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투명해 시리도록 푸르고 높은 가을하늘 밑에 자리 잡고 있는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 지금은 도로가 뚫려 교통상황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외지인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문경의 대표적인 오지마을이다. 문경 가은읍 저음리 속칭 ‘돌마래미’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86년 전인 1620년 함의우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했다.
그 당시에는 인도(人道)가 없고 밤만 되면 마을주변 산에서 멧돼지가 나타나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면서 몹시 울부짖었다 해서 마을이름이 ‘돼지 저(猪)’자와 ‘소리 음(音)’자를 붙여 저음리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갈미봉과 작약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초행길에 산골마을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아 이 마을 담당 공무원인 김태하(39∙가은읍사무소)씨가 길잡이로 따라 나섰다. 저음리 가는 길은 영남팔경 중 으뜸으로 치는 진남교반과 문경의 젖줄인 영강천 상류 마성면 구랑리를 지나간다.
수석(壽石) 동호인이라면 한번쯤은 찾아왔음직한 구랑리 하천에는 까마귀처럼 검은 오석(烏石)이 수천 년 세월 물살에 깎여 빛나는 피부를 자랑하며 반짝인다.
가은읍 철로자전거 간이역에서 좌측으로 꺾어든 뒤 다람쥐들이 뛰어다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20여㎞를 올라가는 좁은 길목은 들어온 곳으로 돌아나가지 않으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동행한 김태하씨는 “저음리는 과거 이 마을 담당 공무원들이 출장오면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갈 정도로 교통이 불편한 전형적인 두메산골이었다”고 전했다.
튼실히 여문 감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려있는 산간지 마을인 저음리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자 이 마을에서 얼마 전까지 10년의 세월동안 이장을 맡아온 김창옥(66)씨를 반긴다.
김씨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낯선 손님을 발견하고는 “이런 산골에 어떻게 찾아오셨는가”하더니 동행한 김태하씨를 발견하고는 얼른 나와 인사를 건넨다.
저음리 마을은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3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살고 있는 주민이래야 김창옥씨 부부를 비롯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는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마당 가운데 놓인 평상에서 손바닥만한 농토에서 나는 보잘것 없는소득으로 부인 박봉룡씨와 살아가면서 2남3녀를 키운 인생역정을 털어 놓는다
“메뚜기 이마 같은 밭에다 옥수수, 감자 농사가 전부였고 쌀밥을 먹은 것이 고작 15여년 됐으니 알만하겠지. 콩, 들깨, 서숙, 땅콩, 감자, 고구마, 파, 옥수수, 감은 물론 봄부터 늦가을까지 틈나는 대로 주변 산에 올라 다래순, 산나물, 버섯 등을 따서 시장에 내다 팔며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어.” 하지만 김씨는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5남매 모두 대학공부시켜 듬직한 사회인으로 키웠으니 헛된 고생은 아니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빈곤했던 예전 삶을 극복한 고생담이 이어지던 중 부인 박씨가 대화에 끼어들자 김씨는 “어허 이 사람이 가서 커피라도 타서 나오지”라며 핀잔을 준다. 서로 티격태격 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듯하다.
김씨는 이어 “태풍이 몰아쳐도 산이 가로막아서 피해가 전혀 없으며 6.25전쟁 당시에도 피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아늑하게 자리 잡은 명당 마을”이라고 마을자랑도 빼 놓지 않았다. 하지만 “저음리가 지난 70년대에는 이웃 마을인 갈전리를 포함해 주민수가 상당해 분교까지 생겼고 99년 폐교되기까지 36년 동안 학생도 102명이나 배출됐지만 지금은 학생은 고사하고 청년 한 명 없는 마을이 됐다”고 씁쓸해 했다.
또 지금까지 오후 7시에 마을로 들어와 오전 7시에 하루 한 차례 출발해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가 끊길 위기에 처해있어 산나물, 콩, 채소 등 가은장날에 내다 팔 농산물 출하를 걱정했다. 순박하고 어진 산골마을 사람 그 자체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산길을 따라 다른 주민들이 사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마을 오솔길은 알아주지 않을세라 어른 키만큼 멀쑥하게 자란 억새풀이 허리를 일렁거리며 가을치장을 했고 마을을 가로막은 산들은 울긋불긋 오색 색동옷을 갈아 입었다.
앞은 갈미봉, 뒤는 작약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토라곤 논 1천여 평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밭이 전부인 저음리는 칼라사진이 아닌 흑백사진을 보는 듯 예전 모습 그대로를 지켜가고 있다. 집집이 방 바닥에 늘려있는 덜 말린 고추와 콩, 부엌 부뚜막과 그을린 천장, 작은 찬장, 헛간은 너무나 정겹다.
이 마을에서 6남매를 키웠는데 이용순(81)할머니와 10년전에 이 마을 이장을 맡아왔던 박상배(73)씨를 만났다. 이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기로 이웃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주민들은 “이 할머니는 17세에 인근 상주시 소재 이안에서 시집와 오늘까지 삼베, 명주, 밭농사 등 한 번도 농사일을 쉬어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할머니는 “자식들은 농사일이 너무 힘들다며 한사코 편히 쉴 것을 바라지만 농사지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즐거움 때문에 죽을 때까지 농사일을 놓을 수가 없다”며 “요즘 들어 귀가 조금 어두울 뿐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아픈 곳은 한 곳도 없다”고 자랑했다.
박상배씨는 “지난 60, 70년대 당시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 겨울철이면 주변 산에 올라 장작 등을 해서 지게에 가득 지고 상주 함창까지 꼬불꼬불 산길을 오가며 나무를 팔았다”며 “당시 장터에 가면 사람들이 나무 값을 깎기 위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팔고 어두운 산길을 허기진 배로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다시 주변 이웃집들을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마을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대부분 주민들이 연세가 많아서 바깥활동을 할 수 없는 노인들과 추석 때 자식들 집에 가서 내려오지 않아 현재 마을에 주민들이 없다는 것이 동행한 김태하씨의 말이다. 자연에 묻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저음리 사람들. 누구하나 할 것 없이 마음 씀씀이나 자연에 순응하고 달관하며 사는 모습들이 마치 선인을 닮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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