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봄 소풍 가듯 점심을 싸 들고 화곡동에서 걸어 부천 원종동 들판 김포공항 보이는 넓은 들로 나간다.
봄볕 따사로운 들판이건만 고강리 밭두렁에서 쑥 캐시던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아 돌이켜 생각하니 사십 년 인생은 그리움으로 쌓은 성(城)이었다.
텅 빈 들판에서 아내와 쪼그려 앉아 쑥을 캔다. 계사년 새봄을 캔다. 아득한 그리움을 캔다. (2013. 04. 04. 부천 원종동 들판에서)
햇볕 따뜻한 봄날이다. 아내가 쑥 캐러 가자고 한다. 봄 내음을 한껏 맡아 보자는 것이다. 하긴 쑥은 우리나라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단군신화에도 나오지 않는가. 쑥은 당근 마늘과 더불어 성인병을 예방하고 노화를 방지해 준다는 3대 식물이다. 밥을 싸고 컵 라면 두 개를 준비하고 김치와 끓인 물병을 준바하여 배낭에 넣었다.
차를 탈 것도 없단다. 집에서 걸어서 서쪽 주택가 골목길로 걸었다. 저 편 내가 11대 교장을 지냈던 신화중학교가 보인다. 화곡동 지역을 벗어나 신월동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신월5동사무소 앞을 지나자니 “방아다리 벚꽃잔치 5월 13일”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그 동사무소 양편 길에는 벚꽃나무가 주욱 심어져 있다. 이런 작은 곳까지 벚꽃잔치를 벌이는구나. 옛날에는 벚꽃이 일본 꽃이라 하여 꺼린 때도 있었으나 왕벚꽃 원산지가 제주도 한라산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부터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지방자치단체마다 우리 꽃 벚나무를 심어 화사한 봄의 전령사를 반긴다. 신월 사거리를 지나 부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천시 경계에 접어든다. 저기 공수부대 담장이 이어져 있다. 큰 길로 더 가니 마침 부천 원종동 벌판이 나온다.
우측 김포공항 가는 길로 조금 가다가 길을 건너 들판으로 들어섰다. “아, 쑥이 많네요.” 아내가 밭두렁을 보더니 반색을 한다. 누군가 시금치 밭을 일구어 놓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쑥을 캐기로 하였다. 아내는 쑥을 캐는 나를 말리면서 “당신은 돗자리 깔고 앉아 책이나 읽어요.” 한다. 전성영의「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를 읽다가 시상이 떠올라 한 수 읊었다.
벌써 낮 1시가 다 되어 컵라면에 밥을 말아 점심을 든다. 오늘 낮 기온이 섭씨 21도라더니 봄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봄볕도 따뜻하니 밥맛이 그야말로 꿀맛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고 행복한 순간이리라.
점심을 먹고 나서 조금 있으려니 어떤 노인이 다가오더니 얼마 안 있으면 이곳도 주차장으로 변한다고 알려준다. 대형 트럭이나 버스 등의 주차장이 되는 모양이다. 서울은 끝없이 팽창한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1965년 내가 맨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시청앞 서울 발전상 전시회에서 당시 서울시 인구가 250만 명이라고 김현옥 서울시장 이름으로 홍보하였는데 지금은 천 만이 넘고 경기도까지 넘쳐나서 경기도 거의 모든 군들이 도시화가 되었다.
하긴 이 곳 부천시도 당시에는 인구 2만 정도의 소사읍이었는데 지금은 정부에서 서울과 인천의 위성도시로서 중동신도시까지 개발을 장려하여 인구가 경기도에서 수원 성남 다음으로 많은 87만 명에 가깝다고 한다.(2013년 1월) 서울과 경기도가 거대한 하나의 도시로 발전했으니 그야말로 수도권이다. 하긴 서울 인천 경기도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 5천만의 절반을 넘는 2,500만 명 이상이다.
아내가 쑥 캐는 모습을 보니 그 옛날 아들집에 상경하시어 마을 할머니들과 고개 넘어 부천 고강리 밭두렁에서 쑥 캐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헤아려 보니 벌써 40년이 다 되었다.
1973년 2월말 내가 월남참전 후 귀국하여 김포반도에서 해병 병장으로 제대를 하고 돌아와 큰아버지가 사시던 신월동에 인사차 방문했다가 집값이 싸기에 정착했던 곳이 신월동이었다. 큰아버지는 한양대 건너편 중랑천 하류 뚝방 판잣집에서 사시다가 철거를 당하여 신월단지로 옮겨오신 것이다.
당시 신월동 산59번지 일대 야산을 밀어 주택지로 만들고 철거민 1세대당 20평씩 주어 집을 짓고 살도록 했으나 생활여건이 마땅치 않는 철거민들은 권리를 팔고 떠나고 있었다. 허름한 블록집 한 채가 20만원이었다. 너무 싸다 싶어 군대 가기 전 마련해 둔 전세방값을 동원하여 사서 입주한 것이 신월동 화곡동을 맴돌며 40년 가까이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돌아올 때는 부천시 입구 수주 변영로 시인 동상도 보고 신월동 단지 주택지도 보자고 하였다. ‘논개’ 시로 유명한 수주 변영로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밀양변(卞)씨 선산이 부천 고강동에 있어 부천시에서 수주공원을 만들고 동상을 세운 것이다.
다시 부천시에서 서울시 경계로 접어든다. 신월동 옛 동양주택 살던 집을 보니 전부 다가구와 연립주택지로 변모되어 있다. 하긴 이곳은 내가 신월단지에 살 때에는 원주민들이 소나무에 소를 매어 놓고 기르던 야산이었다. 그곳을 지나 신월단지로 접어든다. 내가 단지 블록집과 신축한 심 모씨의 새집과 바꿔 살았던 집을 보니 다가구로 신축되어 있었다. 지번도 바뀌었는데 이번에 도로명 주소가 되니 다시 바뀔 것이다. 세월이 가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은 사람도 자연도 그대로인 것은 없다. 하긴 자연도 영원한 것은 없지만...
계사년 쑥을 캐던 오늘의 작은 행복도 지나고 보면 아련한 추억이요, 그리움이겠지. 그 옛날 여기 살던 누이동생들과 다니러 오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하긴 인생은 한없는 그리움의 성을 쌓으며 흘러가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