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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6, 2002. Written by C. J. Lee
금요일 오후.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얘..외삼촌께서 위독하시단다. 어제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셔서 서울대병원에 모시고 갔었는데..퇴짜 맞으셨단다. 지금 애들을 다 불러들이는 모양이다."
외삼촌이 위독하시다는, 언젠가는 날아올 소식이지만 늘 갑자기 닥치는,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도 '병원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어머니의 표현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저녁. 약간 늦은 저녁상을 차리고 오랜만에 수험생 헐렁이까지 낀 '온 가족의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다시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외삼촌께서 돌아가셨다.."
"저 내일 오전에는 할 일이 있어서 출근해야 하거든요. 오후에 저랑 내려가시지요."
전화를 끊고 식탁에 앉았다. 무슨 전화인지 궁금해하는 가족들을 애써 무시하고 성호를 그었다.
"주님..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나는 유교적이고 효도적인 인물이 아니다. 외삼촌이 돌아가셨다고 머리풀고, 새끼로 머리띠하고, 곡을 하며 슬퍼하지 못한다. 그러나 식사 내내 나는 외삼촌을 떨치지 못했다.
외삼촌. 올해 여든 하나. 그러나 워낙 장수하는 집안이라서 그런지 별로 '장수(長壽)'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기는 아직도 여섯 살이나 위이신 큰 이모께서 정정하시니까.
그 근방에 널려있는 권(權)가네의 짱어른이시고, 4녀1남 가운데 외아들이셨고, 자식은 3남4녀를 두셨다.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집안을 크게 일으키셨다. 별명은 호랑이.
우리 집안에는 호랑이가 둘 있었다. 외삼촌과 우리 아버지. 외삼촌은 이미지 자체가 금욕, 성실이었으니 특별히 뭐라 안 하셔도 누구나 어려워하는 호랑이였다. 반면 아버지는 남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시고 술도 좋아하셨기 때문에, (외삼촌에 비하면) 일가친척들과 격이 없이 잘 지내시는 편이었다. 그러나 행여 조금이라도 마땅치 않은 일이 있거나,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불같이 질타하셨다. 시쳇말로 다 들러 엎어 버리셨다. 결국 친척들은 두 양반을 다 호랑이 보듯 했다.
두 호랑이의 혈액형은 달랐다. 외삼촌은 성실, 근면이라는 이미지가 말해 주듯이 술 마시거나, 빈둥대고 노는 꼴을 아주 싫어하셨다. 또 당연히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취흥(醉興)을 즐겨하시고,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써야만 하는 타입이셨다. 사업가란 그래야 한다는 주장이셨다. 당연히 두 분은 서로 못마땅해 하셨다. 나이는 외삼촌이 7살이나 위이셨지만 두 분의 '상호 못마땅함'은 위아래가 없었다. 아버지는 늘 외삼촌을 '자린고비'라고 흉보며, 사람이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특히 나에게). 반대로 외삼촌은 아버지가 좀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셨다. 당연히 두 양반은 같이 있어도 서로 딴청이나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오빠와 남편의 그런 앙숙(?)관계에 불편하셨을 것 같은 어머니는 의외로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셨다. 이제 와서 누굴 고칠 수 있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셨고, 무엇보다 사는데 별 불편이 없었으니까 그러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두 호랑이의 '서로 째려보기'는 참 묘한 구석이 있었다. 누가 미우면 그 자식도 미울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않았다. 나는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내려가서 온 동네에 분탕질을 치고 다녔지만, 외삼촌은 늘 잘 보살펴 주셨다. 야단치러 오는 동네 사람들도 잘 막아주셨고, 돌아올 때는 꼭 옷 한 벌이라도 사 입혀서 보내셨다. 물론 집에 오면 아버지는 '인형 같이 예쁜 애에게 그런 촌패션을 사 입혔다'고 외삼촌에 대해 꼭 한 마디 불평을 하시곤 했다.
외삼촌의 큰아들인, 나의 외사촌형, 인택이 형은 중3때 무릎 때문에 병원 다닐 때부터 우리 집에 살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3년을 같이 살았다. 또 <2이모-3형 (둘째 이모네 셋째 형)>도 우리 집에서 서울 유학생활을 했었으니, 그땐 우리 집이 거점이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두 분은 서로 못마땅해하면서도 조카들은 서로 잘 보살펴 주고 아껴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뵐 때는 늘 상대방 '앙숙'의 안부부터 묻곤 하셨다.
이런 두 호랑이가 한 마음이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
형님 한 분이(소속은 안 밝히겠다. ?-#인데, 그 형이 알면 난 큰일난다) 결혼을 하셨는데, 신혼 때 바로 바람이 났다. 같은 회사의 어느 여자랑 정분이 났는데, 열정이 너무 지나쳤던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난 국민학생이었는데 너무 고운 새색시 형수가 늘 수심에 차있는 모습을 보고 형을 아주 미워했었다. '고운 새색시 놔두고 형은 왜 저럴까?' 하는 생각에 내 성적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여자가 physically active 했던 모양이다. 아님 expert 였을지도..)
결국 어머니는 나까지 미행꾼으로 고용하면서 (난 실패했었다. 중간에 형한테 잡혀서 과자 하나 얻어먹고 돌아왔다. 난 역시 첩보원 체질이 아니다) 그 여자의 소재를 찾아내었고, 이모들과 함께 총출동하셨다. 보진 못했지만 오죽했을까? 호랑이의 누이들이 그렇게 몰려갔으니.. 난 그때 사랑이 아플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모들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참고로 <예쁜 후배>는 이모가 없다.
잠시 마음을 잡은 것 같던 형이 또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형수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수시로 달려가서 (형의 신혼집은 우리 집 근처였다) 조카며느리 위로하고 형을 야단치고 하셨지만 형의 그 병은 차도가 없었다. 그 때 난 사랑의 열병이 저토록 무섭구나 하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랑에는 남녀도 없다'고 했구나.. 나의 철학자로서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포에서 호랑이께서 올라오셨다. 우리 집에 와 있던 큰아들, 인택이 형을 보러 오신 것이었다. 그 날 저녁, 서로 뚱하니 앉아 저녁을 드시던 아버지와 외삼촌의 화제가 <바람난 형>으로 옮아갔다. 어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으신 외삼촌과, 역시 그제서야 작금의 상황을 아시게 된 아버지는 모두 불같이 노하셨다. 뭐랄 새도 없이 두 분은 떨쳐 일어나 형의 신혼집으로 쳐들어가셨다. 나는 그때 제발 형이 집에 없기를 빌었다. 호랑이가 하나뿐이었으면 안 빌었을 것이다. 1:2, 그것도 바람난 집토끼 하나와 호랑이 둘의 대결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나중에 어머니에게 단편적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참상도 그런 참상이 없었단다. 인권의 사각지대가 바로 거기였단다. 그 날 불행히도 형님은 집에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그런 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불쌍한 형, 바람난 형.. 침 뱉어 점이라도 쳐보고 들어오지...
형님은 갑자기 들이닥친 외삼촌과 이모부에게 문안도 채 여쭈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선 상태로 '니주가리 송판'이 되도록 맞았단다. 아마 두 분이 서로에게 못마땅한 걸 형한테 푼 건 아니었을까?!
그 뭇매 사건 이후 잠시 잠잠하던 형은 그러나 또 다시 나돌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형은 참 맷집도 좋구나'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커서 보니 사랑은 두 호랑이의 뭇매보다 치열한 것이었다. 아..사랑! 집토끼가 호랑이 두 마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사랑의 힘!
결국 그 사건은 세월이 해결해 주었다. 역시 사랑엔 세월이 약이다.
(우리 남북관계도 이걸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사랑, 특히 '짝사랑'은 아무리 말려도 못 고친다. 햇볕정책보다 '세월정책'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런 '호랑이에 얽힌 사랑의 전설'을 생각하며, 올림픽대로에 계속 이어 연결된 길을 따라 외갓집으로 향했다. 참 이렇게도 가깝게 되었구나..
도착해보니 집 주변에 온통 비닐하우스 같은 텐트들이 쳐있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 서성이는 사람들로 부산하였다. 집안에도 음식 하는 아줌마들, 상 차리는 여자들, 나르는 애들로 번잡했다. 워낙 식솔이 많으니.. 화환 가운데는 유달리 '하성국민학교' 가 많았다. 11회, 30회.. 온 집안이 그 학교 출신이니.. 심지어 우리 어머니도 거기 출신이니까.
상복에 지팡이까지 짚고 서서 곡을 하는 상주들, 빈소 앞에 엎드려 곡을 하고 있는 누이들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가슴으로 휑한 바람이 지나갔다. 정말 돌아가셨구나.. 영정을 보았다. 여전히 눈빛이 형형한 외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엉뚱하게도 '이제 한 시대가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의 한 호랑이였던 나의 아버지는 15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바로 열흘 전, 이런 저런 연유로 아버지의 묘를 수습하여 화장을 했다. 나에겐 이것도 공교롭지 않게 느껴졌다. 앙숙이었던 한 사람이 15년 전 이맘때 돌아가셨고, 15년이 지난 며칠 전에 다시 화장까지 하고 나자 다른 한 호랑이마저 덜커덕 돌아가셨다. 15년의 사이를 두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런 일들.. 두 분의 인연의 한 단이 아닐까.. 그런데 저승에서도 앙숙이실까?
안방으로 들어갔다. 두분 이모와 외숙모를 비롯한 많은 어른들이 계셨다. 여기저기서 '철주 왔구나.', '꽃동자가 왔다구?' 하시면서 반겨주셨다. 어릴 때 예쁜 모습은 오래 기억되나보다. 참..사람의 눈과 기억이란..
나는 안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이렇게 방이 작았던가? 그때 우리들 열댓이 뛰놀고 함께 뒹굴어 자던 방이 요만했단 말인가? 마치 갑자기 거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아.. 저기! 저 자리! 나는 아내에게 방의 한 구석을 가리키며 그곳 장판의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내는 빙긋이 웃었다. 알고 있었구나..내가 언제 말했나 보다. 밤이 되면 그 구석에는 늘 요강을 두 개 갖다 놓았었다. 그렇지만 늘 새벽이면 그 요강 두 개가 다 차서 넘쳤다. 잠이 쏟아지던 어린애들이었으니까 요강 넘치는 걸 알았겠나?! 사실 때론 알면서도 그냥 일을 보기도 했다. 나도 넘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냥 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흉칙한 놈.. 그 구석 자리는 그래서 늘 장판이 떠있었다. (에구..드러라..) 그러나 이젠 그 자리가 말끔히 장판이 되어있고, 커다란 전기밥솥이(거의 공장용) 김을 내뿜고 있었다. 손님용인가 본데 어디서 저런 공업용을 구했을까..
아랫목의 상에는 의식 형님과 (2이모-1아들, 4촌 형제들의 제일 손위) 준구 형님이(1이모-1아들) 이모들, 외숙모와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의식 형님. 나보다 스무 살이 위인 형님이다. 형님은 외갓집에서 너른 들을 지나면 있는 뒷마을에 사신다. 그러다 보니 외삼촌과는 늘 가깝게 지내셨다. 형님집에서 면에 가려면 외갓집 앞을 꼭 지나야 한다. 20년 전이던가.. 형님이 경운기 몰고, 담배 꼬나 물고, 면에 가느라 외갓집 앞을 지난 적이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날 형님의 모습을 어디선가 외삼촌께서 보셨던 모양이다. 그 날 저녁 외삼촌께서는 '의식이란 놈이 벌써 담배를 피워..'하시며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 의식이 형의 나이가 마흔 다섯이 넘었었다.
의식 형님도 술을 별로 안 하신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취하신 것 같다. 그리고 대화라기보다 외숙모를 놀리고 계셨다.
"아니..외숙모. 나이가 일흔이 넘어서도 서방 죽었다고 꺼이 꺼이 우는 사람이 있수?"
아마 외삼촌이 임종하시자 외숙모께서 우셨던 모양이다. 여든이 다 되도록 해로하고 살았으면 됐지, 무슨 곡이냐고 놀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랴? 난 좋아서 이렇게 춤이 다 나오는데.."
외숙모는 춤추는 시늉을 해 보이시며 정색을 하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큰 이모께서
"아니.. 서방 죽었는데 춤추는 여편네도 있나?" 하신다.
방안 가득 까르르 웃음소리가 넘친다. 우리 외종형제들 가운데 (남자로서는) 제일 손위이시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외삼촌댁을 드나들던 의식 형님은 일부러 술을 드시고 외숙모를 위로하고 계신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런 의식 형님의 모습이 아주 낯설었다. 늘 말도 없으시고, 엄하기만 하시던 형님이 술까지 드시고 엉뚱한 소리로 분위기를 잡아가다니.. 오히려 늘 강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준구 형은 빙그레 웃기만 하신다. 호랑이가 돌아가시니까 '썰'의 판도도 바뀌는 건가?
의식 형님의 넋두리 같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외갓집 앞을 지날 때면 늘 들어와 물 한 그릇, 술 한잔이라도 얻어 마시고 갔다는 이야기, 밖에서도 보기만 하면 데리고 들어가 술 한잔이라도 먹여 보내던 외숙모 이야기, 집안에 외숙모가 안 계시고 계수(외갓집 큰며느리. 인택형 부인)만 있으면 어려워서 물도 한 잔 못 청해 마셨다는 이야기.. 외삼촌 이야기는 별로 없고 전부 외숙모 이야기만 하신다. 외숙모 위로 공연인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 어릴 때 뛰놀던 들과 산을 돌아보았다.
저 들판.. 언젠가 외삼촌이, 당번犬 '메리 3세'를 대동하고, 나를 데리고 가서 쌀 품종을 맞춰 보라 하셨던 저 들판 (/0825.htm). 그래서 공학박사의 농학지식 수준을 마구 질타하셨던 저 곳. 아직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바로 근처까지 몰려온 저 공장들의 등살을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저 동산.. 토끼 잡는다고 가로세로 뛰어다니던 동산. 가을이면 외갓집 도토리 창고였던 곳. 내일이면 외삼촌이 묻히실 곳. 저기도 공장이 들어서겠지?
갑자기 의식 형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갓집에 들어갔을 때 외숙모가 없고 계수만 있으면 어려워서 물도 달라고 못하겠어..'
그렇지.. 이젠 나도 그렇겠지. 외숙모가 계시고 외사촌들이 있다지만, 호랑이 외삼촌이 안 계신 이곳에 얼마나 자주 오게 될 것인가? 이제 어른이라곤 큰 이모만 김포에 계신데, 큰 이모도 준구 형의 등살에 반 이상은 횡성 산 속의 새집에 가 계실 테니.. 내 얼마나 김포에 다니러 오겠나? 아직도 김포 여기저기에 일가가 지천이지만 어른이 안 계시니 그 김포가 예전의 김포일까?
이젠 확실히 한 세대가 지나갔다. 호랑이의 시대가 지나갔다. 그리고 내 김포 나들이는 점점 뜸해지겠지.. 그리고 그렇게 나와 함께 김포는 우리 집에서 사라지겠지..
민물매운탕 끓여줄 테니 여름에 휴가 내서 꼭 오라는 의식 형님의 당부를 뒤로하고 서울로 향하며 나는 자꾸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점점 잊혀질 고장. 김포..
힘들 때면 떠오르는 나의 아나로그 추억, 양지바른 낟가리 속 같은 포근한 산야.. 이젠 잊혀지겠지..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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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처리 | 에구 철주형 외삼촌 살던 곳으로 울 부모님들 모셨어요! 마산서 올라와 적적하시지 않도록 공장에서도 멀지않은 곳을 찾다보니 하성이였는데..거기가 외가였네...[2004/10/25] |
헬레나 | 엉? 그래요? 세상 참 좁다~ 하성 어디쯤 일까? [2004/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