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11:17-44>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 베다니의 뜻, 가난한고 고통받는 자의 집
1. 말씀배경
성경에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자가 두명이 있습니다. 그 한 명이 오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이고요, 다른 한 명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지옥에 간 부자집 대문 앞에서 얻어 먹고 산 천국간 거지 나사로입니디 (눅 16:20-27)
나사로 (헬, 나자로스)의 뜻은 “하나님이 돕다”는 뜻입니다.
▶ 나사로처럼 하나님이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 갑니다.
그리고 베다니도 ①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곧 오늘 말씀의 주인공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가 사는 베다니가 있습니다 (요 11:1). 이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는 문둥병자 시몬이 사는 곳이기도 합니다 (막 14:3). 아마 문둥병자들이 예루살렘 성에는 못 들어가고 그 근처에서 동네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라 생각됩니다 (막 14:3)
그리고 또 하나는 ② 요단강 건너편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베다니가 있습니다. (요 1:28)
베다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의 집”이란 뜻이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다니 같은 곳을 오가며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한 곳, 대접을 받는 곳을 골라 다니는 삯꾼 목자와는 다르게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 10:11, 14)
오늘 말씀의 지리적인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고 (요 10:40-42),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두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을 머무신 후에 (요 11:6) 예루살렘 베다니로 갔는데 벌써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 된 것으로 보아 (요 11:17, 39) 두 베다니와 베다니의 거리는 하룻길 정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이 들자 나사로의 누이들 곧 마르다와 마리아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계시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11:3).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는데 그가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들도 오늘날 나사로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들어도 죽어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함이라” 하시며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왜, 즉시 가시지 않고 이틀을 요단강 건너편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에 머무셨을까요? 사실 이틀을 더 기다리며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가 죽자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11:11).
주님이 이틀을 더 머무시는 동안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인간적으로는 당장 달려가 고쳐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파하는 나사로와 힘들어 하며 울고 있는 마리아, 마르다가 계속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되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기다림 속에서 나사로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도 안타깝게 만들지만 주님께서 기다리는 시간도 주님의 인내의 시간인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님이 죽기까지 기다리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리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므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고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신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님도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4).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신 자신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틀을 머무시고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에 도착하니 나사로는 벌써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고 무덤 속에서 시체에는 냄새가 날 정도로 썩고 있었습니다.(요 11:17, 39).
이런 상태라면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의술로는 불가는 한 상태입니다.
▶ 예수님은 이럴 때 역사하실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하여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빈들에서 도저히 아무것도 구할 수 없을 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도 오지 선교지에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할 때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가서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광은 줄어듭니다.
인간들의 노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연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기 시작했을 때에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가 살아나면 모든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이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극적으로 역사하실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서 찾아오셔서 역전을 시키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와 있습니까?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2. 과거와 미래에 잡혀 있는 신앙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동네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1)
이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 지금 오셔도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나사로가 죽은 것은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벌써 나흘이나 지났으므로 충분히 마르다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 마르다는 과거에 잡혀 있습니다. 그것도 죽음, 사망에 잡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을 마중 나온 마리아도 마르다와 동일하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3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역시 과거에 잡혀 있습니다. 마리아도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오라버니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무덤에 들어갔고, 더구나 사흘이나 지났고, 썩고 있어 냄새가 나므로 더 이상 예수님도 그를 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2)
이제라도 (헬, 뉜, even now)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마르다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다음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면. 지금 당장 나사로가 살아나는 현재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나 다른 무엇을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살아나리라” (요 11:23)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나는 것은 시제가 미래로 되어 있지만 조금 후면, 잠시 후면 현재적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조금 후면 살아난 나사로를 눈으로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르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먼 미래의 소망에 잡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장 눈 앞에 나타날 영광이 아닌 것입니다. 이 믿음도 큰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나사로가 살아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과거의 사건에 발이 묶여서 더 이상 진전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한번 실패하면 그 실패가 그를 평생 발목을 잡고 앞으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안돼, 지난번에도 실패를 했잖아, 난 능력이 없어, 다시 그런 실패는 안하고 싶어! ”하면서 현재에 대한 소망을 내려 놓습니다.
그들에게는 나사로의 죽음은 이미 며칠 전에 죽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는 그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음입니다.
현재 죽음에서 벗어나 다시 사는 것에 대한 믿음을 전혀 가지지 못합니다. 이런 현재적인 희망을 가지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은 또 하나의 선택으로 먼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그것을 넘겨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 오실 때 다시 살겠지!
현재는 건너 뛰고 말입니다.
현실을 보면 당장에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래로 넘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현재에 대한 소망은 보이지 않기에 그나마 생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시간 지금, NOW에 그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난날의 실패가 넘어짐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미래의 소망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다르게 항상 현재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므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는 분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과거 역사가 되었지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는 현재적으로 살아 있는 자인 것입닉다. 우리도 현재적으로 살아있는 자 입니다.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현재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과거 시제, 미래 시제에 잡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천국가는 믿음도 과거의 믿음으로 가지 않습니다. 현재의 믿음으로 가게 됩니다. 미래의 믿음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지금 죽는 그 순간의 현재적인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히 11:1절에 있는 “믿음”도 “현재적”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은 “Now faith is~”로 시작하고 헬라어 원어도 현재 시제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간들은 현재라고 하는 오늘에 역사해 달라고 하는 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오늘 믿게 해 달라고 하고, 오늘 성령충만 받게 해 달라고 하고, 오늘 축복해 달라고 하고, 오늘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삼 년 후에 축복해 주세요!” 이것은 조금 이상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죽은 자도 살겠고, 지금 살아 있는 자도 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초월합니다. 미래도 초월합니다.
네 오라비 가 이미 죽었지! 조금 후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을 미래시제로 사용했지만 곧 바로 눈앞에 다가올 현재와 같은 미래인 것입니다. 한 시간 후에도 우리들에게는 미래이기 미래시제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곧 이루어지는 가까운 미래이며, 현재와 같은 현재적 미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실 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여전히 과거에 잡혀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1:46). 여기서도 영광을 보는 것은 미래 시제로 사용되었지만 당장 눈 앞에 펼쳐질 미래로 지금, 곧 그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먼 미래, 종말에 있을 그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들에게 다가 오셔서 역사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잡히지 마시고 먼 미래의 소망으로 다 떠 넘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 역사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다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오늘을 위한 밟고 일어서야 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시고, 미래는 가까운 현재와 같은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기적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먼 미래에 내가 너희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영광을 받을까 한다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 걸 아시고 “내일 살려줄께”가 아닌 것입니다. “내일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가 아닙니다. 오늘 살려주신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현재 그들의 눈 앞에서 “나사로나 나오라” (요 11:43)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지금 눈 앞에서 걸어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한 분이십니다 (히 13:8)
그러므로 2000년 전에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오늘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처럼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오늘 살리고자 하며, 암으로 죽을 자를 오늘 살리고자 하며, 오늘 망한 기업을 살리고자 하며, 오늘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현재적인 믿음을 위하여 말입니다.
이렇게 지금, 오늘 영광을 나타내는 긍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로 믿게 하여 함이라” (요 11:42).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으로 인하여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오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단지 나사로를 살려주어 예수님 능력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우리를 현재적으로 구원하고 기적을 본 자가 또 예수를 믿어 지금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말씀대로 나사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통해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은사를 통하여 기적을 보는 것도 우리들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함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성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다음 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들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런데 주의 일을 하라고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 자기의 영광을 위하고 배불리기 위하여 한다면 “불법을 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많은 은사를 가지고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시며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한 결과입니다.
<맺는 말>
우리들은 과거의 실패와 아픔에 사로잡혀 현재적인 축복을 받지 못하면 안됩니다. 현재에 아무 소망이 없다고 현재의 받을 복을 미래의 소망으로 다 떠 넘겨도 안됩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원합니다. 지금 기적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 사시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지금 현재적으로 축복을 받고 구원을 받고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살아가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지금 나타나고 그 영광으로 인하여 지금 믿는 자가 많아지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