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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주의 스크랩 성령과 병 고침 (박영돈 교수님)
한아름 추천 0 조회 127 12.09.18 23:1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성령과 병 고침 (박영돈 교수님) | 성령

777bka 2008.12.19 19:22   http://blog.daum.net/altcosmos/8553358

 

 

 

http://club.cyworld.com/5107032912/115661038 에서 퍼옵니다

성령과 병 고침

개혁교회에서는 치유의 신학이 부재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치유사역은 매우 중요한 사역인데, 이에 대한 신학적 연구와 고찰이 너무 부진했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혼란이 빚어졌다. 전통적 치유에 대한 견해도 교정해야 하고, 바른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시급하다. 오늘 세부적으로 다루지는 못하지만 치유에 대한 기본적인 부분을 짚으려고 한다.

내가 박사학위 최종시험을 치는데 개핀이 심사를 했다. 개핀은 워필드의 은사정지론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다. 박사 심사를 할 때에 개핀이 기적에 대해 묻길래 “사도시대와 어느 정도 구별될 필요는 있지만,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가만히 있었다. 개핀, 워필드, 조나단 에드워즈도 은사중지론 주장. *

1. 신약 성경에 나타난 치유 기적

1) 예수의 치유 기적

사 35:5-6 ; 61:1-2 - 예수님의 치유기적은 구약적 배경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말에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메시야 시대가 도래할 것을 대망했다. Time of Messiah is time of healing liberation(선지자가 대망한 종말의 메시야시대는 해방의 시대, 치유의 시대이다). 예수님은 이런 종말론적 기대와 소망을 실현시키는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셨다.

눅 4:18-21 - 예수님은 눅 4:18-21에서 이런 구약적 소망을 인용하시면서 당신의 사역의 특성을 설명하셨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병자를 고치는 것은 이 땅 위에서 사단의 세력이 물러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표적이다. 예수님 치유의 사건은 종말론적 통치와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나라에 수반되는 종말론적인 회복과 구원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고 이 복음의 내용(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종말론적인 구원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은 복음만 전하신 것이 아니고,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 안에서 이뤄지는 사인으로서 이적을 행하셨다. 주님의 메시야 사역의 일부가 치유 사역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 영육간의 온전한 구원, 전인적인 구원이다. 주님의 인간 이해는 히브리적인 전인적 인간이해이다. 종말론적 통치가 임했을 때 우리가 맛보게 될 종말론적 구원과 회복의 특성은 전인적인 치유이다. 그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천국복음 전파와 병 고침 두 가지를 명령하셨다(눅 9:2, 10:9). 여기서는 복음 사역과 병 고침을 분리하지 않고 복음 사역의 일환으로 본다.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회복과 치유가 임했다는 구체적인 나타남으로서 이런 치유의 기적을 행하라고 하셨다.

2) 사도들의 치유사역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패턴과 사도들의 복음 사역의 평행이 나타난다. 누가가 그 점을 강조한다. 또한 베드로와 바울의 복음 사역이 비슷하게 평행을 이룬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패턴이 사도들에게도 이어진다.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앉은뱅이 고쳤으며, 바울도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쳤다. 누가는 이 사도들의 치유사역을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어느 정도 평행을 이루도록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베드로와 바울의 치유 사역은 온전히 이 패턴을 평형을 이루도록 기록하고 있다.

? 사도행전 평행구

베드로
바울

3:1-10 : 성전에서 앉은뱅이 일으킴

5:15 :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5:16 : 와서 다 나음을 얻음

9:36-40 : 죽은 도르가 살림
14:8-10 :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 일으킴

19:11-12 :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로 병든 자를

28:8-9 : 멜리데 섬 사람들 고침

20:7-12 : 드로아에서 유두고 살림

사도의 치유도 사도적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사람의 전인을 온전하게 만드는 전인적인 치유였다. 이것은 분명하게 입증하는 사역이다.

3) 연속성과 구별성

그러나 이런 예수님과 사도들의 치유사역과 오늘날 교회의 치유의 연속성과 구별성을 이해해야 한다.

? 동일성, 연속성 -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치유기적은 복음의 진정성의 표적이며, 사도들의 기적도 사도들의 복음의 진정성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B. B. 워필드는 더 이상 그런 기적적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사인이며 회복의 구체적 표현이다. 만약 그 치유 기적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면, 그리고 종말론적 회복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치유 기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현재적인 reality가 임했다는 징표요, 종말론적 회복의 일부라면 지금도 존속되어야 한다. 이런 연속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어느 정도의 기적의 구별성도 생각해야 한다.

? 구별성, 불연속성 - 예수님 복음사역은 어떻게 보면 unique한 면이 있다. 치유 기적을 통해서 복음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 신적 존재,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에서 주장하는 바요, 워필드의 주장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견해도 성경적 근거 위에 있다.

전통적 신학자들은 기적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는데(구별성만 강조), 현대 신학자들은 또 그것을 부인한다(연결성만 강조). 우리는 이 둘을 다 잘 연결시켜야 한다.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은 우주의 왕이심을 나타낸다. 그런 점은 모방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의 구체적 표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사인이라는 연속성이 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일으키시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죄 사함의 권세가 자기에게도 있음 강조하셨고, “나를 믿을 수 없으면 내가 행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다.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다. 사도들의 복음사역도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은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한 교회의 기초요, 복음의 사역과 메시지를 입증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따라서 구원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의 특수성과 우리 교회의 사역의 특수성을 인정함으로 어느 정도 구별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터는 한번만 닦으면 되는 것이니까.

따라서 지금 그 누구도 예수님과 똑같은 정도의 치유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완전하고 즉각적이었다. 완전한 치유의 기적은 예수님만 행하심으로써 그 자체가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성령에 전적으로 사로잡히신 분임을 입증한다.

교회 시대와 사도시대의 기적의 연속성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인 실체를 증거하는 징표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 우리에게 임한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며, 병의 치유함은 종말론적 회복의 한 단면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 내용의 구체적인 나타남이요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치유 사역은 지금도 연속된다. 불연속성은 동시에 예수님의 치유기적은 예수님의 메시야이심과 신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사도들은 규범적이고 권위적인 사역을 입증한다는 면에서 지금과 구별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확대될 수 있도록 하신 하나의 밀알로서의 사역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밀알이 떨어져서 하나님 나라가 확대되는 데 있어 제일 첫 기초를 세우는 역할을 했다.

교회는 이 기초 위에 점점 세워져 가는 건물이다.

그림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seed로서 사역하셨다(unique). 사도들은 교회의 foundation을 세우고, 교회는 build하는 것.

2. 교회 역사속의 치유기적

1) 초대교회

Irenaeus, Tertullian, Origen - 오리겐은,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미래를 예언했다. 많은 자들이 인간이나 귀신에 의해 치유될 수 없는 정신질환과 여러 가지 질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을 목격했다”라고 기록했다. Irenaeus, Tertullian 등도 실제로 병 고치는 사역을 했다고 한다.

Justin Martyr, Polycarp -

Basil, Gregory of Nyssa - AD 313년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는 제도화되고 형식화되면서 이런 영적 은사가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교회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에서는 Basil, Gregory of Nyssa 같은 대 감독들에 의해서 치유사역이 강조되고 계속되었다.

Augustine -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Augustine은 그의 초기 저서에는 “병 고침의 은사는 오직 1세기만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기적적 치유를 바라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그의 말년 424년에 『신의 도성』의 마지막 부분을 저술하면서 그 당시 자신이 살던 히포에서만 70건의 기적적인 이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음으로써 후대에 전달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그 후 어거스틴은 죽기 3년 전에 그의 책에서 초기 견해를 수정했다.

2) 중세 교회와 종교 개혁

중세에는 전반적으로 영적으로 침체했기에 다이내믹한 역사들이 많이 있지 않았다. 간혹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나 특별한 신앙인물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 중세교회 -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병 치유사역을 하기보다 오히려 치유사역을 제도권 안으로, 예식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성례전을 통한 치유사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유 은혜는 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수된다는 입장이다.

? Martin Luther -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로마가톨릭의 입장을 개혁했다. 성령의 은혜는 자유롭게 인격 안에서 말씀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전통은 성령의 은사를 너무 말씀의 사역에만 국한시키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기적적 은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예수의 구속사역이 진행될 동안, 성경의 정경이 기록될 때까지만’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가 개신교 안에 고정된 견해로 자리 잡았다. 루터는, “참된 기적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루터도 어거스틴처럼 그의 생애 말년에 그의 제자 멜랑톤이 죽기 일보 직전에 자기의 기도로 고침 받는 것을 보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 후 5년 후 루터는 죽기 얼마 전에 야고보서에 근거해서 치유사역의 지침서를 남겼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새로운 발견을 통한 확신과 믿음을 신학화 하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개신교의 치유사역의 견해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 John Calvin - 칼빈도 치유사역은 성경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질병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이 치유를 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질병을 하나님이 영적 유익을 위해 주시는 징계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견해가 은사중지를 말한 워필드와 함께 개신교의 견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도 일리는 있다. 하나님은 영적 성숙을 위해 질병도 사용하신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질병을 징계의 방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에 더 영적이 되고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꼭 질병이나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고정개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칼빈을 가리켜 ‘종합병원’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 후예들도 그처럼 종합병원이 되어야 거룩해지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다. 일리는 있지만 질병의 근본문제를 제대로 간파한 것은 아니다. 병은 죄와 사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단이 창조의 정상적인 질서를 와해시키고 일그러뜨린 것이다. 죄와 사단에 의해 파괴된 것을 하나님은 바로 잡아주신다. 죄가 병을 주고 사단이 병을 가져온다면, 하나님은 치유해주신다.

3) 청교도 전통

청교도도 대체로 칼빈을 따라 치유기적이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스펄젼도 이런 입장을 취했다. 그의 목회와 사역을 통해 많은 교인들이 병의 치유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그의 설교에도 그런 언급이 없고 치유사역에 대한 어떤 긍정적 견해를 피력한 말도 없다. 한편 스펄젼은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완전히 영적으로만 해석했다. “열두 해 혈류병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것처럼, 우리도 그 여인처럼 예수께 나아가 옷깃을 잡으면 영혼이 즉시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말했다. 조나단 에드워드도, 로이드 존스도 이 은사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4) Holiness - Keswick - Pentecostal Movement

치유은사에 관심을 부각시킨 사람들은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이다. 여기에 그들의 기여도가 있다.
A. J. Gordon, A. B. Simpson, Andrew Murray - Keswick을 주도했던 A. J. Gordon, A. B. Simpson, Andrew Murray은 치유기적과 은사에 대한 책을 남겼고, 실제 그들의 사역에서 이런 치유를 강조하는 사역을 실천했다. 특히 20세기 오순절 운동에서 성령의 은사와 치유를 강조함으로 치유사역을 부흥시켰다. 이는 오순절의 공헌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자들에게서도 배우고,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 스펄젼에게서도 배우는데, 다 나름대로 아직도 보완되어야 할 점들을 안고 있다. 이들은 다 치유의 사역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강조하지 못했다. 우리는 개혁주의자들의 핵심 신앙과 신학을 배우지만, 더 나아가서 오순절 운동에서도 지금까지 우리가 바로 이해하고 강조하지 못한 부분을 바로 강조한 것을 배우고 도전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오순절 운동의 여파로 치유사역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faith-healer Movement”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도 일어났으나, 유명한 Kathryn Kuhlman같은 여사도 등장했다. 각 교파에서 치유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성공회에서는 Agnes Sanford가 활발하게 사역하고, 가톨릭에서는 Francis MacNutt이 이 사역을 다이내믹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개혁교회가 도전을 받아야 한다. 빈야드 교회의 John Wimber, 풀러의 Peter Wagner, Charles Kraft, 정신과 의사 John White 등도 이 사역을 한다.

3. 오늘날의 치유기적을 이해하는데 고려해야 할 점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이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연속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꼭 고려해야 하는 점들이 있다. 어떤 점을 염두 해 두어야 하나?

1) 교회의 발전 단계

치유기적은 특별히 하나님 나라가 처음 임하는 표징의 성경을 띄었다. 초대교회의 상황 속에서 많이 일어났고, 그처럼 어떤 지역에 복음이 처음 소개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사인으로서의 치유의 기적이 빈번한 경우가 있다. 지금도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선교지에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초대교회와 유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교회역사에서 이것이 되풀이되고 있다. 1910년 이후에 김익두 목사님이 많은 치유기적을 행했다. 20년도에 영남지역에서 병자들이 집단으로 치유 받는 사례도 있었다. 21년에 황해노회에서 이런 기적적인 치유가 과연 사실인가를 밝히기 위해 치유사건을 자세히 조사해서 ‘조선예수교회 기적증명서’를 펴냈다. 아직도 남아 있다. 그분은 부흥집회를 일주일간 금식하면서 인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간절히 매달리니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도 다른 선교지에서도 많이 보도되고 있다. 피터 와그너 책에 보면,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그 지역의 나쁜 음식 때문에 원주민들의 이가 다 빠져버리고 잇몸도 없어져서 회생불가능이었는데 이가 다시 생기는 기적이 있었다고 한다. 맬 테니라는 인도네시아 전도자의 『급하고 강한 바람』에는 죽은 사람이 여러 명 살아나기도 했다고 한다. 전도팀이 어느 지역에 갔는데 초상이 난지 이틀이 되어서 시체가 썩고 있는데 그 앞에서 하나님께서 찬양을 하라는 감동을 하셔서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다섯 번째까지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여섯 번째 찬송을 부르는데 시체의 발가락이 움직였다. 인도네시아에는 속담에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벌떡 일어나서 옆 사람을 같이 껴안고 죽는다는 얘기가 있어 다들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그 다음 찬송을 부르자 시체가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2만 1천 명이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또 장마 속에서 전도를 하는데 앞으로 10발자국, 뒤로 10발자국 비를 안 맞게 해 주셔서 전도를 했다는 기적도 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세워지고 제도적으로 안정되고 자리를 잡으면 치유 기적의 빈번성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를 성령의 역사가 약화되었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미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이미 누리고 있기에 더 이상 그 사인(sign)이 자주 필요하지 않다고 주님이 보시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적보다 말씀을 의지하도록 하는 섭리가 아닐까?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기적이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게 하는 섭리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교회가 정상적으로 자라는 환경에서도, 말씀을 통해서 새창조의 역사, 전인을 회복하는 역사를 일으키실 수도 있다.

바울도 새로운 지역에서 선교할 때는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세워지고 직분자들이 있고 교회가 자리를 잡으면 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는 웬만해서 기적적 은사를 강조하지 않고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존 교회 신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누리기에 새로운 사인으로서의 기적이 빈번하게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미 실체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그렇게 필요 없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인도하시려 한다. 우리들의 약점은 이적에 너무 많이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적을 막으시는 경우가 있다.

어떤 목사님은 한국에서 사역할 때는 치유가 없었는데, 선교지에서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한국에서 사역을 했는데,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고백도 했다.

2) 사회 문화적 요소

사회적, 시대적, 문화적 변천을 고려해야 한다. 병 고침의 이적이 과거 의술이 발달되기 전과 현대의술이 발달된 상황과는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의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예방접종도 없고 전염병에 다 죽었다. 지금은 간단한 수술에 해결할 수 있는 급성맹장염에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지금 의술이 발달된 상황에 살면서 맹장염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고 기적만 바라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현대의술의 발달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신학자는 크리스천 의사가 행하는 의술도 어떻게 보면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의 의료행위는 안수기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그런 의료행위를 한다면 그것이 은사 아닐까? 엄밀하게는 은사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또한 장소에 따라서 은사의 나타남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도 현대 의술을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선교지에서는 좀 더 하나님의 기적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외딴 곳에 여행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을 바랄 수 있다. 시대의 변천과 문화적 상황과 장소 등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피터 와그너가 증거한 것처럼, 의술이 전혀 발달되지 않은 곳에서 생니가 다시 난다든가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지금도 병고침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적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의술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온전한 치유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도 구해야 한다.

[예화] 병자 생활의 서러움... 박 교수님이 눈이 아팠을 때.

3) 교회의 영적인 상태

칼빈은 초대교회에 빈번했던 은사의 풍성함이 없어지고 우리 시대에는 그 은혜의 빈곤과 결핍을 느끼는 이유가 영적인 타락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망은의 형벌’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너무 단순 논리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현대교회의 은사의 빈번성이 감소하는 이유는 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지적처럼 ‘우리의 모습’이 고갈의 이유 중 하나이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신앙이 형식화, 제도화될 때 다이내믹한 은사가 잘 나타나지 않았다. 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회복할 때 강력한 역사가 나타났다. 손양원 목사님 자서전을 보면, 남쪽 어느 지역에서 말씀만을 전하고 있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떴다고 한다. 너무 좋아서 “내가 눈 떴어요...”라고 소리 질렀는데, “거기 좀 조용해 주쇼. 설교 좀 하게... 당신이 눈 뜬 것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요...” 겸손하셔. 말씀이 강력하게 증거되면 하나의 side effect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깊이 회개하고 우리 삶을 회복할 때 질병에서 놓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의의 병기로 살지 않고, 죄에 자꾸 몸을 방임하는 삶을 살아 우리 몸이 죄악에 물들어가니 약해지고 육적 곤고함에 빠진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회복하며 의의 병기로 바쳐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면 병이 낫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신명기의 말씀처럼 육신을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기 때문에 몹쓸 병과 염병에 걸려서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깊이 회개해서 영적으로 회복하고 부흥이 일어나면 병 고침의 역사도 많이 일어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몸이 약해지고 병이 날 수 있다.
우리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릴 때에나, 개인적으로 회개할 때에나, 영적으로 회복할 때, 병에서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

4) 종말론적 관점

already와 not-yet의 균형 아래서 치유 사역을 이해해야 한다. 치유의 기적은 종말론적인 치유의 한 부분이다. 성령 안에서 종말론적인 치유를 이미 맛보게 된 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육체도 강건해지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이 종말론적 구원과 회복, 치유는 종말의 때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이미 실현된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온전한 의미에서 우리들의 육체의 완전한 회복은 종말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다. 죄로 인해서 늙고 약해지고 병드는 것은 정상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할머니가 주름살 안 생기나? 그것은 죽어가는 죄악의 육체를 입고 있기에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already만 너무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일부 오순절 교회의 강조처럼 영광의 신학, 번역 신학으로 나타난다. 너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면 아직 우리가 육체에 있어서 죄악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것을 균형 있게 강조하지 못한다. 이런 신학은 믿음이 있으면 병 고침 다 받는다고 해서 고침 받지 못했을 때 신자를 낙심케 하고 자책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not-yet aspect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질병을 간혹 우리를 바로 잡는 교정의 ‘징계 수단’으로도 사용하시고, 영적 성숙의 ‘성화의 방편’으로도 사용하신다. 징계의 방편으로 사용하실 때는 우리가 온전히 회개하고 삶을 개혁하면 징계의 의미가 실현되었기에 징계의 방편을 서서히 거두어 가신다. 성화의 방편으로 사용하시면 우리가 점점 영적으로 성숙해짐에 따라 그 목적이 이루어졌기에 질병을 거두어 가실 경우가 많이 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생명력이 있으므로 치유가 일어날 수 있지만, 마지막 구원은 종말의 때이기에 우리 안에서 종말론적 소망이 심화되어간다.

또한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기도 하지만, 보류하시고 지연하심으로써 특별한 뜻을 이루기도 하킴? 그러나 보수교회는 너무 십자가의 신학, 약함의 신학을 강조해 왔다. 그러면 패배의식, 영육 이원론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은 영혼의 문제에는 능히 해결하시지만, 육체의 문제는 해결하시지 못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병원과 의사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암묵적인 영육 이원론에 많은 신자들이 빠져있다. 우리의 메시지도 은연중에 그것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다. 가장 중요한 기적은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게 된다. 기적이 일어날 것을 바라지도 않고, 일어나면 겁나고 놀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그냥 일어나지 않음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생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간혹 육체적 치유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구원은 언제나 전인적인 구원이다. 물론 육체의 완전한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우리들의 어떤 경건주의적 개념도 교정이 필요하다. 칼빈은 “병 고침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보다 그 질병을 감수하는 태도가 더욱 성숙한 태도다”라고 했다. 맞다. 그러나 그렇게 은혜스럽게 사용하실 대가 있으나 일면으로만 보아선 안 된다. 왜 우리를 기적적으로 치유함으로써 사랑을 나타내시기보다, 인내하는 은혜를 주심으로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신다고만 생각하나? 왜 직접적으로 치료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광스러운 능력을 나타내신다고는 얘기하지 않는가? 간혹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던 문제를 해결하셔서 구체적인 사랑을 나타내시고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케 하신다. 그럴 때 우리 신자는 매일 기적을 바라지는 않지만 신앙이 깊어지고 헌신과 사랑이 더욱 뜨거워질 수 있다. 항상 고정적이고 전통적 개념으로 치유를 이해하면 믿음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워필드는 중지되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는가? 믿음을 바로 세우자. 믿음으로 구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사역을 할 때에도 우리의 육체가 은혜에 젖어야 한다. 마음은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몸은 자기 쾌락을 위해 살아간다고 하면 곤란하다.

세계적인 치유 사역자도 말하기를 “내가 기도한 사람 중에 25%는 완전히 나았고, 25%는 조금만 남았고, 50%는 전혀 안 나았다. 그리고 완전히 나은 사람 중에 불치의 병에서 나은 사람은 적고, 대개 의술이 고칠 수 있는 병들이 나았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4. 치유사역의 위험성

1) 영광의 신학

너무나 긍정적인 측면만 일방적으로 강조한다. 믿음이 있으면 병고침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또 어떤 사람은 죄 사함과 치유를 직결시켜버려서 죄 사함의 일부로 꼭 육체적 치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잘못되었다. 이런 신학은 not-yet을 강조함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조율할 필요가 있겠다.

질병과 약함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사람의 보편적 특성이다. 교인들을 보면 누구나 육체적인 문제는 갖고 있다. 죽고 나서야 온전해진 몸을 다시 입게 될 것이다.

또한 치유의 능력을 보류하는 경우도 있다. 성화의 방편이나 징계의 방편으로 사용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 다른 목적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무조건 믿음이 없다거나, 하나님은 꼭 고쳐주실 것이라거나 말하면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병이 안 고쳐지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

바울도 평생 약함이나 질병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스펄전 목사는 40이 넘었을 때 뼈가 응고되는 질병에 걸렸다.

우리는 균형을 강조해야 한다.

2) 말씀보다 이적에 더 치중함

신비주의, 이적주의에 빠지기 쉽다. 인간은 신기하고 기적적인 것에 대한 생래적인 호기심이 있다. 말씀과 기적 두 가지를 제시하면 교인들은 기적적이고 센세이션한 것들을 더 추구한다. 더 자극적인 이적을 추구한다. 그러면 말씀의 은혜를 발견할 수 없다. 믿음이 없는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이 시대에는 복음 설교로 진리를 알려주시는데, 자꾸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면 안 된?

요즘은 금이빨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목회자 400명 중에 150명 정도 나오라고 해서, 30% 45명이 금이빨로 변했다고 하고 주로 아말감으로 씌운 것이 금이빨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분, 미혹의 영에 홀리지 말고 조심하라. 금이빨로 바뀐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님은 기적을 아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가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마구 깨뜨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멀쩡한 이빨을 왜 금이빨로 바꾸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상적이고 보통적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비상하고 기적적인 일들 속에서만 은혜를 발견하는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 치유사역을 복음 사역의 일환으로써 말씀 사역의 바탕 위에서 시행하지 않으면 자칫 아주 잘못되게 이용될 수 있다. 치유사역을 말씀사역보다 앞세워서 치유를 강조하면 큰 혼란과 문제를 야기한다. 치유사역은 말씀사역의 통제를 받으며 말씀사역의 일환으로 사역해야 한다.

3) 교회 부흥의 수단화

많은 교역자들이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이를 강조하고 성공의 방편으로 강조하는데,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기의 말씀사역이 부진한 것을 메우려고 하거나, 말씀사역을 등한히 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것도 잘못이다. 자기의 권위가 세워지고 자기의 능력이 과시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천국고약을 파는 사람도 있다. 성령의 성형수술을 말하기도 한다. 신종 사기꾼이다.

4) 무질서와 혼돈

이 은사가 나타나는 이들이 교회를 위해서 건전하게 사용하지 않고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치유선교회를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데, 자기가 물에다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고는 그 물로 밀가루 반죽해서 천국 고약이라고 팔아먹어. 얼마나 부작용이 많은지 모른다. 여기에 전통교회도 책임이 있다. 전통교회가 바른 치유신학을 정립하지 못했다. 모델을 보이지 못하니 음성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 가지 혼란과 무질서를 보고 이 치유사역에 대해 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5. 치유사역의 필요성

1)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실체가 임했다는 사인

그 안에서 종말론적 회복과 구원이 임하는 전인적인 구원. 영육간의 wholeness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죄로 파괴되고 일그러진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새창조의 역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일어나기에 죄로 일그러진 창조의 질서가 우리 안에서 회복, 소생되는 사인으로서 지금도 존속되어야 한다.

2) 복음전도와 선교에 필수적

바울은 자기 전도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나의 전도함이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있다”고 했다. power evangelism이 필요하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능력으로 재현되어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지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역사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지 않고는 전도가 안 된다고 한다.

어느 낙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터줏대감이 실제 신들린 여자였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마음대로 귀신을 잡아넣었다고 뺐다 하는 사람이었다. 귀신이 들어가면 거품을 물고 온갖 이상한 짓을 하고, 그러다가 사명을 다 한 다음 귀신을 빼면 눈이 뒤집히고... 그런 신들린 여인의 귀신의 세력을 정복해야 한다. 가장 권위 있는 여자보다 더 권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능력 대결(power encounter)를 보여주어야 할 때가 있다. 거기 전도하려면 무당 할머니의 능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능력 대결이다.

인도네시아에 보수신학을 공부한 멜 테리가 들어갔는데 처음에 이 문제에 부딪혔다. “무당이 굿하면 30분 후에 고침 받고 우리 사역을 도와주는데, 과연 ‘내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하는데 도전을 받았다. 그 때부터 치유사역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께 구하게 되었다.”

3) 현대세속주의의 세계관 때문

기적은 새창조의 사인이다.

현대인들은 초자연적인 세계관에 대해 폐쇄된 세계관을 갖고 있다. 보수주의까지도 은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고착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세계관에 젖어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과 역사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너무 팽배해 있다. 교인들도 기적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실제로 자기 앞에 일어날 수 있다고 열어놓지 않는다. 이런 상황, 세속주의 세계관을 뒤집고 인간의 교만한 생각을 때려 부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이것이 없이는 능력 있는 전도를 하지 못한다.

현대 세계는 망가진 세계이다. 그것을 원래의 세계로 돌이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적 사건이다. 하나님이 비정상적인 세상의 상태를 원래의 사건으로 돌이키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몰트만은 말했다.

윌리엄 제임스라는 종교철학자는 현대인들이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서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보수교회까지 이런 세속주의에 가세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기적이 필요하다.

4) 과학과 의학의 도전

과학과 의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처럼 오만한 주장, 헛된 믿음을 주고 있다. 그들은 사실 너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메시야로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과학을 의존하나?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하심을 의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현대에는 이런 과학이나 의학이 새로운 우상이다. 하나님의 라이벌, 메시야로 부상하기에 이런 하나님에 대한 현대의 우상을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된 메시야, 부활의 능력임을 증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이런 이적이 필요하다.

5) 하나님 체험

이런 기적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심, 통치하심, 구체적으로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손길을 real하게 체험하게 된다. 지금은 어찌 보면 과거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모르는 세대가 일어나고 있다.

이론으로 들어서 알지만 하나님의 실재, 파워, 사랑을 실제로 전인적으로 체험적으로 맛보고 접하지 못한 세대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세대가 전인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통치를 체험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신앙이 달라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현장이며 사역의 연장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이제 과거에 육체로 역사하셨으나, 지금은 교회라는 외형적인 수단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과거에도 육체로 만나주신 것처럼,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부활의 주님이 역사하셔서 그의 사역을 계속 우리 안에 연장, 확대하신다.

6) 그리스도 사역의 연장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라는 몸을 통해서 당신의 사역을 하신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는데, 이는 의미가 많다. 현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나쁜 상태다. 그래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회복시키신다는 의미가 있다. 안식일, 주일, 안식을 기념하는 날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주일에 설교하면서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야 한다.

6. 치유사역의 성경적 지침

1) 병 고침의 은사 활용

은사가 있는 자들은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겸손하게 교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평신도는 목사의 지도 하에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기 쉽다. 이름 과시, 돈, 자기 영광을 추구하거나, 목사의 감독 하에 자기를 감추지 않으면 이 은사 때문에 망한다. 이것이 일부 오순절 교회의 극단 오류인 반면, 보수측은 은사를 주셨는데 이것을 소멸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어떤 목사님은 이 은사를 거두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다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계발해서 잘 활용하도록 격려하고 지도할 필요가 있다.
목사가 이런 은사가 있으면 오히려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한다.
특히 부흥의 돌파구로 이런 은사를 사용하면 안 된다. 과시용으로 사용하면 더더욱 안 된다.

2) 목사의 기도

약 5:14-8에 치유사역의 지침이 있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나의 인격과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특권과 은사를 활용해서 손들고 기도하라. 믿음의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이 장애가 된다. ‘내가 기도했다가 안 고쳐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 한다. 명령하신 것이다.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라. 피터 와그너는 1년 동안 치유 사역을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년 후부터 매주 50-100명씩 고침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3) 중보기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이동원 목사님이 중보기도팀을 만들어 교인들이 서로 기도하자 치유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중보기도는 구체적인 사랑의 방편이다. 그 모습이 참으로 하나님께 아름답고 귀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별로 역사가 없는데,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은사가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교회에서도 수련회 가서 치유 수련회를 가지고 기도 제목을 다 내놓고 함께 기도했는데, 몇 명이 나았다. 깜짝 놀랐다. 안수 안 해도 된다.

피터 와그너가 말하기를 1년 동안 한 번도 사역이 안 일어나다가 1년 후에 매주 4-50명 치유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4) 기도의 내용과 형태

많은 경우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할 때 “만일 고침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면 고쳐주소서”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주권을 믿는 기도 같지만, 믿음의 결여와 의심의 요소가 많이 깃들어 있다. 이런 식의 기도는 많은 경우에 주님이 역하사지 않는다고 치유사역자들이 얘기한다. 특별한 뜻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뜻을 따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고쳐주소서. 당신의 사심과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맡깁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고쳐주소서” 먼저 회개의 기도를 하라. 내 몸을 온전히 의의 병기로 드리지 못하고 죄의 병기로 산 것 회개하라. 그리고 “고쳐 주옵소서. 영육의 강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광스러운 임재를 맛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

→ 배움을 근거로 해서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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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6.30 23:22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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