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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대 한상대(57회) 국새장 소식
지난 목요일 대한민국 5대 국새장인 한상대 친구가 재경총동창회에 참석하였다. 사실 나는 한상대 친구와 이리초등학교 동창뿐만 아니라 이리남중학교도 동창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의 학창시절 기억 속에는 한상대 친구의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비록 우리는 졸업 후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작년에 한상대 친구가 유명한 대한민국 국새장이 되어 보도를 통하여 그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내가 한상대 친구를 이리남중학교친구들 카페에 친구를 소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한상대 친구가 자기에 대하여 내가 소개한 글을 보고 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모임에서 우리는 서로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직장일이 너무 바빠서 참석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한상대 국새장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10시가 넘어 늦은 시간에 강남역까지 달려가 재경모임 2차 자리에 참석하여 마침내 한상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을 안았다.
그날 만나서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한상대 친구와 같은 반이 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대화중에 한상대 친구가 국새박물관이나 국새관련 공방과 같은 문화시설을 전주에 유치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내 나름대로 왜 국새관련 문화시설이 전주에 유치되어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정리하여 이렇게 둥창회 카페에 올려 여러 동문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한다.
국새 박물관을 전주에 두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1. 국새(國璽, Guksae, state seal)란 무엇인가?
먼저, 국새란 국가적 문서에 사용되는 인장(印章)으로 옛날에는 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였으며, 임금 또는 임금이 지정하는 관원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에 국가의 표상(表象)으로 사용하였다.
둘째, 역대 한반도의 왕조는 중국에서 정통성을 부여받아 왔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가 왕들에게 수여하는 거북이 모양의 국새를 사용하다가, 갑오개혁 이후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한 후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때 만든 것이 1897년 옥새다.
셋째, 고종황제는 조선왕조가 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며 용을 상징물로 해 옥새를 만들었다. 현재 대한민국 국새는 헌법 개정 공포문 전문,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등 외교문서, 훈장증 등 나라의 중요 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2. 전주는 어떤 도시인가?
먼저, 과거 전주가 속해있던 백제는 뛰어난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던 마한 지역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과 고구려의 발달된 금속공예 기술을 받아들여 세련된 금속 조형 문화를 이뤄냈으며,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세기의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 하나만 보더라도 백제는 동아시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속공예 제작기술을 가진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후백제는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북도에서 세웠고, 전라북도를 기반으로 발전했던 나라이다.
둘째,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써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며 조선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하여 전주가 왕실의 뿌리임을 알 수 있고, 경기전에는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 많은 문화유적을 가진 도시다.
셋째, 전주시 교동과·풍남동 일대에는 있는 한옥마을에는 판소리·춤·타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막걸리·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 숙박을 하면서 온돌과 대청 마루 등 한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 등이 있다,
넷째, 몇 년 전 전주시에서는 한옥마을에 마지막 왕손으로 "고종 황제의 손자이며,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황실보존국민연합회 회장을 정착시켜 전주의 역사성과 상징성이 한층 부각되었고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섯째, 전주는 앞으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 문화예술, 관광의 중심도시로 전통과 미래가 함께하는 역동적인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도시다.
3. 국새관련 박물관이나 공방같은 문화시설이 전주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먼저, 국새란 국가적 문서에 사용되는 인장으로, 옛날에는 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역대 한반도의 왕조는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가 왕들에게 수여하는 거북이 모양의 국새를 사용하다가, 고종황제께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한 후 1897년 독자적으로 용을 상징하는 옥새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현재 대한민국 국새는 헌법 개정 공포문 전문,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등 외교문서, 훈장증 등 나라의 중요 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국새는 황실문화와 관련이 있는 유물로서 황실문화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에 유치되어야 하며, 한양(서울)을 제외하고 전주만큼 조선왕실문화와 관련된 문화유적을 가진 지방도시는 없다.
둘째,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써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며 조선 건국 후 전주에 태조어진을 모시고 경기전이라하여 전주가 왕실의 뿌리임을 알 수 있고, 경기전에는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이 있다.
셋째, 전주시 한옥마을에는 전주전통문화센터, 전주전통술박물관,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주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 등이 있다.
넷째, 또한 전주시는 한옥마을에 조선왕조의 혈통을 잇는 왕손(이석)을 정착시켜 전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부각시켜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다섯째, 한옥마을에 거주고 있는 마지막 왕손인 이석 황실보존국민연합회 회장은 1897년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한 후 독자적으로 용을 상징하는 옥새를 만들어 사용하였던 고종 황제의 손자이기 때문에 국새를 전주에 유치하는 것은 그 당위성을 한 층 더해줄 것이다.
여섯째, 과거 전쟁에 진 일본은 천왕을 살려두어 일본 국민들이 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조선은 임금을 모시지 못하고 황실을 폐지하여 국민들을 모을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하여 결국 남북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일곱째, 과거가 없는 국민에게는 꿈도 미래도 없다. 따라서 국새를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전주로 옮김으로써 상징적으로나마 황실문화가 복원돼 많은 관광객이 전주를 찾을 것이며, 국가적으로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바람직한 행동이기도 하다.
여덟째, 우리가 1910년 일본의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병이 조선의 국법과 국제법적으로 불법으로서 원천 무효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것도 을사보호조약에는 고종의 옥새(玉璽) 인장이 찍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을사보호조약은 조선국 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한 조약이었으므로 조선 국내법상이나 국제법상 원천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아홉째, 따라서 국새를 전주로 옮김으로서 전주는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더 많은 문화적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여 우리 역사, 문화예술, 관광의 중심도시로 전통과 미래가 함께하는 역동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열째, 대한민국 제5대 국새장인 한상대 국새장은 우리의 고향 전라북도 출신이고 전주만큼 조선황실문화와 관련된 유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시도 없기 때문에 국새박물관을 다른 지역에 유치하기보다는 현 국새장의 고향인 전주에 유치하는 게 당연할 것 같다.
4. 대한민국 5대 국새장 한상대 씨는 누구인가?
-지난 2011년 정부가 새롭게 제작한 4대 국새가 가짜로 밝혀지면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국새의 위엄과 존귀를 한 방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온 국민의 관심을 국새에 쏠리게 했다. 국새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국가의 이미지가 실추된 이 사건을 두고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국새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한바탕의 소란 뒤에 새로운 국새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국새 제작은 이전과 달랐다. 4대 국새 장인의 사기 행각이 새로운 5대 국새 제작의 투명성을 보장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5대 국새 디자인 공모에는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대학 교수, 인간문화재, 유명 작가 등 우리나라의 쟁쟁한 실력가들뿐만 아니라 명예보다는 자신의 작업에만 열중하던 실력자들도 대거 공모했다. 투명성, 공정성이 보장된다면 한 번 겨뤄볼만 하다는 이유였다. 이변이었다. 숱한 유명 인사들을 물리치고 무명에 가까운 이 지역 출신인 한상대씨가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5대 국새 장인이 됐다. 한상대씨는 한 쌍의 봉황을 구름을 내딛고 앉아 있는 듯, 부드럽지만 역동적인 선으로 형상화해 국새 인뉴(손잡이) 부분의 당선자가 됐다.
한상대 국새장 약력
1960년 이리출생 이리초등학교 57회 졸업 이리남중 12회 졸업 이리농고 졸업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금속공예과 졸업 고궁박물관 소장 삼인검 재현 대한민국 제5대 국새장
5. 국새관련 문화시설을 전주에 유치함으로 인하여 창출할 수 있는 추가적인 부가가치는 무엇인가?
먼저, 국새는 최고의 기술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국보급 유물이다. 국새 장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예술적 감각과 기술을 공증 받은 셈이다. 따라서 국새로 인하여 관련분야인 금관이나 장신구와 같은 금속공예부분에서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째, 비근한 예를 들자면 한상대 국새장은 고궁박물관에 있는 삼인검을 재현한 장인이다. 그는 0.05mm까지 실측하고, 삼인검 재현에서는 굵고 큰 검의 손잡이 제작에서 무쇠의 내부를 전부 손으로 파내는 수작업을 일관하듯이 1인 완성작을 고수한다. 참고로 사람에게 사주가 있듯이 좋은 진검을 만드는데도 좋은 때를 택하여 정기를 받는다. 삼인검 이란 호랑이 인자가 3 개가 들어 있는 때를 말한다. 즉 호랑이 해에, 호랑이 달에, 호랑이 날에 만든 검이다. 사인검 이란 삼인검에 "호랑이 시"를 하나 더 보태진 때에 제작이 된 검을 말한다.
셋째, 세기의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이 백제시대 공방지였다는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며, 공방(工房)이란 물건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작업장이다. 따라서 국새박물관과 공방을 전주에 유치 시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장인들을 집중적으로 길러 내어 전주가 대한민국 금속공예 예술을 주도하면서 전통문화의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이렇게 되면 전주는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의 본향(本鄕)으로서의 위상을 높여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가 금속공예기술을 가진 장인들에게 박사(博士) 칭호와 함께 일정한 벼슬인 관등(官等)을 주었던 것처럼 전주시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장인을 우대하고, 사회적으로 존중하고 대우해 줌으로써 백제문화를 부활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현재 방송국에서 소품으로 사용하는 장식품을 제작하는 일이 많다. 방송사를 가리지 않고, 최근 몇 년 동안 한상대 국새장의 손을 타지 않은 소품이 없을 정도다. 주몽, 선덕여왕, 동이, 이산 등 유명 드라마에서 쓰인 왕관, 비녀, 귀걸이, 검 등이 그가 만든 장식품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국새 또한 궁중에서 쓰였던 물건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매우 다루기 쉬운 소재였다. 또한 한상대씨는 국새장이 됐다고 해서 나태해지거나 자만해지지 않고 작품 활동에 더욱 몰두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으로서 더 훌륭한 그만의 작품의 세계를 개척하여 국새장의 명성을 이어갈 것이다. 끝.
작성자 57회 이화구
【아래 그림】지난 목요일 저녁 재경총동창회에 참석한 한상대 동문 좌로부터 56회 여강현 선배/57회 한상대 동문/57회 이화구 동문
【아래 그림】지난 목요일 저녁 재경총동창회에 참석한 동문 왼편으로부터 64회 이정용 동문/57회 이희옥 재경회장 64회 이정용 동문은 지난 목요일 모임에 처음 참석하였으며, 익산 원광고 출신으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그동안 검사로 봉직하다가 최근에 변호사로 개업한 자랑스런 일출인이다.
【아래 그림】국새는 장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장인 중에서도 장인, 최고의 재료와 최고의 기술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국보급 유물이다.
한상대 동문이 국새 장인이 된 것은 그의 예술적 감각과 기술을 공증 받은 셈이다.
주로 방송국에서 소품으로 사용하는 장식품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방송사를 가리지 않고,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손을 타지 않은 소품이 없을 정도다.
주몽, 선덕여왕, 동이, 이산 등 유명 드라마에서 쓰인 왕관, 비녀, 귀걸이, 검 등이 그가 만든 장식품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국새 또한 궁중에서 쓰였던 물건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매우 다루기 쉬운 소재였다.
【아래 그림】국운의 기운 가득한 봉황
모든 미술 작품이 그렇지만 국새는 조형성과 창작성이 실용적인 면과 함께 강조돼야 한다. 또한 국가의 보물답게 국새에서 품어나는 전통성도 뛰어나야 한다.
【아래 그림】한상대 동문은 봉황에 무궁화와 태극문양을 넣어 나라의 발전과 국운융성, 국민의 화합과 태평성대의 의미를 담았다. 또 봉황의 전통적인 모습과 꼬리, 깃털을 응용해 조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현장에서 배운 기술과 노하우를 적용시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이론이나 명성에만 의존하는 대학교수들의 작품과는 궤를 달리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그의 봉황이 5대 국새로 선정된 이유다. 이론과 현장 실무가 결합해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래 그림】한상대 동문의 설명과 같이 국새에 조각된 봉황은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날개와 꼬리 끝까지 한 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선들이 서로 조화롭게 뭉쳐 하나의 정교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아래 그림】5대 국새로 한상대 동문의 작품을 뽑은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먼저, 봉황의 형태는 기존에 알려진 봉황 문양이나 표현을 참조했지만 제작자 나름대로의 변화와 강조를 적절히 조화시킨 조형성도 잘 표현되었고.
둘째, 쌍봉(雙鳳)의 자세, 날개와 꼬리 부분을 역동성 있게 조각하여 힘 있고 단정하면서도 웅건한 봉황의 느낌을 충실히 표현하였고,
셋째, 쌍봉의 등위로 표현된 만개된 무궁화는 기존의 국새에서 다뤄졌던 상징적 표현에서 벗어나 활짝 핀 구체적인 형태로 국운의 기상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넷째, 전체적으로 조각 기술이 섬세하며, 안정적인 자세의 봉황과 적절히 조화된 생략과 강조의 부분이 잘 표현되어 국새 인뉴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아래 그림】한상대 국새장이 재현하여 만든 삼인검
그는 0.05mm까지 실측하고, 고궁박물관의 삼인검 재현에서는 굵고 큰 검의 손잡이 제작에서 무쇠의 내부를 전부 손으로 파내는 수작업을 일관하듯이 1인 완성작을 고수한다.
사람에게 사주가 있듯이 좋은 진검을 만드는데도 좋은 때를 택하여 정기를 받는다. 삼인검 이란 호랑이 인자가 3 개가 들어 있는 때를 말한다. 즉 호랑이 해에, 호랑이 달에, 호랑이 날에 만든 검이다. 사인검 이란 삼인검에 "호랑이 시"를 하나 더 보태진 때에 제작이 된 검을 말한다.
【아래 그림】한국을 대표하는 장인이 되고 싶다
한상대 동문은 이번에 5대 국새 장인이 되면서 그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당대 최고의 장인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를 그가 획득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상대 친구가 국새 장인이 됐다고 해서 나태해지거나 자만해지지 않고 작품 활동에 더욱 몰두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으로서 더 훌륭한 그만의 작품의 세계를 개척하여 국새장의 명성을 이어가주길 기원해본다.
57회 이화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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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랑스런 선배님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
고생끝에 낙 이라고... 5대국새장 57회 한상대후배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