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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식
시인의 서재에서
세 번째 시집을 상재하던 날 그 시집 얼굴을 책꽂이 칸막이 나무액자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영정 사진도 아닌데 큰 절을 세 번씩이나 하였다는 선배 시인은 하도 기쁘고 신기하고 또 이승이 아닌듯하여 눈가를 훔쳤지만 그 투명한 눈물자락이 손목 인대를 타고 흐르기에 다시 제 뺨을 부리나케 후려갈긴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제야 자신이 시인됨을 깨달았다고 무릎을 쳤다는데,
오늘 대낮 그 시인의 서재에서 나와 벗과 셋이 둘러앉아 송엽주를 돌리다가 그가 문득 나의 눈 속으로 들어와 하는 말이 “박 군은 너무 늦깎이로 등단한 만큼 모든 걸 내려놓고 두 해 동안 오직 시만 쓰라” 충고 하시니 내 몸이 역신이 든 듯 부르르 떨리어 방바닥에 두 손을 짚고 일어서던 찰나에 어디서 날아든 한 마리 산새가 통유리창에 머리를 박아버리니, 순간 창에 빛이 일고 서재는 고요해지고 ……
다시 제 몸을 추슬러 창공으로 돌아가는 그 이름 모를 새의 날갯짓을 나는 오래도록 놓질 않았다
꽃잎 몇 장
허리를 숙여서 담장 아래 봉숭아 꽃잎을 줍는다 두 손가락 끝은 물들고 한 손바닥은 붉다 꽃잎이 떨어지지 않게 손을 오므리고 서너 걸음 돌아서서 걷는다 손금마다 그새 붉은 길이 패었는지 간지럽다 오래 볼수록 눈이 어지럽고 얼굴은 화끈거려도 손을 꼬옥 쥐어 꽃잎을 감출 수 없는 것은 내가 어둡기 때문이다 흰 종이 위에 꽃잎을 내려놓고 들여다보는데 묽은 코피가 떨어졌는지 꽃잎이 앉은 자리마다 불그스름하게 울고 창과 벽과 천장과 어둔 구석, 눈을 주는 모든 곳이 환해진다 잠깐이지만 나는 이토록 방안에서 황홀을 즐겼으나 밖으로 나와 보니 천지가 어둡다 불과 열두서너 장 꽃잎을 거둬들인 것뿐인데 나의 죄가 컸구나
박노식 2015년 《유심》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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