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고등학교 국어책에도 실려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첫 대목이다. 그 오우가는 마침내 국어책에서 튀어나와, 밥집 간판이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있는 '호박오리구이'집과 서울 명동의 '녹차 대나무 쌈밥집', 그리고 북한산성 입구에 있는 '팥칼국수집' 이름이 모두 '오우가'다. 서울 땅 안팎에서는 시가 '영혼의 밥'이기에 앞서 '육신의 밥'도 더러 되는 모양이다. '오우가'는 고산이 56세 때 해남 현산의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가운데 하나로, 모두 6수로 되어 있는 시조다. '어부사시사'와 더불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활용한 그의 시조 가운데서도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 시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자리하고 있는 고산 윤선도. 그는 '오우가'에서 물과 돌,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홀로 뜨는 달, 이 다섯이면 벗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지금은 후세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생전의 고산은 인적이 닿지 않은 산골짜기에서 은둔하기를 즐겨 하였다. 조선의 으뜸 시인 고산 윤선도의 그러한 '대인기피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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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때 해남윤씨 어초은파 종가 양자로 들어간 윤선도는 어렸을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내비쳤다. 송강 정철과 함께 조선 시가문학을 대표했던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연동 녹우당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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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윤씨 대종으로 '엘리트' 과정 밟다
1587년(선조 20년) 6월 22일. 윤선도는 서울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예빈시 부정 벼슬을 하던 윤유심과 순흥 안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본관 해남윤씨 가문은 해남의 곡창지대인 삼산벌을 지배하는 신흥귀족으로 터를 잡고 있었다. 임란 이전에 삼산벌은 해남 정씨 소유였다. 선대의 예에 따라 정씨 집안에서 자손분균 상속을 하면서 해남 윤씨에게 시집간 딸에게 삼산벌을 떼어주게 되는데, 그 남편이 바로 윤선도의 4대 조부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이었다. 처갓집 덕에 큰 부자가 된 어초은은 균분상속 대신 장자상속을 시행하였다. 더불어 종손이 대대로 재산을 이어받도록 자손만대에 유언을 남겼다. 대를 거듭할수록 불어난 재력을 바탕으로 해남 윤씨 가문은 후세의 교육에 적극 투자하였다. 그렇게 배출된 인물들이 중앙 정계에 다수 진출 하였다. '해남시인' 윤선도가 해남이 아닌 서울에서 태어나게 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윤선도 또한 그러한 배경에 힘입어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였다. 더구나 그는 여덟 살 나던 해에 관찰공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간다. 윤유기는 원래 아버지 유심의 동생으로 윤선도에게는 작은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어려서 종가에 양자로 들어간 처지였다. 그러므로 윤유기와 윤선도는 모두 종가에 양자로 들어가 해남윤씨 대종을 잇게 되는 것이다. 신흥갑부 종가의 대종을 잇게 된 그는 더더욱 엄격한 교육과정을 거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전란이 한창일 때는 산사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다가, 전란이 끝나자 다시 서울의 사학(四學)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리하여 열네 살 되던 1600년, 윤선도는 첫 한문시 '자국도회주(自國島回舟)' 등 3수를 지어 문학적 재능을 내비쳤다. 배를 돌려 날 저물녘에 돌아오노니 (廻舟日暮還) / 반은 취하고 반은 깨어 있는 사이로다 (半醉半醒間) 기러기 한 마리 울며 그래도 가고 있거늘 (一雁鳴猶法) / 지는 해는 산 너머 산에 있도다 (斜陽山外山) 윤선도는 17세에 이르러 남원 윤씨 판서 윤돈의 딸과 혼인을 하고,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20세 되던 1606년(선조 39년)에는 승보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승보시란, 오늘날의 국립서울대학교에 해당하는 성균관 기재(寄齋)에 입학하거나 소과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시험이었다. 이처럼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던 중에, 즉위 41년을 맞은 선조임금은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광해 3년인 1611년 11월, 윤선도는 스물다섯 나이로 해남에 첫 성묘를 내려온다. 해남의 피를 타고 났지만, 사실 그 자신은 서울내기인 윤선도의 눈에 시골의 자연풍경은 아름답고 경이로웠던 모양이다. 젊은 시인은 남행길 곳곳에서 느낀 그러한 감회를 시에 담았다. 그리하여 무려 122구나 되는 7언 고시 '남귀기행'과 '상우부' 등 12가지를 지었다. 1612년(광해군 4년), 윤선도는 진사시에 1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된다. 당시의 문신 소암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은 윤선도의 글을 보고 '당세 제일'이라 감탄하며 널리 추천을 하였다. 그리하여 유생들 사이에 '모설방고산(冒雪訪孤山)'이란 시가 유행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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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에 있는 동천석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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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진소 사건'과 유배의 시작
한편, 윤선도가 살던 조선 중엽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붕당이 가속화된 시기였다. 선조 대에 훈구파와 치열한 대결을 벌여 권력의 주도권을 쥐게 된 사림파 지식인들은 사림 내부의 각 분파들이 권력 배분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되면서 서인과 동인으로 갈리게 된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면서 서인(西人)의 영수가 된 송강 정철은 동인 세력을 철저하게 밟아버린 뒤,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가 계략을 부려 정철이 광해군 책봉 건의를 하도록 해놓고, 그 문제를 탄핵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인은 탄핵의 정도를 놓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뉜다. 유성룡을 필두로 한 남인은 한 때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1602년에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실각하면서 북인에게 권력을 넘긴다. 그리고 북인은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학풍과 정치 노선에 따라 당쟁이 격화되던 시대였다. 남인 계열에 속했던 윤선도 또한 그런 세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본격적인 벼슬을 하기도 전에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집권당인 북인 그룹과 대결하였다. 그리하여 1616년(광해군 8년, 병진년) 12월 21일. 집권당 대북(大北)파인 이이첨 무리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하하는 소를 임금에게 올린다. '정치의 권세가 아래로 옮아감으로써 임금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고, 민심과 풍속이 어그러졌으니,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이첨을 베고 유희분과 박승종 등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상소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른바 '병진소(丙辰疏)'를 올린 것이다. 섣달 대목의 조정은 들끓었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승정원과 삼사와 관학에서는 '한없이 더러운 비방을 받고 누명을 부당하게 뒤집어썼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다'며 윤선도의 벼슬을 파면하라고 주장하였다. 극렬하게 대립되는 두 상소를 접한 광해임금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북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양부 윤유기는 삭탈관직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윤선도는 마침내 서울에서 2천리나 떨어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618년 겨울에는 다시 해 뜨는 동쪽인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된다. 이때 기장으로 이배 가는 도중에 윤선도는 '고산촌'에 잠시 들러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다. '병진소' 사건으로 연좌된 양아버지 윤유기가 머무르고 있는 고산촌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해당하는 곳이다. 또한 윤선도 자신도 왕자사부가 된 40대 중반에 가끔씩 가서 머무른 곳이기도 한 이곳은 한강에 홍수가 일어 강물이 범람하면 이곳은 사면이 물에 잠기는데, 다만 '퇴매재산'만 물에 솟아 있었다고 한다. 바다 가운데 떠있는 외로운 섬처럼 솟아 있는 이 산을 흔히 고산(孤山)이라 불렀다. 윤선도는 당쟁에 휘말려 유배객이 된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이 자연물에 이입하였다. 그리하여 이 산봉우리는 윤선도의 호(號)가 되었다. 한편, 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양아버지 윤유기가 세상을 떠났다. 윤선도는 유배지에서 상을 치렀다. 1621년(광해군 13년) 8월, 양부의 탈상을 할 무렵에 서울에서 동생 윤선양이 찾아와서 '납전해배(納錢解配)'를 제의하였다. 돈을 내고 유배를 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동생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하여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될 때까지 6년가량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된다.
별시에 장원급제, 왕실 사부가 되다
1623년 3월12일. 서인 세력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었다. 당연히 이이첨 일파도 제거되었다. 북인의 시대가 저물고 서인의 시대가 왔다. 이때 남인은 서인의 정변을 인정해준 대가로 정치 참여를 어느 정도 보장받았다. 서인과 남인 사이에 붕당(朋黨)정치가 잠시 꽃을 피웠다. 한편 인조임금은 즉위하자마자 대사령을 내렸다. 6년 만에 드디어 유배에서 풀린 윤선도는 종6품 의금부도사(금오랑) 자리를 제수 받았다. 일찍이 엘리트 사대부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당쟁에 휘말려 정작 벼슬자리 발령을 받지 못한 그에게 첫 벼슬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어느덧 37세였다. 나이를 고려하면 참 어중간한 품계였다. 그래서였을까. 서울로 올라온 윤선도는 3개월간 봉직하다가 사직서를 내고 만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7월의 불볕 속에서 고향 해남으로 향하였다. 그 뒤에도 윤선도에게는 종6품의 고만고만한 자리가 몇 차례 제수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매번 발령장을 정중히 거절하고 계속 해남에서 머무르다가 불혹(不惑)의 나이를 맞게 된다. 그러던 시인이 다시 조정의 문을 두드린 것은, 정묘호란 다음해인 1628년(인조 6년)이었다. 그해 봄에 별시 문과가 열렸고, 이 시험에서 윤선도는 장원으로 급제하게 된다. 당시 시험관 이조판서 장유는 윤선도의 책(策)을 보고 '동국제1책(東國弟一策)'이라고 감탄을 하더니, 이 유능한 시인을 왕실의 스승으로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윤선도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에 임명되었다. 장차 왕이 될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였다. 고산의 왕실 사부 노릇은 그의 나이 46세 되던 해, 병으로 그만둘 때까지 5년간이나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그의 관직은 종4품 사복시 첨정과 한성 서윤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그의 큰아들 인미와, 둘째 의미도 사마시(司馬試)에 연달아 합격하였다. 47세 때에는 봄에 열린 증광향해 별시에 장원급제 하고, 4월의 증광복시에서도 1등으로 뽑혔다. 이로 인하여 윤선도는 예조정랑과관 서경시관 세자시강원 문학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고사하고 해남으로 내려왔다. 다시 사헌부 지평(정5품)에 임명되었으나,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재상 강석기 등의 모함이 있어 이 벼슬 또한 포기하였다. 이후 윤선도는 성산현감을 맡아 잠시 목민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635년에는 삼남지방에 실시되던 양전(量田)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논하는 '을해소'를 올렸다. 그러나 소는 임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약한 세태는 윤선도에게서 소박한 목민관의 꿈마저도 빼앗아갔다. 그해 11월 1일 경상감사 유백증이 윤선도를 탐학한 관리라고 모략을 하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윤선도는 모든 직을 포기하고 파직되어 다시 해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는 길이었다.
부용동에 진정한 은거지 마련하다
1636, 치욕의 병자년 12월 호란이 터졌다는 사실을 해남에서 접한 윤선도는 강화도에 피난중인 원손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집안에서 부리던 사람들 백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이들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포위당한 채 고립되어 있던 인조 임금은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이 이미 인질로 끌려간 뒤였다. 고산은 남쪽으로 돌아가는 뱃전에서 치욕과 분노에 몸부림친다. 마침내 그는 육지에서 뚝 떨어진 제주도로 가서 은거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제주도로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고산을 태운 배는 큰바람을 만나서 경치 좋은 섬에 정박하게 되는데, 그곳이 곧 보길도였다. 고산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터를 닦고 '부용동(芙蓉洞)'이라고 불렀다. 마치 어머니의 품 같은 그곳에서 고산은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 하였다.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라 하고, 십이정각·세연정·회수당·석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해남윤씨의 법적 종손으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였으니, 부용동 일대를 자신만의 낙원으로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부용동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듬해인 1638년 인조는 윤선도에게 대동찰방과 정3품 사도시정을 제수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윤선도는 병을 핑계로 부임치 않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간원(諫院)은 윤선도가 서울에 와서도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으니 죄를 물어야 한다며 여러 차례 청하였다. 결국 그들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임금은 윤선도를 영덕현으로 유배케 한다.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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