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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정기총회 반대의견입니다
2014년 12월 12일 가정통지문으로 송달한 내용입니다.
존경하옵는 회원 동지 여러분 !
동지(冬至)가 멀지 않는 이때 우리회원님들 건강 잘 챙기시지요.
지난 번 통지문의 탄원서에 서명하여 보내주신 점 머리 숙여 감사말씀 드립니다.
오늘은 지면 관계상 간단한 보고사항을 올리고 “12월 19일 정기총회개최 부당함”
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1. 보고사항
2014년 12월 9일 서울지방법원 378호 법정에서 마지막 변론을 마치고
“(사)한국파독광부 간호사 간호조무사연합회” 의 ‘사원총회무효소송’
사건번호 : 2014 가합 29952호에 대한 선고를 2014년 12월 23일
오후2시에 하겠다는 부장판사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 과반수 찬성표를 득하지 못하고 당선된 자로 말미암아 고소인이 승소를
하면 2014년 6월 5일 이 후 이뤄진 모든 것이 무효가 되는 것이고 앞으로
12월 19일 정기총회에서 의결된 것도 다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대표이사 재신임을 묻기 위한 총회는 우리들의 회비만 축내는 것입니다.
결론 : 2014년 12월 23일 판결을 보고 정기총회를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2014년 12월 19일 총회에서 대표이사가 재신임 됐다고 해도 다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임시이사회에서 12월 19일 정기총회를 개최한다고는 하였으나 항상 밀실에서
이뤄지는 사항이라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 2. 보고사항
2014년 12월 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사건번호 : 2014카합857
‘직무집행정지가처분 및 직무대행자개임’에 대한 판결의 요지는
“비송사건절차법 제19조에 따라 이를 취소 또는 변경할 수 있을 뿐이고,
가처분을 통해 임시이사를 개임 할 수는 없다” 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결론 : 2014년 12월 23일 ‘사원총회무효소송’이 이변이 없는 이상
고소인이 승 소한다면 ‘비송사건절차법 제 19조를 신청할 것이고
개임신청이 받아 드 려지면 현재 임원진들은 물러나고 법원에서 선임된
직무대행자가 다시 와서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합니다.
존경하옵는 회원 동지 여러분 !
2015년은 우리들이 ‘국가유공자’로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바쁜 한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고자 하는 대통령의 마음을 읽으시고 서로 합심하여야
합니다.
대통령의 임기 내에 국가유공자가 추진돼야 하는데 현재 연합회이사들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2만 파독 근로자들의 ‘국가유공자입법화’ ‘진폐환자처우개선’
‘12. 21 국가기념일제정’은 우리들의 숙원사업이고 꼭 이뤄야 하는
과제입니다.
지금처럼 모든 사업이 정지돼 있으면 안 되고 송사를 즐기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지난 과오를 탓할 것이 아니고 국가유공자입법화를 새로 시작하여야 합니다.
12월 19일 정기총회개최 시 참석 및 서면(의결권위임장, 투표) 동의를
거부하시고 12월 23일 판결을 기다려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2월 12일
12월 19일 정기총회 반대위원
심극수, 박상배, 배용찬, 박용수, 강명수, 천종윤, 김병연, 황보수자, 유웅재,
이병종, 김영식, 김재연, 염동회, 이윤규, 전병덕, 양용현, 김오식, 이재영,
최회석, 김정봉. 민석기, 강병태, 이흥규, 유원상, 김경환,
추신 : 우리연합회의 미래를 결정 할 아주 중요한 판결이 2014년
12월 23일 오후2시 서울중앙지방법원 378호 법정에서 열립니다.
회원님들께서 방청하셔도 됩니다.
개관식에 상영한 파독근로자들과 박정희대통령 독일방문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
player_embedded&v=3zcKdkH4F7c
파독광부 ‘잃어버린 세월’
기념관 건립 꿈 실현
金泰雨(김태우) 회장, 건립기금 20억 국회승인
석탄 사양화 됐지만 조국근대화 기여
나라가 몽땅 가난할 때 서독광부로 돈벌러 갔던 파독광부들이 총연합회를 설립, 그때 그세월을 추억하며 각종 기록을 남겨 후세에게 전달코자 한다. (사)한국파독광부 총연합회는 지난 2008년 2월 창립이래 600여 회원으로 결속하여 서울 양재동에 기념관 건립의 꿈을 추진하庸�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처럼 잊혀진 파독광부들의 삶과 조직애를 되살리고자 한다.
성공한 파독광부의 한가지 꿈
연합회 김태우(金泰雨) 회장은 한동안 잊혀졌던 파독광부들의 인생이 총연합회
창립 이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옛 동지들이 모이고 국가와 사회가
새삼 관심을 보여주어 곧 기념관 건립의 꿈을 이루게 됐다고 밝힌다.
김회장은 특히 KBS의 대한민국 100년 드라마에서 파독광부의 삶이 자세히
소개된 후 지난해말 국회가 ‘파독 광부, 간호사 기념관’ 건립지원비 20억원을
승인하여 곧 착공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소개한다.
김회장은 그사이 독일과 우리나라의 탄광산업이 사양화되어 이대로 가면
파독광부의 발자취 마저 사라질 운명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독일의
탄광지대도 쇼핑센터나 레저시설로 바뀌고 겨우 1개 탄광만 가동하고 있고
파독 직전 체험훈련 받은 국내
탄광들도 문을 닫고 카지노로 변모했으니 세월이 너무나 많이 변했다고 지적한다.
김회장 개인은 파독광부로 귀국하여 영화인으로 크게 성공하여 모자람이 없다. 서울 중구 필동 2가에 필름 프로덕션 신영(新映)을 설립, 영화계 명사로 출세했다.
그렇지만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이 조국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이 세월의 무상 속에 묻혀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이 때문에 총연합회 설립에 앞장서서 흩어졌던 동지들이 모여들고 기념관 까지 건립하게 됐으니 마치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파독광부 8천명 중 2500명 귀국
파독광부의 누계는 총 7,947명에 달하지만 현지에 3,000명이 체류하고 귀국한
사람은 2,500명으로 집계된다. 나머지는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이민 갔으니
파독광부가 당초 목적대로 더넓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맡은 셈이다.
김태우 회장과 경제풍월의 만남은 파독광부 출신의 택시기사 이재영씨 이야기가
연결고리가 됐다.
이재영씨는 서울 상암동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을 방문하여 파독광부로서 “막장인생 추억에 울컹했다”(경제풍월 2012. 5월호)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김회장은 대학생 신분으로 파독광부를 지원하여 3년간 막노동하면서 영화를
공부하여 1968년 4월 귀국후 영화계에 투신하여 첫 작품 ‘황혼의 부르스’
히트로 성공했다.
그렇지만 김회장은 요즘 빌딩의 계단을 오르는데도 숨이 찰만큼 광부의
직업병을 안고 활동하고 있다.
김회장은 자신의 폐질환을 먼 타국의 지하 탄맥에서 콜럭콜럭 바쁜 숨을
몰아쉬며 조국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했던 ‘영광의 상처’라고 담담히 일러준다.
대학 3학년때 기회의 나라 도전
김회장은 고대 경제과 3학년 재학중에 동료들과 함께 파독광부로 지원했다.
2차대전 이후 성공모델국인 서독은 기회의 나라로 가난한 대한민국
청년에게는 탐험과 도전의 대상이었다.
파독광부로 선발되자 당시 노동청이 삼척, 장성탄광 등지에서 석탄개발
체험훈련을 시키고 독일문화에 적응토록 기초교육을 시켰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독일의 탄맥은 우리나라 탄광과는 전혀 달랐다.
석탄층과 암석층이 따로 갈라져 형성된 ‘시루떡형’으로 탄맥을 잡아 캤다.
반면에 우리나라 탄광은 ‘고구마형’으로 여러 갈레로 갈라져 있어 한줄기를
캐고 나면 또다른 줄기를 찾아 캐야 한다.
탄맥은 주로 대도시 지하에 부존되어 있었다. 지하 1,000m의 광맥 일대는
36~37도 지열로 후끈거렸다. 입구에서 막장까지 왕복 2시간을 빼면 1일
8시간 가운데 채탄작업은 6시간, 생산 책임량을 조기에 달성하게 되면
중간에 자율적으로 휴식을 취할수 있으니 잔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각자가 준비해 간 식사는 탄가루 속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
광부의 생활이란 어느 나라나 막론하고 탄가루 인생일 수밖에 없었다.
서독임금체계는 땀과 위험 비례
김회장은 1일 3교대 가운데 야간반을 선택했다. 아침반, 오후반에 비해
야간반에는 위험수당이 추가되니 ‘이왕이면 한푼이라도 더’라는 욕심이었다.
김회장은 당시 서독의 임금체계가 ‘땀과 위험에 비례’하는 정확한 산술이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월평균 1,200~1,300마르크 급료에서 세금을 공제한 후 1,000마르크를
받았으니 당시 우리돈으로 5만원의 고액이었다.
국내 최고의 직장으로 꼽힌 은행원 월급이 4천~4천5백원이었으니
10배가 넘었다. 김회장은 파독 1년6개월만에 대지 50평의 자택을 구입했다.
그뒤 1년6개월분의 급료는 현지에서 틈틈이 영화공부하고 촬영장비
구입하고 창업자금으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김회장은 파독에 앞서 제일은행에 근무하는 약혼녀와 3년 이별이 난감했다.
궁리 끝에 서로가 장래를 약속한다는 굳은 의지로 혼인신고 하여 호적상
부부가 됐다.
그러나 김회장이 출국한지 4개월만에 아내가 기혼여성이라는 이유로
은행에서 해고됐다. 그때는 그런 세월이었다.
이에 김회장은 독일에서 매월 아내의 은행월급에 해당하는 4,000원씩
따로 송금했다고 한다.
광부 이후 진로로 영화 선택 성공
김회장은 파독광부 생활을 시작하면서 3년후의 진로를 깊이 고민했다.
여가가 생길 때마다 공부를 계속하여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다른 한편으론 유망사업을 발굴하여 창업하는 꿈, 제3국으로 진출하여
글로벌 비즈니스를 이룩해 보겠다는 야망도 가져봤다.
이 가운데 창업 아이템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서독 제3TV의 교육과 사이언스 채널이 매력이 있었다.
어느날 TV를 통해 ‘쇠는 살아 숨쉰다’는 영화를 감상한 후 무릎을 치고는
‘내 인생은 영화’라고 다짐했다.
당시 서독의 모든 직장은 월 1회씩 시청각 교육을 권장하여 안전과 품질관리
및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려 했다.
이에 감동받아 영화사 청업을 준비하고 1968년 4월 귀국하여 필름 프로덕션
신영을 설립하니 파독광부로서의 꿈을 실현했다. 첫 작품 ‘황혼의 부르스’
히트 이후 대전 EXPO 한국주제관 ‘달리는 한국인’을 제작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주재한 월례 경제동향보고 회의, 전두환 대통령 시절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주제 영화로 제작했다.
김회장은 영화제작 뿐만아니라 영화장비 기술용역 분야에서도 크게 성공하여
많은 파독광부들의 성공 스토리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남은 꿈은 파독광부총연합회의 기념관 건립과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동료 및 국내 어디엔가 머물고 있을 동료들과 소통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골몰한다.
김회장의 절박하면서도 소박한 꿈을 듣고 독일과 한국의 석탄산업이 사양화
되어 있을때 50여년 전에 있었던 파독광부들의 땀과 고뇌가 ‘잃어버린 세월’
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결코 안된다고 동의하게 된다.
▲ 국제회의장을 가득 메운 파독 광부들. ⓒkonas.net
▲ 21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파독광부 최초 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회에 참석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겨예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 대사. 맨 우측은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
▲ 김태우 회장. ⓒkonas.net
파독광부 47주년 기념 특별강연-고난의 벽을 넘어 기적의 한강으로-
파독광부 역사를 회고 한다
2010년 12월 21일 화(서울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주최:(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후원:한국산업개발연구원, 주한 독일대사관, 보성파워텍
지난 21일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회색의 빌딩 서울 도심을 휘감아 돌아가는
아침 시간 프레스센터 20층에는 희끗한 반백의 신사들이 국제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깊은 주름과 함께 검은 반점이 거뭇하게 묻어난 모습의
깊은 눈에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하지 못한 그분들만의 아픔과 슬픔이 번져 있었다.
그들이 이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은 47년 전 바로 12월 21일 김포국제
공항에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머나먼 타국 독일 땅을 향해 가난한 나라 조국을
살리기 위해 떠났던 이 나라의 종자돈을 마련키 위해 조국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몸을 담보로 독일 광부로 떠난 날이었다.
왜 그들이 독일 광부를 지원했어야만 했을까. 전쟁 끝에 초토화된 대한민
국에서는 먹고 살 것이 없어 하루를 연명해야하는 것이 하루하루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 그 젊은이들이 선택해야만 했던 외화벌이로 가난에서 벗어나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날 김태우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주한 독일대사 한스-울리히 자이트대사가
축하를 해주었으며 고용노동부 장관 박재완장관의 축사와 이정현 국회의원의
축사, 그리고 임도수 한국디자인경영협회장 보성파워텍 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백영훈 산업개발원장의 강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울리고 또 울렸다.
광부에서 교수가 된 권이종 부회장님의 회고에서는 그 어려웠던 회상에 격한
감동으로 강연을 다 잇지 못할 정도였다.
본인이 태어난 1963년 그 해에 먼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청년들의 지난 시절
강연을 들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내 유년 시절 가난했던 시골을 떠올리며 그후로 발전한 지금에 살 수 있는
것이 그 어르신들의 피땀 흘린 노고였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드린다.
1963년 12월 21일 47년 전 바로 오늘 김포공항,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2억만리 독일 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날입니다.
귀설고, 입설고, 낯설은 독일 땅에 도착한 우리들은 스스로 선택한 일,
누구를 원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순간을 이겨내지 않으면 앞날이 없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해고당하면 독일 땅을 강제로 떠나야만 되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땀과 피와 의지만으로 주어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16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사절단이 독일을 국빈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독일로 오실 때 비행기 일반석을 타고 오셨습니다.
얼마나 나라 사정이 어려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독일로 오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64년 12월 10일 오후 8시 페스탈로치 광산 홀에는 파독광부, 간호사와
교민 등 800여명이 숨죽이며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그곳에 들어오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울음이
복받치고 애국가가 연주되고 단상에 오르셔서 연설을 하시는 순간
한쪽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라가 못사니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지하 수천 미터 막장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에 피눈물이 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들은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더 참을 수 없어 쏟아진 것입니다.
대통령 내외분은 이미 우리들에게 어머니, 아버지였습니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고 형제들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고 건강하게 일 잘 마치고 조국에 돌아와
잘사는 나라 조국근대화에 다 같이 일하자는 말씀에 우리들은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김태우 파독광부사단법인회장 환영사 중
김태우 회장은 "파독 광부들의 땀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불씨가 돼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도록 기념관을 세우는 게 목표"라며 "
세계에 흩어진 파독 광부와 그 후손들이 모국을 찾았을 때 쉬어갈 작은
숙박시설도 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독일 탄광 지하 1200미터 죽음의 막장, 탄광에서 희생당한 대한의 젊은
광부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박정희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권이종 파독광부사단법인 부회장)회고록 중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과 김태우 회장
백영훈 박사님은 박정희대통령 내외 독일 방문
시 한.서독 정상회담서 통역 맡았다.
그때 그 시절 박대통령 내외와 독일에서 있었던 일 특히 차관을 빌리는
과정 등에 참여해서 통역을 맡아 독일광부들에 대한 회고는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 백영훈 박사의 강연시간 내에
청중들은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흑백 영상을 보며 그때를 회고 하는 그때의 파독광부들 이미 나이는 60을
넘고 70을 훌쩍 넘겼다. 그때 함께 떠났던 동지들 중에 탄광에서 사고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지병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 이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47년 전 오늘을 회상하며 듣는 애국가는 어떤 의미일까. 살아 돌아와
경제건설의 주인공이 된 나라의 종자돈의 산 증인들에게 애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애국가만이 아닐 것이다. 절체절명의 선택하에 듣는
애국가 피눈물 나는 감동과 뜨거운 피를 끓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파독광부사단법인 초대 회장 김태우(신영필름회장) 환영사
전세계로 흩어진 파독광부 출신들을 규합하고자 만든 파독광부사단법인,
그 시절 고려대 3학년 재학 중이었다가 지원한 파독 광부, 혹시라도 합격하지
못할까봐 일부러 석탄가루를 묻혔던 추억을 떠올리며 위험했던 탄광 지하막장
시절과 박정희대통령 부부의 방문으로 울음바다를 일으켰던그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독일에서 돌아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영화사업에 뛰어들어 국가발전을 위한
영상을 제작했다. 지난 해 48년 만에 고려대학을 졸업했다.
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고난의 벽을 넘어 기적의 한강으로 강연회에
300여명이 참석했다. 그 젊었던 시절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그들의 머리와 얼굴엔 역경이 세월이 새겨졌다.
당시 수도 본시, 베를린 장벽, 무명용사묘지 등을 순방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 대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독일에 방문한다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뤄낸 `통독의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베를린을 방문해 지금은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둘러볼 예정이다
청와대 관게자는 `박 대통령이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룬 독일에서
통일의 꿈을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만난다.
세계적인 기술경쟁력을 보유한 독일 히든 챔피언 기업의 협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