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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미래를 위하여
―오늘날의 시조에 대한 진단과 희망
장 경 렬 | 서울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
1. 아뿔사, 어찌할 것인가!
아뿔사! 난감하고 난처한 일을 해야 할 자리에 겁도 없이 뛰어든 것은 아닐지? 계간 《시조21》이 원고 청탁을 했을 때 별 생각 없이 수락하긴 했지만, 시조시인 50명의 대표작 100편을 받아들고 어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겠는가. 무엇보다 100편의 시에 대한 논의를 200자 원고지 50매의 분량에 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두 편 작품 가운데 한 편만 논의 대상으로 삼더라도 원고지 50매로는 어림도 없다. 어차피 취사선택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또한 난감하고 난처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는 시인의 작품 또는 가깝게 지내지 않더라도 호감이 가는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작품에 우선 눈길이 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형태와 방향의 글을 쓰게 될지는 몰라도, 우선 취사선택을 하되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시조21》이 제공한 100편의 작품이 담긴 원고 파일에서 시인의 이름과 약력을 모두 삭제했다. 또한 “외 1편”이라는 표현도 삭제했다. 말하자면,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치기로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친숙해 있거나 내용의 일부라도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고 해도 제외하기로 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작품을 선정하고 보니,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내 눈길과 마음을 끌었다. 작품을 선정한 뒤에 시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보니, 내게 이름조차 생소한 시조시인도 여러 분이 있었다. 아무튼, 이어지는 나의 논의는 이렇게 선정한 아홉 편의 작품에 바탕을 둔 것이다.
2. 단시조의 묘미를 찾아서
《시조21》이 나에게 제시한 글의 방향은 “100편의 작품을 통해 정리해 볼 수 있는 작금의 시조 시단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었다. 이 말에서 ‘처방’이라는 말은 시조 시단 주변에서 몇 마디 말을 거드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가당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진단과 처방”이 아니라 “진단과 희망”이라는 말로 바꾼 뒤 나의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아무튼, 작품을 읽고 또 읽는 과정에 우선 주목하게 된 것은 아홉 편 가운데 세 편이 단시조 형식의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시조가 앞으로 갈 길은 ‘단시조 형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인 만큼, 우선 세 편의 단시조에 대한 논의를 앞세우고자 한다.
이에 앞서 몇 마디 첨언하자면, 내가 단시조 형식을 중요시함은 단순히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단시조가 시조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시조의 ‘시조다움’은 마땅히 단시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수의 단시조를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지닌 작품으로 묶어 제시하는 이른바 ‘새로운 형태의 연시조’로 시조를 창작하는 관행이 대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하나의 주제나 소재 아래 몇 수의 독립된 단시조를 차례로 제시하는 원래의 연시조와 다른 형태의 연시조이긴 하나, 그런 관행이 대세인 만큼 이는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관행이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우 시조의 정체성 자체가 모호해질 수 있다. 따라서 시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단시조에도 마음을 적극적으로 열자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생각이다. 확신컨대, 단시조 형태로 응축할 수 있는 시심에 대한 시적 형상화의 작업이야말로 시조시인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역할이자 의무라는 것이 내 나름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나의 생각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이번에 새롭게 내 눈길을 끈 세 편의 단시조는 시조 시단의 미래에 빛을 비추는 예사롭지 않은 작품으로 보인다. 우선 고정국의 「강아지풀」에 눈길을 주기로 하자.
바람의 분량만큼
허리 굽혀 살아온 그대
묻지도 않는 말에
고분고분 답하는 그대
아무 일, 아무 일 없다며
눈물 꾹꾹
삼키는 그대.
―고정국, 「강아지풀」 전문
고정국의 작품에서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은 “강아지풀”인데, 시인의 심안心眼에 비친 강아지풀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초장에 해당하는 제1연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강아지풀의 모습이라면, 중장에 해당하는 제2연이 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강아지풀이 아니다. 이는 시인의 심안에 비친 주관화된 강아지풀로, 여기서 시인이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의미 투사’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강아지풀을 바라보며 “묻지도 않는 말에 / 고분고분 답하는” 존재―예컨대, ‘심성이 곱고 온순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종장에 해당하는 제3연에 이르러 시인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는데, “아무 일, 아무 일 없다며 / 눈물 꾹꾹 / 삼키는 그대”가 일깨우는 것은 우리가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언뜻 마주하는 ‘심성이 곱고 온순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이처럼 시조란 원래 자연을 노래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노래하는 정형시인 것이다. 시인은 ‘심성이 곱고 온순한 사람’의 이미지를 일깨움으로써 강아지풀의 ‘강아지풀다움’을 생생하게 살리고 있는 동시에, 강아지풀을 내세워 ‘심성이 곱고 온순한 사람’의 이미지를 더욱 생생하게 드러낼 듯 감추고 감출 듯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민병도의 「들풀」을 함께 읽기로 하자. 언제 발표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 같은 작품이 아직도 내 눈길을 끌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게으른 나의 성품 탓이리라.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
―민병도, 「들풀」 전문
민병도의 작품도 우리가 세상 어디서나 흔하게 마주하는 식물인 “들풀”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민병도 역시 고정국과 마찬가지로 초장에 해당하는 제1연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풀에 마음과 눈을 준다.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 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이 들풀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중장에 해당하는 제2연에서 시인은 그러한 들풀이 겪어야 할 수난사의 극점極點에 해당하는 부분을 담는다. 들풀은 마침내 낫의 칼날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듯 들풀을 벤 낫은 들풀의 향기로 감싸이게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관화의 과정을 거치는 고정국의 경우와 달리 일관되게 사실에 충실한 시인의 시적 시선과 만나게 된다. 물론 주관화와 객관화는 나름의 의미를 갖는 시적 형상화 작업이어서 비교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긴 하지만, 민병도의 시적 시선은 시에 한층 더 구체적인 시적 현장감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이 시와 마주한 이에게 한층 더 직접적으로 시적 이미지에 다가가게 한다. 아무튼, 종장에 해당하는 제3연에 이르러 시인은 극적인 전환을 꾀하는데, “알겠네”라는 언사는 옛시조의 종장 앞부분을 장식하는 표현들―즉, ‘어즈버’나 ‘아희야’나 ‘두어라’ 등등―이 갖는 시적 묘미를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다. 이어서 시인은 말한다. “왜 그토록 오래 / 이 땅의 주인인지.” 이것이 바로 자연의 들풀이 우리네 눈이 어두운 인간에게 전하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인간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법. 자신을 핍박하고 목숨까지 앗아 가는 대상까지도 자신의 “향기”로 감쌀 수 있는 너그럽고 속 깊은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법.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 땅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요컨대, 단시조 안에도 이처럼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조의 묘미인 것이다.
나의 눈길을 끈 세 편의 단시조 가운데 하나는 이승은의 「굴절」로, 작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입니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이승은, 「굴절」 전문
이승은의 작품은 자연의 사물이 아닌 자연의 현상을 시적 소재로 하고 있다. 무언가를 물에 담그면 물과 대기의 밀도 차이로 인해 꺾여 보이게 마련이다. 시인이 말하듯 “물에 잠기는 순간 발목이 꺾”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꺾여 보인다.’ 이처럼 꺾여 보이는 것을 놓고 실제로 꺾인 것처럼 과장하거나 이에 엄살을 떠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적지 않다. 특히 그런 사람들이 많은 곳이 사회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정치’를 일삼는 일들이 요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른바 ‘정치판’이다. 자신이 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발”이 꺾인 듯 요란을 떨고 자신의 “발”을 꺾었다고 지목하는 애꿎은 “물”을 향해 비난을 서슴지 않은 이른바 정치꾼들이 우리 주변에 어디 하나둘이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시인은 동요動搖의 빛이 없이 이렇게 말한다. “보기에 그럴 뿐이지 다친 곳은 없다는데.” 이어지는 시인의 물음은 더할 수 없이 차분하다. “근황이 어떻습니까, 아직 물속입니까?” 이처럼 날카롭지만 전혀 ‘날’이 감지되지 않는 ‘비판 아닌 비판’을 포용하고 있는 것이 시조시인 이승은의 「굴절」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단시조인 것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시조시인이 현대의 복잡한 삶과 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심경을 드러내기에 단시조라는 시적 공간은 좁다는 이유를 앞세우며 이른바 연시조 형식을 자주 찾는다. 하지만 그런 시조시인이 있다면, 그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검토한 세 편의 단시조에서 보듯, 단시조라는 시적 공간은 결코 좁은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이는 바다처럼 넓은 공간일 수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단시조라는 공간 안에 자신의 시상이나 시적 메시지를 담아내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전하고 싶은 “작금의 시조 시단에 대한 진단과 희망” 가운데 하나다.
3. 일상의 삶을 노래한 시조를 찾아서
시조시인이라면 단시조 형식에 적극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해서, 오늘날 대세를 이루고 있는 연시조에 마음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결코 나의 뜻은 아니다. 그런 형태의 작품 가운데 절창絶唱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적지 않거니와, 일상생활 속의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을 감지케 하는 다음의 예를 주목하기 바란다.
오늘도 불안은 우리들의 주식이다
눈치껏 숨기고 편안한 척 앉아보지만
잘 차린 식탁 앞에서 식구들은 말이 없다
싱긋 웃으며 아내가 농을 걸어도
때 놓친 유머란 식상한 조미료일 뿐
바빠요 눈으로 외치며 식구들은 종종거린다
다 가고 남은 식탁이 섬처럼 외롭다
냉장고에 밀어 넣은 먹다 남은 반찬들마저
후일담 한마디 못한 채 따로 따로 갇혀 있다
―이우걸, 「아침 식탁」 전문
이우걸의 「아침 식탁」은 일상의 삶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는데, 아침식사자리는 여느 식사자리와 달리 온가족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점심식사나 저녁식사는 가족 구성원 가운데 일부가 밖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세 수로 구성된 이 작품에는 각각 ‘식사 전’과 ‘식사 중’과 ‘식사 후’의 정경이 담겨 있다. 먼저 첫째 수에서 시인은 아침식사자리에 모인 가족의 분위기를 그린다.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며, 그런 느낌을 “눈치껏 숨기고 편안한 척 앉아 보지만” 누구도 “말이 없다.” 사실 말이 없기에 “불안”이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말이 없음은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각자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직장이나 학교에 갈 시간이 다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 이 같은 식사자리의 분위기일 것이다. 둘째 수에 이르러 가족은 말없이 식사를 한다. 시인의 “아내”가 분위기 전환을 위하여 “농”을 걸지만, “식상한 조미료”와도 같은 “때 놓친 유머”일 뿐이다. “바빠요 눈으로 외치며” “종종”거리는 가족의 구성원은 모르긴 해도 자식들일 것이다. 셋째 수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식사를 마치고 가족이 떠난 자리에 “섬처럼 외롭[게]” 남아 있는 시인의 모습이다. 셋째 수에 이르러 시인은 “섬”처럼 외로울 뿐 아니라 “냉장고에 밀어 넣은 먹다 남은 반찬들”과도 같이 “후일담 한마디 못한 채 따로 따로 갇혀”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네 자신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침 식탁」을 읽다 보면, 마치 세 폭으로 이루어진 풍속도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잘 짜인 구도의 이 작품은 앞서 주목했듯 ‘식사 전’과 ‘식사 중’과 ‘식사 후’의 정경을 차례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 수의 단시조만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시적 공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연시조 형식이 필요하다면 이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아무튼, 이우걸의 「아침 식탁」은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현대 시조의 백미白眉로 꼽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한 마디 트집을 잡자면, 셋째 수의 중장과 종장이 하나의 어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장마다 독립된 어절 또는 어구를 사용하는 것이 시조의 원칙이라면, 이는 일종의 ‘파격’을 용인한 셈이 된다.
생활의 한 단면이 소재가 되고 있는 또 한 편의 멋진 작품이 있다면, 이는 김세환의 「신을 닦으며」다.
아직 서툰 솜씨로 아내의 신을 닦는다.
긴 세월 접어두었던 꽃물 든 가슴 열고
화창한 꽃비 내리는 봄길 마음껏 걸으시라고.
허기 한번 채우지 못한 순종의 별난 천성
가난을 털어내듯 내 구두를 닦던 사람
스스로 갇혀 살아온 그 삶의 무지외반증拇指外反症.
언제나 출근길에 공손했던 배웅처럼
즐거운 나들이에 가지런한 웃음으로
남은 날 나도 그대 위한 편한 신이고 싶다.
―김세환, 「신을 닦으며」 전문
앞서 검토한 이우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세 수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첫째 수에서 우리는 “아내의 신을 닦는” 시인과 마주한다. 윤흥길의 단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보듯, 문학작품 속에서 신은 종종 인간의 신산한 삶에 대한 환유(, metonymy)로서 기능을 한다. 세상에 신만큼 인간이 걸어 온 삶의 자취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은 따로 없기 때문이리라. 그 때문인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누군가의 ‘신을 닦는 일’은 상대가 살아 온 신산한 삶의 자취를 정리해 주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향한 출발을 돕는 행위로 이해되기도 한다. 마치 시인이 아내의 신을 닦아 줌으로써 이제까지 “긴 세월” 가슴을 “접은 채” 변변한 외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아내가 “화창한 꽃비 내리는 봄길”로 나설 수 있도록 돕듯. 둘째 수에서 우리는 아내의 삶에 대해 상념에 잠기는 시인과 만난다. 시인이 이해하는 아내의 삶은 신과 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무지외반증”으로 고통을 겪는 발의 처지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처럼 고통 속의 삶을 살면서도 자유에 대한 “허기”를 “한번 채우지 못한 순종의 별난 천성”의 아내가 “가난을 털어내듯 내 구두를 닦던” 일을 기억하면서 시인은 “아내의 신을 닦는다.” 아내의 삶에 대한 시인의 상념이, 또한 아내를 향한 시인의 따뜻한 이해가 ‘신’을 매개로 함으로써 더할 수 없이 생생하고 곡진曲盡한 것이 되고 있지 않은가! 셋째 수에 이르러 시인은 “언제나 출근길에 공손[하게] 배웅[했던 아내]처럼” 아내를 배웅하되, “즐거운 나들이에 가지런한 웃음”을 보낼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또한 “남은 날 나도 그대 위한 편한 신이고 싶다”는 염원을 드러낸다. 이처럼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끝 부분에 이르기까지 ‘신’의 이미지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매끄럽게 살아 있는 김세환의 「신을 닦으며」도 이우걸의 「아침 식탁」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소재로 현대 시조의 백미 가운데 한 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생활의 현장에서 시인이 보고 느낀 바를 시적 형상화한 작품 가운데 또 한 편의 백미가 있다면, 이는 하순희의 「비, 우체국」일 것이다.
난 한 촉 벌고 있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 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티로폼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하순희, 「비, 우체국」 전문
네 수의 단시조를 행간 없이 이어 놓아 속도감 있는 시 읽기를 가능케 한 하순희의 「비, 우체국」은 우체국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역시 일상생활의 한 현장을 담은 작품인 것이다. 첫째 수에서 시인은 우체국의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소액환 창구란 돈을 부치는 곳이 아닌가. 아무튼 그 손의 주인공이 시인에게 부탁한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둘째 수에서 시인은 “투박한 손”의 주인공이 얼마간의 만 원짜리 지폐―마치 그의 삶과 마음을 언뜻 드러내기로도 하듯, “꼬깃꼬깃 접혀” 있을 뿐만 아니라 “빗물”에 “젖은” 지폐―를 소액환으로 바꾼 뒤에 함께 보낼 사연을 대신 받아 적는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간결한 두 마디의 사연을 받아 적으며, 시인은 “투박한 손”의 주인공이 살아감 직한 삶의 신산함을 가늠해 본다. 추측건대, 그는 “갯벌 매립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일 것이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사람일 것이다. 넷째 연에 이르러서도 “투박한 손”의 주인공에 대한 시인의 상념이 이어진다. 그의 잠자리는 아마도 “부러진 스티로폼”일 것이고, 그곳에서 “새우잠”으로 나날의 밤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열악할 것임에 틀림없는 그의 잠자리에 대한 시인의 상념은 단순히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연민의 마음을 뛰어넘어 ‘희망의 말’ 또는 ‘시인의 염원’을 담기 위한 것이다. 셋째 수의 초장에 이어 중장에 이르러 시인은 염원한다. 아니, 마음속으로 그려 본다. 세상 곳곳에 그러하듯 그의 잠자리인 “부러진 스티로폼 사이”로도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는 모습을! 물론 “하얗게 피고 있”는 “철 이른 냉이꽃”은 “투박한 손”의 주인공에게 곧 찾아오기를 시인이 염원하는 환하고 밝은 빛의 나날들에 대한 암시를 담은 꽃이다. 아무튼, 작품을 마무리하는 넷째 수의 종장에서 시인은 끝내 억누를 수 없었던 마음 한 자락을 드러낸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 하지만 어쩌겠는가, “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자체가 인간의 존재 조건, 누구나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 조건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신산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 대한 시인의 마음 씀이 생생하게 짚이는 하순희의 「비, 우체국」도 일상생활을 소재로 현대 시조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다룬 세 편의 ‘연시조’에 담긴 시인의 시심 모두가 다 값지고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때로 섬세하고 정치精緻한 눈길을, 때로 깊은 상념이 짚이는 우수憂愁의 눈길을, 때로 따뜻한 이해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세 시인의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일상적인 삶의 순간순간을 향한 깊은 관심의 마음이거니와, 모름지기 현대 시조가 나아가야 할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 삶에 대한 명상의 깊이가 짚이는 시를 찾아서
이번에 내가 주목한 작품 가운데는 삶을 노래한 시조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소재로 삼지 않는 예도 있다. 삶의 현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삶에 관한 명상 또는 상념’에 잠긴 시인의 모습을 감지케 하는 이들 작품에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더할 수 없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시적 이미지들이다. 우선 두 수의 단시조로 이루어진 작품인 김영재의 「마음」에 눈길을 주기로 하자.
연필을 날카롭게 깎지는 않아야겠다
끝이 너무 뾰족해서 글씨가 섬뜩하다
뭉툭한 연필심으로 마음이라 써본다
쓰면 쓸수록 연필심이 둥글어지고
마음도 밖으로 나와 백지 위를 구른다
아이들 신나게 차는 공처럼 대굴거린다
―김영재, 「마음」 전문
김영재의 「마음」을 읽고 나는 《시조21》에 제공한 100편의 작품을 읽는 과정에 여러 차례 되뇌던 말을 새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하여 이 같은 절창이 아직까지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게으른 내 성품을 탓하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김영재의 「마음」은 정녕코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다. “마음”을 “연필심”에 빗대어 노래한 이 작품이 일깨우는 “마음”의 이미지가 더할 수 없이 생생하고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감히 말하건대, 엘리엇(T. S. Eliot)이 펼친 “객관적 상관물”(the objective correlative)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또한 “객관적 상관물”이 성공적으로 제시된 예를 들고자 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예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심지어 손끝으로 감지할 수도 있는 그 무엇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마음”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그 무엇을 시각적으로 또한 촉각적으로, 아니, 공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실체화하여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마음”의 ‘날카로움’과 ‘섬뜩함’을 “연필심”의 ‘뾰족함’에서, “마음”의 ‘둥’을 “연필심”의 ‘뭉뚝함’에서 감지하는 시인의 시심과 상상력이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쓰면 쓸수록 연필심이 둥글어지고 / 마음도 밖으로 나와 백지 위를 구[르다]”니! 그리고 둥글어진 마음이 “아이들 신나게 차는 공처럼 대굴”거리다니! 이처럼 참신하면서도 산뜻하고 산뜻하면서도 돌올突兀한 시적 이미지와 마주할 수 있다니, 어찌 내 마음이 기껍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이들이 신나게 차는 공처럼 대굴”거리도록 우리네 마음은 둥글어져야 한다는 시인의 희망이 짚이기도 하는 이 작품에 대한 더 이상의 논의는 사족蛇足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기에, 나는 논의를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삶에 대한 명상 또는 상념을 담은 작품 가운데 비유에 기대는 또 한 편의 주목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이는 조동화의 「고삐에 관한 명상」이다.
1
모래 구덩이에서 갓 깨난 새끼 거북
한쪽을 제외하면 다 죽음의 방향인데
용케도 물소리 들리는 바다 쪽을 향해간다
누구의 가르침도 그는 들은 바 없다
다만 날 때부터 지녀온 본능의 고삐
투명한 그 이끌림 따라 생명의 첫 길을 간다
2
사람의 뇌리 속에도 그런 고삐 들어 있나
평생 흑암에 살다 한 점 빛 보는 순간
홀연히 마음눈 열려 좁은 길로 드는 사람
많이는 왜 저럴까, 의혹의 눈길을 주고
더러는 너무 변했다, 뒤에서 수군대지만
흔연히 모든 걸 두고 진리의 첫 길을 간다
―조동화, 「고삐에 관한 명상」 전문
각각 두 수의 단시조로 이루어진 두 편의 연시조로 구성된 위의 작품에서 우리가 먼저 마주하는 것은 “본능”으로밖에 설명할 것이 없는 생명의 신비다. 생명의 신비를 말할 때 예로 드는 본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시인은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이가 “용케도 물소리 들리는 바다 쪽을 향해[감]”을 주목한다. 문제는 시인이 이를 “고삐”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사전적 정의가 어떠하든, ‘고삐’란 ‘얽매임’이나 ‘통제’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함의가 강한 말이다. 바로 이 말을 새끼 거북이의 본능에 적용함으로써 시인은 여기에 긍정적인 함의를 담는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태어나서 죽음의 순간까지 각종의 ‘고삐’에 얽매이는 존재다. 여기서 잠깐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볼 것이 요구되는데, 이드란 인간의 원초적 충동이나 욕구와 관계된 것으로, 이는 그 어떤 고삐를 벗어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인간의 성장 과정에 제어될 수밖에 없는데, 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자아다. 자아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즉, 이드)을 통제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교정한다. 이 과정에 고삐의 기능을 하는 것이 곧 이드의 쾌락 원리에 대비되는 현실 원리다. 즉, 현실과 타협하는 가운데 자아는 쾌락 추구를 유보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며, 이로써 자아는 성장을 거듭한다. 한편, 초자아란 성장 과정에 부모의 명령이나 지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사회의 각종 도덕적 명령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형성된 정신의 측면을 말한다. 즉, 온갖 규범과 이상理想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형성된 것이 초자아다. 어찌 보면, 시인이 둘째 편의 연시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초자아라는 “고삐”다. 즉, “흔연히 모든 걸 두고 진리의 첫 길을 [가]”도록 누군가를 인도하는 것은 초자아라는 “고삐”인 셈이다. 바로 이 “고삐”의 순기능에 대한 탐구 또는 명상이 조동화의 작품에서 요체要諦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새끼 거북이의 본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둘째 편의 연시조에서 시인이 말하는 “고삐”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고삐라는 점에서 시인의 “명상”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아니, “사람의 뇌리 속에도 그런 고삐 들어 있나”라는 둘째 연시조의 첫째 수 초장에서 시인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듯, 시인은 첫째 연시조의 “고삐”와 둘째 연시조의 “고삐”가 다른 종류의 것일 수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째 편의 연시조에서 “본능의 고삐”라는 표현 대신에 “그런 고삐”로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고삐는 고삐이되 모르긴 해도 종류가 다른 고삐’일 수 있음을 시인이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아닐지?
시조는 앞서 검토한 이우걸, 김세환, 하순희의 작품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처한 현장 자체에 대한 관찰을 담을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김영재와 조동화의 작품에서 보듯 삶의 현장에서 잠깐 물러나 앉아 이어가는 삶 자체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한 상념이나 명상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연시조 형식의 작품에 대한 검토에 앞서 논의한 고정국, 민병도, 이승은의 단시조도 넓게 보아 삶의 현장에서 이어가는 삶에 대한 명상 또는 비판적 명상을 담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 모든 작품이 현대 시조의 밝은 앞날을 보장하는 멋진 작품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 동요와 같이 밝고 환한 시조를 찾아서
시조가 오늘날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무겁고 진지한 성찰이나 비판 또는 상념이나 명상의 시조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시조란 때로 재치와 해학과 예지를 담은 경구(警句, aphorism)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때로 세상과 삶에 대한 경쾌한 노래와도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것도 현대 시조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이 그러함을 헤아리기라도 한 양, 정표년의 「봄 오면」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기서 내가 동원한 ‘노래한다’라는 표현은 비유적 의미에서의 ‘노래한다’가 아니다. 말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이 정표년의 작품인 것이다.
봄 오면 고맙더라
눈물 나게 고맙더라
천천히 몸 일으키는
앞산을 보는 것도
꽃보다 먼저 찾아와
햇살 푸는 새떼들도
새 속잎 갈아입고
떡잎 슬쩍 밀어내듯
하늘 아직 나직해도
맑은 소리 높이 뜨고
한때는 버리고 싶었던
세월까지 고맙더라
―정표년, 「봄 오면」 전문
이 작품에서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두 수로 구성된 연시조의 첫째 수의 초장과 둘째 수의 종장을 마감하는 “고맙더라”라는 언사다. 국립국어원의 인터넷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더라’는 “해라할 자리에 쓰여, 화자가 과거에 직접 경험하여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그대로 옮겨 와 전달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다. 시인은 이 종결 어미를 동원하여 격의 없는 상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듯 자신의 느낌을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되는 그 멋진 대중가요가 내 마음에 떠올랐던 것은 순전히 ‘-더라’라는 어미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로 시작하여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 밤이면 바느질을 못한다더라”로 이어지는 윤석중의 동요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제 초등학생들은 그런 동요를 배우지 않겠지!) 어디 그뿐이랴. ‘고맙다’는 말은 내 어릴 적에 어른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잘 커 줘 고맙네”와 같은 말까지 떠오르게 했다. 구어체口語體의 말 특유의 친밀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세상사에 대해 흐뭇해하는 마음을 감지케 하는 “고맙더라”라는 언사가 나에게 새삼 정겹게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고맙더라”는 물론 오는 봄을 향한 시인의 마음을 담기 위한 것이다. 시인에게는 봄이 오자 “천천히 몸 일으키는 / 앞산”도, “꽃보다 먼저 찾아와 / 햇살 푸는 새떼들”도 다 고마움의 대상이다. “눈물 나게 고맙더라”에서 과장이 짚이기도 하지만, 시인이 느끼는 감회가 남다르기에 동원한 수사적 표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아무튼, 첫째 수에서 시인에게 고마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시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첫째 수 종장의 “새떼들”은 곧바로 시인을 청각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둘째 수에 이르러 시인은 “새 속잎 갈아입고 / 떡잎 슬쩍 밀어내듯 // 하늘 아직 나직해도” “높이” 뜬 “봄”의 온갖 “맑은 소리”에게 고마움의 마음을 향한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 압권을 이루는 것은 둘째 수의 종장에 담긴 “한때는 버리고 싶었던 / 세월까지 고맙더라”는 시인의 고백이다. 삶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고 맞이하는 봄을 향해 시인이 갖는 흐뭇하고도 환한 마음을 어찌 이보다 더 간명하지만 솔직하고 생생하게 시화詩化할 수 있겠는가. ‘봄에 대한 예찬’이 우리네 인간이 살아가는 ‘삶 자체에 대한 예찬’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정표년의 작품이 보여 주듯, 거듭 되풀이해 말하지만 시조는 자연을 노래하더라도 궁극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노래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현세적인 삶에 대한 노래라는 점이 시조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정립해 놓은 시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나의 소박한 판단이다. 아울러, 인간의 삶을 노래하더라도 시인의 시선이나 시심이 반드시 무겁고 진지한 것 또는 비판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도 나의 생각이다. 정표년의 작품에서 보듯, 때로는 환하고 밝고 들뜬 인간의 마음까지도 담아내야 하는 것이 시조일 것이다.
6. 논의를 마무리하며
아홉 편의 작품에 대한 나의 논의는 주어진 지면 200자 원고지 50매를 넘기고 이제 80매도 넘어섰다. 마땅히 더 이상의 논의는 자제하기로 하자. 하지만 평소에 친숙해 있다거나 기억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 작품들 가운데 더할 수 없이 주옥같은 작품들이 줄곧 눈에 밟힌다. 언제든 기회가 되면 이들 작품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이어가고자 한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
[출처] 시조의 미래를 위하여 / 장경렬|작성자 시조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