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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스크랩 高麗史節要 - 武臣의 亂(1)
임광자 추천 0 조회 64 08.06.13 0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高麗史節要 - 武臣의 亂(1)

高麗史節要 - 武臣의 亂(1)

다. 무신의 난(1) - 정중부(鄭仲夫 / 1106 ~ 79)의난

(1) 고려시대의 무반(武班)

고려청자, 청자양각연판문(靑磁陽刻蓮瓣文)대접고려시대의관제(官制)는 문(文)·무(武) 양반(兩班)제도를 채택하였으나 과거제도가 실시되고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문신(文臣)을 우대하고 상대적으로 무신(武臣)들은 천대를받았다.

관료의 등용문(登龍門)이라 할 수 있는 과거(科擧)시험에 무과(武科)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군의 최고 작전·지휘는 왕명을 받은 문신들이통상적으로 맡았다.

이를테면 거란이 침입했을 때 크게 활약했던 서희(徐熙/ 942 ~ 98)와 강감찬(姜邯贊 / 948 ~ 1031),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는 윤관(尹瓘/ ~ 1111), 그리고 묘청을 토벌한 김부식(金富軾 / 1075 ~ 1151) 등은 무신들이 아니라모두가 문신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제도로서의 문·무 관제는 성립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군사제도는 수시로 바뀌어 그 전모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다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적인 근간(根幹)은 2군(軍) 6위(衛)로 요약된다.

2군(二軍)이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이라불렀던 두 개의 부대를 말하며 그 기능은 국왕의 친위부대로서 금군(禁軍)의 역할을담당했는데 두 부대의 업무 한계는 분명치 않다.

육위(六衛)란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등 여섯 개의 부대로서 이군(二軍)과 더불어 고려 전기 중앙군의 핵심 조직을 말한다.(중앙군을京軍이라고도 한다)

육위 가운데 좌우위·신호위·흥위위는 중앙군의 주력부대로서수도를 방어하고(上京侍衛), 전쟁에 동원되었으며(出征), 국방상 요소를 지키고(防戍),각종 역역(力役)에 동원되는 등 일반 군사 일을 담당하였다.

나머지 3위는 특수부대로서 금오위는 도성의 치안과순찰을, 천우위는 왕을 시종(侍從)하는 의장대(儀仗隊) 역할을, 감문위는 도성의각 문에 배치되어 출입자의 감시를 담당했던 부대로서 그 기능상 항상 도성에 머물러있어야 했기 때문에 의무(義務)에 따라 농민들이 교대로 복무했던 번상군(番上軍)이아니라 일종의 직업군인인 상비군(常備軍)으로 편제되었다.

2군과 6위에는 각각 사령관 격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 1명과 부사령관 격인 대장군(大將軍 / 종3품) 1명을 두어 전군을 통솔케 하였으며,그 아래로 군단장 격인 장군(將軍 / 정4품), 사단장 격인 중랑장(中郞將 / 정5품).연대장 격인 낭장(郞將 / 정6품), 대대장 격인 별장(別將 / 정7품), 중대장 격인산원(散員 / 정8품), 소대장 격인 위(尉 / 정9품)와 대정(隊正 / 종 9품)을 편제된숫자만큼 배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직업군인으로서 도합 16명의 상장군과대장군은 그들만의 회의기구인 중방(重房)을 구성하고 그 구성원이 되었으며 응양군의상장군이 중방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 밑으로 장군들로 구성된 장군방(將軍房)과중랑장들로 구성된 낭장방(郎將房)이 있었다.

이들은 군역(軍役)의 대가로 일반 전시과(田柴科)에따라 전지와 시지(柴地 / 땔감용 산림)가 차등 지급되었으며 그 직(職)이 세습되면영업전(永業田)이라 하여 자손에게 상속되었으나 형편에 따라 언제든지 국가에서몰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각 부대의 졸병에 해당하는 농민 번상군은 복무 중 일체의비용을 자비로 부담하였다.

(2) 최초의 무신(武臣) 변란(變亂)

거란의 침입과 강조의 정변 등으로 어수선했던 10세기말에서11세기초, 각가지 명목의 공신들이 양산되었고 군사적인 수요가 늘어나면서 새로운부대가 만들어지고 군인들의 숫자 또한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이들에게 (급료로) 지급할 토지의 부족현상이나타났고 이런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해서 현종(顯宗 / 1010 ~ 31)을 세우는데 큰공을 세운 황보유의(皇甫兪義 / ~ 1042) 등 권신들이 왕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영업전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祿俸)에 충당시켰다.

1014년(현종 5년) 갑인(甲寅) 11월, 이에 불만을 품은상장군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일으켜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대궐에 난입하여 중추원사 장연우(張延祐)와 중추원 일직(日直)황보유의를 잡아서 매질하여 거의 죽게 만들고는, 합문(閤門) 안으로 나아가 임금에게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황보유의 등이 우리의 전지를 점탈(占奪)하였으니실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지 공가(公家)의 이익을 도모코자 한 것이 아닙니다.만약 발을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몸이 어찌 되겠습니까(若截適履 奈四體何) 모든군사가 억울하여 분함과 원망을 견디지 못하오니 청컨대 나라의 좀(두: )을 제거하여여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소서"하였다.

이에 당황한 현종은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제명하고귀양 보냈으나, 김훈 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무관으로서 상참관(常參官) 이상은문관을 겸하게 하고,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며 삼사(三司)를폐지하고 도정서(都正署)를 둘 것을 강요하니 왕이 하는 수 없이 이에 따랐다.

어사대(御史臺)란 백관을 규찰하고 잘못된 풍속을바로잡는 사정기관으로서 조선시대의 사헌부(司憲府)와 같은 곳이며, 고려시대의삼사(三司)란 국가의 전곡 출납과 회계를 담당했던 곳으로 국가 재정의 중심기관이었다.

이는 무관들이 문관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동시에금오대와 도정서를 통해서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넓히겠다는 것으로 일단 이런 쿠데타가성공을 거두는 것 같았으나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계획 없이 일만 벌려 놓았고, 일이성사된 후에는 아무런 명분 없이 자신들의 이권 챙기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반년을넘기지 못하고 화주방어사 이자림(李子琳 / ~ 1034)의 계교(計巧)에 말려들어 김훈등 주모자 19명이 모두 처형됨으로서 끝나고 말았다.

화주방어사 이자림은 무신들의 횡포와 분별없이 남발되는정령(政令)으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일직(日直) 김맹(金猛/ ~ 1030)에게 말하기를 "한(漢) 고조(高祖/劉邦)가 초왕 한신(韓信)을 제거코자했으나 싸워서 한신을 이길 수는 없어 고심하던 중, 이 일을 진평(陳平)과 의논하였더니진평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초(楚) 나라 땅 운몽(雲夢)으로 여행하신다면 한신은 신하로서마중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를 이용하여 그를 잡으면 쉽게 잡을 수있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한 고조가 이를 좇아 운몽에 여행하여 계획대로 한신을사로잡아 회음후로 강등시켰다. 이런 계책을 어찌 (왕은) 본 받지 않는가" 하니김맹은 곧 임금에게 이런 사실을 고하게 되었다.

임금 현종은 이자림을 임시로 서경유수판관으로 삼아정변을 주도한 무신들을 제거할 계책을 세우게 하여 먼저 서경으로 보내고, 뒤이어1015년(현종 6년) 3월에 왕은 서경에 행차하였고, 김훈 등 무신정변의 주역들도 임금을따라 서경에 가게 되었다.

서경의 장락궁(長樂宮)에서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술을 마시게 한 후 크게 취한 김훈 등 19명을 쉽게 잡아 모두 목을 베었고, 이자림은공신으로서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왕(王)씨 성을 하사(下賜) 받아 이자림에서왕가도(王可道)로 성과 이름을 모두 고쳤으며, 후일 그의 딸은 덕종(德宗)의 비(妃)가되었다.

(3) 정중부(鄭仲夫)의 난

김훈과 최질 등의 변란이 실패로 끝난 후 그나마 겨우지탱했던 문(文)·무(武)의 균형은 무너지고 문신 중심의 문벌귀족사회로의 가파른이동이 사회전반에 걸쳐 빠르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자겸을 난을 겪은 인종(仁宗)은 의도적으로 무신들을싫어해서 1133년에는 그의 아버지 예종이 국자감의 전문강좌인 7재 가운데 하나로서설치했던 무신 양성 기관인 무학재(武學齋)를 없애 버렸으며, 묘청의 난 이후에는무신들의 지위가 더욱 낮아져 잡역부(雜役夫)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146년 2월, 인종은 병이 깊어지자 태자(太子)에게양위하고 온갖 치성과 탕약(湯藥)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20세의 태자 현(晛)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이가 곧 고려 18대 왕 의종(毅宗)이다.

의종 연간에 이른바 정중부의 난이라고 부르는 무신의변란이 일어났는데, 무신 난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시문(詩文)과술을 좋아해서 늘 문신들과 어울려 시도 때도 없이 잔치를 벌렸는가 하면, 지나치게격구(擊毬)를 좋아해서 정사(政事)를 멀리 했고, 귀신(鬼神)을 두려워해서 무당의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거금을 사당(祠堂)에 쾌척(快擲)하여 국고를 낭비 시켰으며환관(宦官) 정함(鄭 )을 총애하여 조신(朝臣)들과의 마찰을 야기 시켰다는 등 실패한군주로서의 모든 악평이 그의 치세 기간을 호도(糊塗)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의종이라는 자연인이 저질은 죄업이전에발전 변화되는 사회를 따르지 못한 문반귀족들의 파행적 고집의 결과적 소산이라할 수 있으며 그 대가는 문벌귀족사회의 해체(解體)를 불러오게 되었는데, 정중부의난을 계기로 고려사회는 일종의 민중운동이라 할 수 있는 하층민의 민란이 전국적으로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최충헌의 무신정권이 등장하는 배경만을 만들게 되었다.

어쨋거나 정중부의 난에서 뺄 수 없는 것은 의종과보현원, 김돈중과 한뢰, 이의방과 이고 등이 얽힌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김돈중(金敦中)은 삼국사기를 엮은 김부식의 아들이다.1144년(인종 22년) 5월, 26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김돈중이 1등으로 올랐다. 처음에는2등 이였지만 왕이 그의 아버지(김부식)를 위안하기 위하여 1등으로 올리고 궁내시종(宮內侍從)에임명하였다.

김돈중은 아버지의 후광과 임금의 총애로 몹시 교만방자하여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대궐 뜰에서 귀신을 쫓기 위해서 행한 나례(儺禮)때 왕의 측근에서 호위하는 견룡(牽龍) 대정(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불사르니정중부가 화가 나서 김돈중을 주먹으로 치고 욕을 하였는데, 이를 본 김부식이 노하여왕에게 고하니 왕은 할 수 없이 정중부를 결박하고 매질하려 하였다가 왕이 정중부의비상함을 알고 일부러 도망가게하여 이를 모면하게 하였다.

정중부는 해주(海州)사람으로 눈이 예리하고, 이마가넓었으며, 살결이 희고 키가 7척이 넘고, 그 수염이 아름다웠다. 정중부가 태어난고을에서 군적(軍籍)을 올릴 때, 고을 관장은 군적을 봉하여 정중부에게 직접 지워서울로 보냈고, 재상 최홍재(崔弘宰)가 정중부를 보고 특이하게 여겨 공학금군(控鶴禁軍)에넣어주어 왕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1167년(의종 21년) 정월, 연등(燃燈)회가 있던 날,좌승선 김돈중이 탄 말이 징과 북소리에 놀라 날뛰는 바람에 김돈중의 화살 통에서화살 하나가 떨어져 나가 임금이 탄 수레(輦) 앞에 떨어지자 겁이 많은 의종은 누가자기에게 화살을 쏜 것으로 알고 서둘러 궁으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참수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김돈중은 자신의 과실을 고백하지않았고 이를 안 정중부는 김돈중을 더욱 미워하였다.

1170년(의종 24년) 8월 29일, 의종은 연복정에 나가문신들과 더불어 진탕하게 놀다가 다시 흥왕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왕은 황음(荒淫)하여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이 왕의 은총만 믿고 방자하여무신(武臣)들을 몹시 멸시하자 무신들의 불만과 노여움이 더욱 심해졌다.

그 다음날인 8월 30일, 왕은 환궁하지 않고 흥왕사에서다시 보현원(普賢院)으로 가려고 나서다가 시신(侍臣)을 불러 술을 따르게 하여 마시고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좌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장하도다 이곳에서 가히 군병을연습시킬 만 하다"고 하고는 무신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博戱)를 하라고 명령하였다.(手搏이란 반드시 떨어진 상태에서 상대방을 손만 사용하여 쓰러뜨리는 무예)

의종이 무신들에게 수박(手搏)을 시킨 것은 연일 계속되는행차에 피로해진 무신들에게도 포상을 내릴 구실을 만든 것이었으나 왕의 은총이무신들에게 가는 것을 시기한 문신 한뢰 등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장군이소응(李紹膺)이 한 사람과 겨루다가 패하여 달아나자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이소응의 뺨을 치고 쓰러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소응이 넘어지자 왕은 주위의 문신들과 함께 손뼉을치며 웃었고, 정중부 등 무신들은 안색이 변하고 손이 칼자루에 닿았으나 정중부의만류로 일단 칼을 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중부는 소리 높여 한뢰를 꾸짖기를 "소응이비록 무부(武夫)이지만 벼슬이 삼품(三品)인데 어찌 이다지 욕을 심하게 주느냐"하니왕이 정중부의 손을 잡아 위안하고 화해를 시켰으나 분위기는 몹시 살벌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가(御駕)가 보현원 가까이 갔을때, "오른쪽 어깨를 벗고 머리에 쓴 복두( 頭)를 벗어 던지는 것을 표시로 하여그렇지 않는 자를 모두 죽이자(袒右居복頭 否者 皆殺之)"고 무신들은 서로간에약속하고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이 먼저 보현원에 가서 왕의 명이라 속이고순검군(巡檢軍)을 한 곳에 집합시켜 이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왕이 보현원에 들어서고 여러 신하가 물러나려고할 즈음, 이고 등이 기거주 임종식과 이복기를 그 자리에서 쳐죽였다.

그러나 좌승선 김돈중은 사태가 심상치 못함을 예감하고중도에서 술에 취한 양 거짓 말에서 떨어져 달아났고, 한뢰는 환관에게 의탁하여몰래 안으로 들어가서 왕의 침상 밑에 숨었다.

정중부가 환관을 시켜 한뢰를 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한뢰가 왕의 옷을 잡고 계속 나오지 않자 이고가 칼을 뽑아 들고 들어가 위협하니그제야 나왔는데 나오는 즉시 죽여 버렸다.

이어서 승선(承宣) 이세통(李世通), 내시(內侍) 이당주(李唐柱)등 무릇 왕을 호위하던 무신 및 대소 신료와 환관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시체가산처럼 쌓였는데, 무신들이 죽음을 당한 것은 오른쪽 어깨를 벗지 않고 복두를 쓰고있었기 때문인데 미쳐 이들 모두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아 그대로 있다가 변을 당했던것이다.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여러 무인들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들은 더욱 교만 횡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김돈중을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김돈중이 궁성으로 돌아가 태자를 설득하여 궁성문을 닫고 난동의 수령(首領)을 잡아야 한다고 아뢰면 자칫 무신들의 거사가 수포로돌아 갈 수도 있었다. 이를 걱정한 정중부 일당은 만약 일이 잘못되어 거사가 실패한다면남해나 북녘의 오랑캐 나라인 금(金) 나라로 피신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걸음 빠른자를 서울인 개경에 보내어 사태를 관망하게 하였다.

정탐꾼이 밤중에 성안에 들어가 김돈중의 집을 엿보았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기에 문을 두드려 하인에게 김돈중의 행방을 물었더니임금을 따라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므로 즉시 돌아가 그대로 전하였다.

이에 정중부 등은 날쌔고 용맹 있는 자를 뽑아 곧장서울로 보내어 궁중에 난입하여 숙직 중이던 문신들을 모두 죽인 후 사람을 시켜거리에서 외치기를 "무릇 문신(文臣)의 관(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 할지라도씨를 남기지 말게 하라(凡戴文官者 雖至胥吏 비殺無遣種)"하니 군졸들이 벌떼처럼일어나 판리부사 치사 최유칭(崔유칭), 판리부사 허홍재(許洪材) 등 문신관료 50여명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9월 1일, 왕은 강안전으로 들어갔고, 왕광휘이란 자가동배(同輩)를 모아 정중부를 치려고 했으나 사전에 일이 누설되어 정중부 등은 내시10 여명과 환관 10 여명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으며, 왕을 협박하여 왕은 군기감에태자는 영은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가 곧 이어 왕은 거제현에 태자는 진도현으로추방하였으며 태손(太孫)은 살해하였다.

이 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대관전에서 왕의 동복(同腹) 아우 익양군(翼陽君) 호(皓)를 맞이하여 즉위케 하니이가 곧 명종(明宗)이다.

김돈중은 보현원으로 왕의 행차를 따라 가다가 거짓으로말에서 떨어져 도망하여 감악산에 숨었다. 이래저래 김돈중에게 원한이 많았던 정중부가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그의 체포를 독려하였으나 찾지를 못하고 고심하고 있던 중그 하인의 밀고로 잡혀서 냇가의 모래사장에서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사태를 관망하려고보냈던 하인이 거액의 현상금이 탐이 나서 그를 밀고 했던 것이다.

세상은 다시 무신들의 천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무신들은 전날의 서러움을 거울 삼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하는데사정은 전혀 그러하지를 못했고 오히려 수탈과 축재에만 열을 올렸으니 더욱 답답할노릇이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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