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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도량 道悟禪院 도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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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사찰기행 스크랩 순천 송광사, 승보사찰,효봉스님,구산스님,법정스님,
대선大仙 추천 0 조회 632 13.05.13 13: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송광사.(松廣寺)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승려 취봉(翠峰)·금당(錦堂)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禪修行)의 도량이며, 조계총림(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본사 승보종찰 송광사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로 세 가지를 들고있다. 그래서 삼보(三寶)라고 한다. 그 세가지는 부처님(佛), 가르침(法), 승가(僧)이다. 불교인의 신앙은 바로 이 세가지 보배를 값지고 귀한 것으로 알고 그에 귀의해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에 눈뜬 사람으로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깨친 다음 우리를 위해 설하셨던 내용으로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끝으로 승가는 스님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를 가리킨다. 실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가를 통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오고있다. 이렇게 보면 부처님은 진리의 길을 먼저 걸어 깨치셨던 분으로 그 길을 우리들에게 친절히 가리켜 주시는 길잡이(導師)요, 가르침은 그 길을 표시하고 있는 지도나 이정표와 같고, 승가는 진리의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보배인 삼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내면화되어 바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참마음을 가리킨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계신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 승가를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 진리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으며 우리들 존재의 원천인 본래의 나, 참 나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값이 없는 보배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불교의 신앙은 바로 그 보배를 향해 가는 것이다.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승가에 귀의 합니다 하는 이른바 삼귀의(三歸依)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 보다도 보배롭고 소중한 세가지 보배를 향해 내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의지의 표현이 삼귀의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하는 말은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고백하는 서원이요 다짐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요소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곧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승맥을 이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 사실에 연유한다. 첫제는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전 고려 때 보조 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그 근본도량(根本道場)이 바로 송광사였다. 다른 하나는 지눌 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에서 열다섯명의 국사들이 출현하여 지눌과 함께 모두 열여섯명의 국사(十六國師)가 나와 한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야말로 한국 불교 전통의 산실이요 또 그 전통을 잇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효봉선사(曉峰禪師); (1888∼1966)

                                   

 

수안이씨. 속명은 찬형(燦亨). 법호는 효봉(曉峰). 평안남도 양덕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 출신. 아버지는 병억(炳億)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밑 에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10년 동안 법조계에 투신하여 서울과 함흥의 지방 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에 직책상 한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인다는데 회의를 느껴“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법관직을 팽개치고 집을 나와 전국방랑의 길에 올랐다. 엿판 하나를 들고 3년 동안 참회와 고행의 길을 걷다가 1925년 여름 금강산에 이르러 출가 수도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신계사(神溪寺) 보운암 (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을 찾아 간단한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머리를 깎고 5계(戒)를 받았다.

효봉스님이 석두화상을 뵈올때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벌떡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으면서) 이렇게 왔습니다."

38세의 출가는 매우 늦은 나이였으므로 이때부터 깨달음을 위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좌선하였으며,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하여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출가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1930년 늦은 봄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토굴 속에서 용맹정진 하다가, 1931년 여름 도를 깨닫고 벽을 발로 차서 무너뜨리고 토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석두화상에게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올리자 석두화상은 오도를 인가하였다.1932년 사월초파 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菩薩 戒)를 받았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지고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의 마흔 다섯되던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 스님이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그 뒤 1933년 여름 여여원(如如院)에서 수행하며 오후에는 불식(不食)하였고, 겨울에는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이어서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전국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였고,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신구도관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이때 대종사 (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가시게 됩니다.

1946년 가을 가야산 해인사의 승려들이 해인사에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만들고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자, 6·25사변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1956년 11월에는 세계불교도우의회 제4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동산 (東山)·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 갔다. 귀국한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 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종무원 장이 되어 정화불사에 골몰하였으며, 석우(石友) 종정(宗正)이 입적하자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초대종정에 추대되었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66 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15일(음력 9월 초이틀)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마지막까지 "무(無)라 무라."하였는데, 이는 평생의 수행도구로 삼았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한시도 놓지 않았음을 뜻한다. 평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쳤는데, 문하에서는 조계종의 수행승들을 지도하는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일흔 아홉의 나이를 마치셨습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五說一切法)그거 다 군더더기(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若間今日事)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月印於千江), 제자로는 구산스님, 법정스님등이 계시다.

 

                                       

 

'금강산 유점사에 대해서 알아보면,

금강산에서 최대의 사찰이 유점사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중기 남해왕때 53불의 도래로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경내에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많아 유점사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유점사는 능인보전, 약사전, 산영루를 비롯한 수많은 승방, 누각등이 즐비하여 40여동의 규모를 자랑하는 거찰이었다고 합니다.

1408년에 이미 3천간이 넘는 거찰이었으며 국왕의 원당으로 (왕실의 명복을 비는 절)세조가 직접 유점사를 찾아 해마다 쌀 200섬과 소금 50섬을 주도록 했다고 합니다.

금강산에는 예로부터 명승고덕이 배출된 사찰이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유점사는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 등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대찰이었다. 신라 남해왕 원년(4년)에 건립된 유점사는 1794년(조선 정조 18년) 에 중건됐다.

'문명교류사의 연구'란 책에서 유점사의 창건 설화는 한국 불교의 '남래설(南來說)'을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인도의 문수보살이 53불상을 쇠종 속에 넣고 배에 띄워 보냈는데, 그것이 월지국을 거쳐 900여 년만인 남해왕 원년에야 금강산 동쪽 안창현 포구(현 강원 고성군 간성)에 표착했다.

53불이 금강산에 터를 잡고 절을 지으려 하자 아홉 마리의 용이 방해했다. 용은 천둥과 번개를 일으켜 큰 비를 내리게 했고, 53불은 느릅나무에 올라가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 용을 내쫓았다. 결국 용들이 거처를 옮긴 곳은 구룡연(九龍淵)이 되었고, 느릅나무(楡)가 있던 터에 세워진 절은 유점사(楡岾寺)가 되었다.'(고려시대 민지가 쓴 '금강산유점사사적기')

유점사의 창건 설화는 한국 불교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384년 백제 침류왕, 6세기 신라 법흥왕 때 북방의 육로를 통해 받아들여진 시기보다 훨씬 먼저 남방의 바닷길을 통해 전해졌음을 말해 준다. 또한 아홉 마리 용과 싸웠다는 것은 초기 불교의 유입 과정에서 토착 신앙과의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태고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던 금강산 유점사는 1951년 6·25전쟁 도중 불에 타 사라졌다. 특히 국보급 문화재였던 53불상과 능인전이 모두 소실된 것은 안타까운 일. 현재는 동종과 화강석 9층탑만 남아 있다. 동종은 보현사에 보관중.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에서 승보를 상징하는 사찰입니다. 송광사의 격을 말씀드리자면 대한불교조계종 21교구 본사이며, 5대총림 중 한 곳이고 승보사찰이며, 선종사찰입니다. 교구본사란 우리나라를 25개의 지역으로 교구를 나누어 그 교구에 속한 사찰들을 책임지고 관할하는 사찰을 말하는데, 총림이란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 참선 수행하는 선원, 염불을 하는 염불당, 그리고 율장을 공부하는 율원이 모두 갖추어진 사찰을 의미하며,우리나라에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수덕사 등 5개의 총림이 있으며 그 중에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그 규모가 가장 큰 곳입니다.

 

그리고 총림의 최고수장은 일반사찰과는 달리 주지스님이 아닌 방장스님이라는 직함을 가진 스님이 최고수장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삼보사찰이란 불보, 법보, 승보를 상징하는 사찰로서 삼보는 불교를 사바세계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세가지의 요소를 말합니다. 불보란 부처님을 의미하며, 법보는 경전(가르침), 승보는 스님을 의미하고, 불보를 상징하는 불보사찰로는 부처님의 정골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통도사, 법보사찰로는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해인사, 승보 사찰로는 대대로 큰 스님이 많이 배출된 송광사를 말합니다.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불교가 퇴폐하고 쇠락할 때, 그곳에서 보조지눌국사와 뜻을 같이하는 스님들이 모여 정혜결사 운동을 하였고 이 운동이 전국에 확산되어 고려불교를 다시 중흥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스님들의 가사의 형식이 이 때 만들어 졌으며, 불제자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초발심자경문도 이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초심자라면 반드시 보아야할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근세에는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이라는 큰스님이 이곳에서 주석하셨으며, 효봉스님은 10년간 송광사에서 주석하신 후 해인사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어 송광사를 떠나셨고, 그 제자분인 구산스님은 송광사 초대방장에 추대되어 방장으로 주석하셨기도 합니다. 현재도 역시 안거철에는 150여명의 스님들이 송광사에서 정진하시며, 계율을 잘 지키는 청정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송광사 가람배치를 보면 기본 구조는 화엄사상에 입각하여 만들어 졌습니다.6.25동란 때 사찰건물이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은 새로운 건물들로 채워져 있지만 예전에는 비가 와도 비를 맞지 않을 만큼 전각들이 빼곡했다고 합니다. 가람배치는 기본적으로 화엄사상에 입각하여 만들어 졌지만 선종사찰이라는 격에 맞게 선원이 대웅보전 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선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화두선이 주를 이루는데, 한마음 깨우치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죠. 대웅보전에 안치되어 있는 석가모니는 과거에 깨달은 부처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달으면 내 자신이 바로 현세의 부처가 되고 생불이 되는 것이죠. 그러기에 석가모니를 존숭하지만 결코 석가모니에게 메이지 않고 내가 바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선사상에 입각하여 선원 건물인 수선사가 대웅보전 위에 있는 것입니다.

송광사의 대웅보전은 일반사찰의 대웅전과는 다르게 대웅보전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대웅보전과 대웅전과의 차이는 그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이 복수인가 단수인가의 차이에 있습니다. 불상이 여러개 모셔져 있으면 대웅보전,그렇지 않고 불상 한개와 좌우보처 보살상이 모셔져 있으면 대웅전이라고 합니다. 송광사의 대웅보전에는 3명의 부처님과 4분의 보살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3명의 부처님은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말하며, 4명의 보살로는 문수, 보현, 지장,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송광사 대웅보전의 크기는 108번뇌의 의미에서 108평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대웅보전이 새로 만들어질 때 석가모니불의 밑에 남방에서 들여온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송광사의 관음전은 고종황제 때 황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황실의 기도를 올리던 곳으로서 이로 인해 조선시대 말에 양반들이 한양에 갈 일이 있을 때에는 이곳에 들려 인사를 하고 갔다고 귀향 후에는 이곳에 와서 다시 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되었지만 관음전 안쪽 벽화를 보면 벼슬아치들의 모습이 벽에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 왕의 주위에 신하들의 서있는 것처럼, 종1,2,3품, 정1,2,3품의 지위가 표시된 벽화의 주인공들이 전각 중앙을 향해 시립해 있습니다.

현재 송광사는 승보사찰답게 공부하는 스님이라면 꼭 한번 이상은 이곳에서 공부하기를 바라는 그런 사찰로 알려 있습니다. 산세와 지세가 평온하고 유하여서 그곳에서 몇 일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송광사를 천옥(天獄)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천옥- 하늘의 감옥이라는 말로 구름과 바람이라도 쉬어갈 수 밖에 없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참고로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에는 태고총림 선암사도 함께 있습니다. 송광사의 반대편에 있는 사찰로서 태고종의 총본산에 해당하는 천년고찰로 태고종을 떠 받치고 있는 곳이죠. 이처럼 조계산은 산 자체는 그렇게 높고 깊지 않으나 천년고찰의 대가람이며 현재 조계종과 태고종을 대표하는 두 개의 총림이 있는 산이기에 작지만 명산 중에 명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송광사의 이름에 대해 설명하자면 송광사(松廣寺)라는 이름은 워낙 조계산에 소나무가 많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하지만 6.25전쟁 때 화재로 인해 소나무가 모두 타버려 소나무가

많지 않게 되었죠.

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또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國師殿:국보 56)을 비롯해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90), 경질(經帙:보물 134), 경패(經牌:보물 175), 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179),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204),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205),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206),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보물 207), 하사당(下舍堂:보물 263), 약사전(藥師殿:보물 302), 영산전(靈山殿:보물 303), 《고려문서》 즉 노비첩(奴婢帖),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보물 572)가 있다.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산 스님(1909~1983)

구산스님은 1909년 음력 12월 17일 전라북도 남원시 내척리 509번지에서 진양 소(蘇)씨 재형씨를 아버지로, 최성녀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1935년 27세 때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하던 중, 진주에 사는 한 거사(居士)를 만 나 그에게서 『본래 청정한 자성(自性)자리인데 어디에 병이 붙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홀연히 발심하게 되어 그 길로 지리산 영원사를 찾아가 백일동안 천수기도를 하여 성취함으로써, 육신의 병도 낫고, 불법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29 세 때 입산 출가하여 서른살되던 이듬해 4월 초파일날 효봉선사를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5계를 받았고 1939 년 (31세) 4월 보름날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화상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그해 여름을 통도사 백련암에서 지내고난 후 청암사 수도암 정각토굴에서 착실히 정진 선(禪)수행의 기반을 닦았다.

1946 년 효봉선사를 방장으로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총림에 들어가 도감 소임을 보면서 지내다 그 이듬해 가야산 중턱에 법왕대 토굴을 짓고 안거하던중 견처가 생겨 큰절 대중의 요청으로 최초의 법상에 올라가 법문을 했다. 1950년 6·25 사변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지자 진주 응석사에 가서 분발하여 정진. 이듬해 정월 동래 금정선원에 계신 은사께 게송을 지어 바친다.

46 세 때인 1954년 여름 안거를 마치고 상경하여 교단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 5백자 혈서를 써서 정화의 결의를 굳게다졌으며 1955년 초대 전남 종무원장에 취임하고, 57년에는 광양 백운산의 상백운암을 중건하고 정진. 1960∼67 년까지 조계종 중앙 종회의원으로 종단일에 관여하고, 1962년(54세)에는 대구 동화사 주지에 취임했다. 1969년(61세) 4월 보름날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고, 그해 9월 5일 총림의 후원 단체인 불일회(佛日會)가 창립되었으며 스님은 총재 겸 총회장에 취임한다. 이와같이 하여 스님은 희미해져가던 호남지방의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송광사는 고려 보조국사 이래 연면히 계승되어온 승보도량의 면모를 새롭게 확립하기에 이른다.

1972 년 겨울 운허화상과 함께 북미 카멜 삼보사 개원식에 참석차 도미, 미주를 두루 순방하고, 이듬해 봄 미국인 제자 현조를 데리고 귀국,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5년 불교의 생활화를 위해 「7바라밀」책자를 발간하여 유포하고, 76년 가을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법문을 모아 외국 출신 제자인 혜명, 혜행의 도움으로 영어로 된 「Nine Mountains」를 출간하여 해외에 널리 소개한다. 1979년 제2차 미주순방길에 올라 LA에 고려사를 개원하고, 다음해인 1980년「Nine Mountains」의 원고를 손질하여 법어집「석사자(石獅子)」를 간행. 1982년(74세) 제3차 미주순방 끝에 유럽쪽으로 발길을 넓혀 7월에 스위스 제네바에 불승사를 개원하고 10월에는 미국 카멜에 대각사를 개원하기에 이른다. 스님은 70노구를 이끌고 동분서주,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펼치기위해 과로를 무릅쓰고 헌신한 결과 송광사는 오늘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제선원을 개설하여 미흡하나마 한국불교를 해외에 수출하는 창구 기능을 하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1983년 가을 미질(微疾)을 보이시더니 삼칠일 정진 후 세연(世緣)이 다 됨을 유언하시고 12월 16일(음 11월 13일) 오후 6시 25분, 46년 전 바로 스님이 득도수계하셨던 송광사 삼일암에서 많은 제자와 문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부좌하신 채 입적하셨으니 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法臘)은 47세였다. 문도들이 수습된 사리를 거두어 적광탑과 탑전을 건립하였다.

45 년에 걸친 스님의 수도생활은 애써 정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절을 짓고 고치는 가람수호에 힘쓰셨고, 「일수좌」 의 별명을 들을 만큼 잠시도 쉴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항상 대중과 함께 예불하고 운력하고 공양하면서 동사섭의 덕을 닦았다. 스님은 또 효상좌의 소리를 들을만큼 은사를 모시고 섬기는데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리고 항상 문호를 개방하여 누구하고나 만났고, 한결같이「이뭣고」화두로써 법문을 삼았으며, 많은 붓글씨로써 대중에게 불연을 깊게 하셨다. 말년에 해외로 다니면서 이땅의 불교를 세계에 널리 선양하셨다.

 

구산 스님은 효봉 스님의 뒤를 이어 호남불교의 진원지인 송광사의 방장(方丈) 스님이 됐는데, 특히 소탈하고 격의 없는 언행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한 분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의 수행역사가 말해주듯 뛰어난 수행심과 선 지식을 체득하고 있었으며 거인과 같은 자신감과 법력이 그를 이미 소탈한 농부 같은 인간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던 것 같다.

스님은 당시 절간 일을 도와주던 일반인, 곧 처사들과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웃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아서 이야기하는 청년 불자를 비롯, 보살 등에게도 늘 친구같이 인기가 높았다.

구산 스님은 70년대 말 미국의 히피문화가 성했을 때 미국 LA 등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의 세계 조류는 베트남 전쟁, 핵의 공포 등으로 말미암은 반전운동, 과학비판, 동서양 문명의 만남, 새로운 정신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 고조 등이 한창이었다.

일본의 스즈키 선사, 몰몬교, 라즈니시, 크리슈나무르티, 마하리시, 마인드 컨트롤, 우드스톡 페스티벌 등이 미국인의 정신을 뒤흔들었으며 사회적으로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동양의 신흥종교들도 이때에 미국에 거점을 만들었다. 당시 구산 스님도 이러한 서양인들의 정신적 갈등을 해소시켜 주는 동양의 선지자로 인정받았으며 가는 곳마다 수백 명씩의 외국인 제자들을 한꺼번에 불문에 들게 하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다.

어떤 미국인 제자 하나는 한국에서 명문대 박사과정을 바치면서 당시 구산 스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젊은 시절 나는 인생이 가진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지극히 방황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에서 온 구산스님을 한번 뵙게 됐는데 그저 그가 짓고 있는 웃음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말 한마디 듣지 않았으나 그가 짓고 있는 웃음이 내 생명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당장 보따리 싸서 한국으로 불교 수업을 떠나게 되었다.”

후에 스님은 당시 얻었던 외국인 제자들을 위해 송광사에 불일선원을 짓고 수백 명의 제자들에게 그가 쌓았던 불법을 전수하게 된다. 요가난다와 구산 스님이 만났던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입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 스님을 수행했던 상좌들의 말에 의하면 요가난다가 구산 스님의 법력을 크게 칭송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빛나는 봄에 찾은 요가난다의 애쉬람. 여기저기 많은 꽃들이 피어있고 작은 폭포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웃음 짓는 구산 스님의 모습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요가난다. 그리고 또한 욕심을 버리는 게 가장 큰 견성(見性)이라고 가르친 구산 스님. 모두들 가고 없다. 한 시대를 살고 갔던 큰 종교의 거인들이 이제는역사의 한 페이지 뒤로 사라져 갔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시대는 변해가고 있다. 사회는 더 복잡해지고 정치적 권력, 경제적 편중은 나날이 심해져 가고 있으며 인간의 욕심으로 우리의 생명의 일부인 자연마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과연 선지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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