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울던 날
심 영 희
세상에서 배고픈 설움만큼 서러운 일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먹고 사는데 온갖 노력을 한다. 육칠십 년대는 거지도 많았고 몇 년 사이에는 경제불황이 만들어낸 노숙자들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현대판 거지 노릇을 하고 살아 갔다. 하루가 얼마나 지겹고 희망이 없는 생활인지 상상은 가지만 경험자가 아니면 그 아픔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마음 아픈 그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가슴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내가 겪었던 삼십여 년 전 배고픈 서러움은 여자들이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서러움이다. 출산일이 가까워 병원에 갔더니 삼일 후에 다시 진찰 받으러 오라는 산부인과 의사 처방에 홍천을 다녀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병원에서 나와 터미널로 갔다. 기분이 좋았다. 언니네 집에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한 작은 언니 출산을 돕기 위해 어머니께서 언니네 집에 오셨기에 찾아 뵈었다. 언니네 집에 도착하자 반기시던 어머니께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빨리 집에 가야지 언제 아이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다니면 어떻게 하느냐며 염려하셨다. 여동생도 함께 왔기에 네 모녀가 이런저런 얘기로 거의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언니가 먼저 출산한다니 언니바라지를 해야 하니 나의 바라지를 해 줄 수 없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옛말에 한 지붕아래서 같은 해에 같이 출산을 해도 안 되고 한 사람이 여러 사람 바라지를 해도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예전의 산파나 의사들은 하루에 하루에 몇 명씩 출산시켰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산부인과 의사들은 하루에도 몇 명씩 아이를 받아내는데 왜 전에는 그런 것을 지켜야 했는지.
결국 욕심 많은 작은 언니께 어머니를 빼앗기고 방학이라 교육받으러 온 여동생과 춘천으로 왔다. 저녁을 먹은 후 어제 저녁 밤을 새웠기에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잠 자고 일어나자 갑자기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동생도 아이를 낳은 엄마였지만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발만 동동 구르는 여동생. 세상천지 모르고 쌔근쌔근 잠자는 아들과 진통에 몸부림치는 산모. 이 세 사람을 하늘만 지키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어 시간 진통 끝에 할 수 없이 동생을 시켜 함께 근무하던 교감 선생님 사모님을 모셔 오게 했으나 아직 이십 대인 산모는 창피하다는 생각에 사모님을 들어 오게 할 수 없었다.
사모님이 도착하고 십 분도 채 안되어 둘째인 딸아이가 탄생했다. 방에 들어오겠다는 사모님을 기어이 돌려보내고 동생이 병원에 가지고 갈려던 준비물에서 배냇저고리와 기저귀 포대기 등을 꺼내고 나는 학창시절 가정시간에 배운 대로 탯줄을 산모 쪽에서 신생아 쪽으로 밀은 후 7cm정도 길이로 잘랐다. 실습을 제대로 한 셈이다. 질긴 탯줄이 잘라지자 나는 눈을 딱 감아버렸다. 피곤이 몰려왔다.동생 도움으로 아기 목욕도 시키고 첫국밥도 먹었다.
이런 난리를 겪는 동안 날이 밝았다. 동생이 첫 버스로 시댁에 가서 형부를 보내고 자기는 연수 받으러 갔다. 방학이라 어머니 집에 다니러 갔던 남편이 허둥대고 와서는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리는데 서러운 눈물과 함께 지난 밤 일이 꿈처럼 아른거린다.
출산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시지 못하는 어머니 심정은 오죽하랴.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니 아이 태어날 까봐 꼼짝할 수 없었던 어머니 그때 속앓이가 엄청 크셨다고 하셨다.
출산 이틀 뒤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오시더니 미역국 한번 차려 주시고는 시동생 밥 때문에 집에 가야 한다 시며 “너가 밥해 먹어라. 해먹을 수 있지”하시더니 어떻하니 어떻하니만 연발하시며 집으로 돌아 가셨다. 이제 내 식사 해결은 전적으로 남편 손에 달렸다. 맛없는 밥이지만 굶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출산 오일째 되던 날 학생들이 옥수수를 삶았다며 먹어보라고 가지고 왔다. 아무 생각 없이 옥수수 한 통을 집어 들고 먹어 보았다. 맛있었다. 내친김에 또 한 자루를 먹어 치웠다.
드디어 밤에 배탈이 나고 말았는데 남편은 일직이라며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바꿀 수 없느냐는 내 말에는 대꾸도 없이 융통성 없는 그는 학교로 가버렸다. 배탈이 나서 아침도 굶은 산모가 몇 차례 화장실 드나들다 결국 방에 쓰러지고 말았다.부엌에 가서 밥 챙겨먹으려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일어서다 쓰러지고 일어서려다 쓰러지기를 몇 차례. 쌀통에 쌀 있고 지갑에 돈 있어도 쓸모 없던 배고픈 그날. 서러워 서러워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친정 어머니를 나에게 빼앗길 까봐 미리 모셔간 언니는 꼭 열흘 뒤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욕심 많은 언니. 욕심만큼 잘 살기는 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것 같다.
삼월 삼짇날은 아버지 어머니 생신 날이다. 온 가족이 모이는 친정에 가기 위해 이틀 전에 언니와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춘천에서 강릉 행 버스를 탔다. 첫 경유지인 홍천 터미널에서 작은 언니와 만났다. 춘천에서 승차권을 구입한 내 자리는 앞쪽이고 홍천에서 표를 산 언니는 당연히 뒤쪽이었다. 횡성을 거의 왔을 때 언니가 내 옆에 오더니 귓속말로 자기는 임신을 해서 차멀미가 나니 나보고 뒤에 가 앉으라고 했다. 두말 없이 일어나 뒤에 가서 앉았다.
집에 도착해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을 가족들께 얘기했더니 모두 한바탕 웃으며 나도 임신해서 안 된다고 하지 바보처럼 자리를 빼앗겼냐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한마디씩 했다.
같은 달에 태어난 딸과 조카. 좋게 말하면 나는 언니께 모든 걸 양보했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언니는 내게서 모두 빼앗아 갔다.
춘천의 변두리
전화도 택시도 없던
칠십 년대 초
새벽 ㅇ시 5분보다
더 처절했던
배고파 울던 날
출산 이십여 일 만에 친정에 쉬러 갔다. 친정 식구들을 보자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어머니와 언니께 배고파 울었던 얘기를 하면서 내가 쌀이 없어 굶었나 돈이 없어 굶었나 밥해줄 사람이 없어 굶었다고 엉엉 울자 어머니도 따라 울고 큰언니도 따라 울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미쳤지 나오지도 않는 아이 기다리느라 몸 풀은 딸 밥 한번 못해줬다”고 한탄을 하셨다. 대가족에서 딸을 위해 언니네 집에서 이십 일 계시다 오신 어머니. 출산 한 셋째 딸 집에 못 오시고 언니 출산을 위해 기다린 열흘은 가시방석에 앉아서 살았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첫 아이는 어머니 바라지로 편안하지 않았던가.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하루 배고픈 것도 기가 막히는데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까지도 우리 국민의 어려움보다 북한에 보내는 물자가 너무 많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어느 TV프로에서 우리 남한도 국제적 도움을 구십 년대까지 받아왔고 이제 구호물자를 받지 않은 지가 십 년도 안 된다며 우리가 받은 만큼 후진국에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내 식구를 먼저 챙겨주는 것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