 지나간다.
마을 북쪽 끝 절벽에 눈길을 끌어가는 토굴같은 암자(hermitage)가 있다.
12c부터 동정녀 마리아상(像)이 있다는 '에르미타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뻬냐
(Ermita de Nuestra Senora de la Pena)다.
토산토스에서 각기 지근거리인 비얌비스티아(Villambistia)와 에스피노사 델 카미노
(Espinosa del Camino)는 주민수가 각각 50, 40 미만인 미니 마을이다.
그런데도 알베르게가 있다.
4km 이내의 3마을이 모두 알베르게 마을이라 하겠다.
한데, 비얌비스티아 마을 앞의 수돗물은 왜 정수(淨水)하지 않는 것일까.
이같은 시골길에서는 연달아 있는 알베르게 보다 필요한 것이 마실 물일 텐데.
'마시지 말라' 의 우회적 표현에 다름 아닌 '탈 나도 책임지지 않는다(sin garantias
sanitarias)'는 딱지는 언제나 철거할 것인가.
카미노에서 실망스러운 점중 하나가 물이 필요한 곳에 이같은 물만 있다는 것이다.
완만하게 오르기를 계속하던 카미노는 한동안 도로에 흡수된다.
1km미만이지만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를 걷는 것은 내게는 반칙이다.
카미노 마니아들의 화려한 수사들이야 어떠하든 가톨릭식 순례자가 아닌 나는 단지
차 없는 길을 맘놓고 많이 걷고 싶어서 이 먼 땅에 왔을 뿐이니까.
내게 선(善)은 오직 힘차고 당당하게 오래 걷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남들의 어떤 선(善)과도 호환은 커녕 비교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선이다.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육행위가 헛된 짓이다
작은 시내에 불과한 오카강(rio Oca)을 건너 오카산 자락의 해발 945m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Villafranca Montes de Oca) 마을도 지났다.
'오카'는'거위'(goose)를 뜻한다는데 산과 강, 마을 등의 이름이 오카 일색이다.
거위와 어떤 관련이 있나 궁금했으나 알 길이 없는데 이럴 때 오피시나 데 뚜르시모
(Oficina de Tursimo:관광안내소)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에는 오카산길이 매우 험하고 산적 강도들이 들끓는 공포의 순례길이었단다.
옛 순례자들이 이 산을 넘다가 재물은 물론 목숨까지 잃기도 했다니까.
안내판과 이정표들이 바야흐로 부르고스주(province)에 들어섰음을 알리고 있다.
전주에 붙은 이정표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526.7km, 부르고스는 36km란다.
오늘 정오 안에 프랑스길 3분의 1을 넘게 되며 부르고스에는 내일 낮 시간에 무난히
도착할 수 있겠으므로 여유를 부려도 되겠다.
그래서, '빵을 적시는 샘' 을 의미한다는 '푸엔떼 데 모하판'(Fuente de Mojapan)의
작은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크(oak)숲은 우거진 소나무 숲길로 바뀌어 모누멘또 데 로스 카이도스(Monumen
to de los Caidos:전몰자 기념비) 앞까지 지루하게 이어진다.
1936년에 발발한 스페인 내전(그들은 Civil War)의 전사자들을 기리는 비다.
반도전쟁 때 그러했듯이 카미노가 또 전사자들의 피로 물들었을 터.
헤밍웨이(E.M.Hemingway:1899 -1961)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통해 더 알려진 이 전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왈가왈부할 늙은 순례자의 몫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다만, 우리의 영령들을 기리는 비와 탑 앞에서 엄숙해지는 것처럼 그들의 기념비 앞
에서도 그래지는 것은 정녕 동병상련의 정서인가 인간의 기본 심성인가.
<NO FUE INUTIL SU MUERTE FUE INUTIL SU FUSILAMIENTO>(노 푸에 이누띨 수
무에르떼 푸에 이누띨 수 푸실라미엔또 / It was not their deaths, but the manner
of their deaths that was senseless)는 비문이다.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육행위가 헛된 짓"이라는 뜻의 비문이 말
하듯 처참한 살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결과가 프랑코(Francisco Franco:1892 ~1975)의 36년 독재 탄생인데.
우리나라의 내전에 세계 여러 나라가 지원 참전한 것 처럼 이 내전에도 여러 나라가
이해관계에 얽혀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 때 스페인의 수호신 성 야고보는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어느 쪽 손도 들어줄 수 없는 내전이기 때문에 방관자로 일관했나.
그렇다 해도 정의의 사도가 독재자를 용납한 형국이라 찜찜했다.
온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마을 아타뿌에르카
카미노는 급하게 내려가서 뻬로하 개울(Peroja arroyo)을 건넌 후 오르기도 그렇게
하고 나면 황당하게 넓어진다.
포장하고 선만 그으면 고속도로가 될 만큼 넓어 산만해지는데 순례 맛이 나겠는가.
양쪽의 울창한 소나무 숲도, 잘 가꿔놓은 숲속의 샘 까지도 의미를 잃고 있다 할까.
해발1.100m대에서 2km쯤 계속되다가 분기해 완만한 내리막 길로 변한 카미노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마을을 지난다.
해발 1.013m에 위치한 오르테가는 주민 20명 미만의 초미니 마을인데도 수용 인원
58명의 알베르게가 있다면 전통있는 순례자 마을이라 하겠다.
4월 중순인데도 햇볕이 불같아서 그런가.
해가 중천에 있는데도 많은 순례자들이 여기에 묵으려는 듯 움직일 기미가 없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헤스까지 갈 요량으로 마을을 떠났다.
소나무와 관목숲 앞에서 메인(main)과 대체(alternative)로 갈리는데(부르고스까지)
아헤스로 가려면 메엔을 택해야 한다.
해발968m에 있는 아헤스(Ages)는 인구60명도 못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알베르게가
4개나 있으므로 잠자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부르고스도 내일 일찍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중지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목표를 다음 마을로 늘렸다.
아헤스에서 2.5km쯤 되는 아타뿌에르카(Atapuerca)는 15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자그마하나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마을이다.
100만년 ~ 80만년전에 유럽에서 살았던 인류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중 하나로 추정
되는 호모 안테세소르(Homo Antecessor)가 발견됨으로서.(1994년)
이후 마을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유적 발굴지역중 하나가 됐으며 2000년에는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처럼 당황하게 만들었을까.
알베르게 빠빠솔(Papasol)에 짐을 풀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인 교회 바로 아래 빈 터에 있어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삐걱대는 마루 바닥을 빼면 꼬집을 만한 불편이 없으며 관리인 부부(?)가 제공하는
10유로 짜리 저녁식사도 괜찮아 하루가 잘 마무리 되는 듯 했다.
빠르(bar)에 가서 맥주도 한 잔 마시고, 별자리에 무지하면서도 초저녁 부터 수선을
피우는 별하늘을 올려다 보며 늙은 소년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다.
우리의 하늘도 저러했는데 어쩌다 먹통이 돼버렸는가 탄식이 절로 나오기는 하지만
요즘 밤마다 별 헤아리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어제에 비하면 엄청 짧지만 결코 만만한 거리가 이닌 30km 이상 걸었는데도 여전히
말짱하며 날로 더욱 가속이 붙어가는 몸 컨디션에 늙은 나그네는 마냥 행복했다.
<어머니 앞에 두 다리로 당당히 서며, 어머니 보시는 앞에서 힘차게 걸으며, 어머니
에게로 비호같이 달려가는 아들을 어머니는 얼마나 기다리셨던가.>
그 연장선에 다름 아닌 카미노에서 당신의 당당한 늙은 아들을 보시는 내 어머니의
흐뭇해 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숙면을 기대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내 앞에 악재가 기다릴 줄이야.
"재파니스 데스까?"
무심코 세면실(샤워실)로 들어가다가 마주친 한 젊은 여인의 불심검문(?)이다.
그녀는 왜 당황했으며 왜 이런 국적이 애매하고 황당한 질문을 던졌을까.
그녀가 일본인이라면, 그리고 내가 일본인처럼 보였다면"곰방와( ごんばんは/今晩)"
제삼국인이라면 "니혼진데스까(日本人ですか)"또는"아 유 재퍼니스(are you Japan
ese)"라고 물었을 것이다.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웨어 라 유 프롬(Where are you from?) 또는 데 돈데 에레스
(De donde eres?) 라고 물었을 것이고.
차라리 내 눈이 노쇄해 잘못 본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알베르게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을 때 통로 저편 침대 위에 '산티아고 가이드북'
한국어 번역본이 펼쳐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반가웠다.
필시, 한국인일 것이니까.
재미교포 청년과 헤어진 후 처음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가마귀도 고향 가마귀는 더 반갑다는데.
한데, 그 괴상한 질문을 한 여인이 바로 그 침대의 주인이라니.
차라리 모른 체 하고 지나칠 것이지 왜 그런 질문을 하여 늙은이를 심란하게 하는가.
그녀는 내가 한국 늙은이임을 이미 알았으며 자기가 한국여인으로 비취지 않으려는
순간적 발상에서 엉겁결에 나온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한국 여인으로 비취는 것을 꺼려했을까.
세계인의 화합의 장에 다름 아닌 순례길에서 국적과 성별, 연령은 의미 없다.
민간 외교라는 거창한 포장도 필요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이며 친구들이니까.
외국인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한국인 끼리는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건만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답은 하루 후에 타르다호스에서 나왔다) <계 속>
새벽의 '아 산티아고' 알베르게(위)
반도전쟁 200주년 기념 안내판(아래)
산티아고 순례길이 1993년에 UNESCO세셰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설명판(위)
산타 마리아 교회(아래)
콰트로 칸토네스 알베르게(위)
티론 강 인도교 나무다리(아래)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신 눈덮인 (?)산맥(위)
일출(아래)
토산토스로 가는 농로(위)
토산토스 마을과 '에르미타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뻬냐'(아래)
카미노 비얌비스티아(위)
비얌비스티아 마을과 갈증만 부추길 뿐 마실 수 없는 수도(아래)
비얌비스티아 ~ 에스피노 델 카미노 ~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로 이어지는 순례길(위)
오카 마을(아래)
이정표와 푸엔테 데 모하판 ~ 카이도스 기념비 까지의 카미노(위)
카이도스 기념비(아래)
카이도스 기념비 ~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카미노(위)
오르테가 마을(아래)
카미노 안내판과 아헤스 길(위)
아헤스 마을(아래)
아타푸에르카의 UNESCO세계문화유산 등재 간판(위)
아타푸에르카 마을로 가는 길(아래)
아타푸에르카 마을과 또 만난 한국산 자동차(위/여기에서는 연거푸 보았다)
알베르게 파파솔(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