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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일본군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 위해 중국대륙에 있어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다. 이른바 "대륙관통작전(大陸貫通作戰)" 또는 "제1호 작전"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상의 제해권을 거의 연합군 측에 빼앗기고 있었으므로 해상연락이나 수송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짜낸 방법이 중국대륙을 북으로부터 남쪽 끝까지 관통하여 육상통로를 확보하는 작전이었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대륙에 진출한 전일본군의 사활이 걸릴 대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은 승승장구했다. 중국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채 참패를 계속했다. 7년 전인 1937년 남경 공방전에서 용맹을 떨쳐 철인(鐵人)이라 불린 탕은백(湯恩伯)장군은 이번에는 불과 3주일만에 하남성(河南省)을 상실함으로써 가장 치욕적인 인물이 되기도 했다. 남방과 서방을 향해 노도처럼 밀고 내려간 일본군은 장사(長沙).계림(桂林).유주(柳州)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리하여 이 대작전은 성공리에 끝나 일본은 조선에서 중국대륙을 관통하여 안남(安南)까지 이르는 대철도망을 연결하게 되었다. 7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군은 70만 병력, 1백 46개의 도시, 20만 평방킬로미터의 지역, 36개의 비행장, 그리고 6천만 이상의 국민을 상실했다. 그런데 이 대륙관통작전과 비견할만한 매우 중요한 작전이 같은 시기에 버마전선에서 전개되었다. 이른바 "인팔작전"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같은 시기에 전개된 이 두 개의 대작전은 그 노리는 바가 서로 달랐다. 대륙관통작전의 목표가 중국대륙을 석권하는 것이라면, 인팔작전은 인도대륙이 그 최종목표였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작전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나 작전 규모의 크기에 있어서 서로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대륙관통작전과는 달리 인팔작전은 처절을 극할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고, 결국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최대치가 참가한 것은 인팔작전이었다. 두 개의 대작전을 앞두고 부대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대륙관통작전은 좀 낙관적이라는 견해에 따라 대치가 소속해 있는 사단에서도 1개 연대 병력을 버마전선에 투입하게 된 것이다. 버마는 일본군에 있어 서부전선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따라서 이미 버마를 점령한 일본군은 인도를 향해 진격태세를 갖춘 것이다. 인도를 점령하면 영국이 항복하리라는 것이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또한 원장(援蔣) 루트(미국이 중국군을 원조해 주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루트로 인도를 거쳐 북부 버마를 통과)를 차단함으로써 중국군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인도대륙을 향한 첫 공격목표가 된 곳이 인팔이었다. 인팔은 버마의 북부국경 너머에 위치한 인도의 요충이었다.
부대가 어디론가 이동한다는 소문이 나돈 것은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행선지가 버마라는 것을 대치가 알게 된 것은 불과 출발 하루 전이었다. 그것을 안 순간 대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국을 떠나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만다.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탈출도 불가능했다. 출발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외출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경비가 강화된 것이다. 대치는 앞길이 암담했다. 탈출이 불가능하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버마에 가서 의외로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음의 땅 버마에다 희망을 던져버렸다. 그러나 문제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남아 있었다. 여옥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량한 전쟁터에서 우연히 만나 가장 비극적인 사랑을 하게 된 이들 조선인 남녀는 그들이 언젠가는 헤어지리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눈앞에 부닥쳐오자 그들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이별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뼈를 깎고 가슴을 찢는 무서운 고통이었다. 특히 그 아픔은 연약한 여옥에게 있어서 더욱 심했다.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대치는 제일 먼저 위안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위안부도 함께 동행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버마에 이미 위안부가 있기 때문에 이곳 위안부는 동행하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남양군도에 위안부가 부족해서 그리고 간다." 대치에게서 만년필을 선물로 받은 어느 군조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군조는 이런 말도 덧붙여 말해 주었다. "그런데 말이야. 남양에 가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양키 배가 득실거려서 십중 팔구 상어밥이 되게 마련이지. 그리고 무사히 간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어. 남양에서는 지금 한창 죽냐 사냐 하는 판이니까 말이야." "남양 어디로 갑니까?" "그건 모른다. 아직 결정이 안 된 모양이야. 그런데 왜 그런 걸 묻나? 헤어지게 되니까 섭섭해서 그러나? 거기까지 계집에 꽁무니를 따라가고 싶나?" "아, 아닙니다." 대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연병장으로 나와 어둠 속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옥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옥은 이제 그에게 있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여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에는 강한 책임 의식도 뒤따르고 있었다. 먼저 동정심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결국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승화되었다. 서로가 기구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만큼 그들의 사랑은 그 응집력이 유난히 강했다. 단 하루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므로 대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위안소 출입을 했다. 그들의 관계는 이윽고 부대 내에도 알려져 대치는 걸핏하면 병사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놀림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갈수록 그는 여옥이 아름답게 보였고, 그녀의 끊어져버린 재능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여옥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아기냐 하는데 이르러서는 모두가 의견이 분분했다. 그것이 대치의 아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기의 임자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그것은 시끄러울 정도로 화제의 초점이 되었다. 대치는 짖궂은 병사들의 질문에 일체 대답을 회피했지만 그 아기가 자신의 씨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여옥이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옥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당황했다. 숱한 병사들을 상대하는 위안부가 임신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매일 남자들을 상대하다 보면 멘스가 없어지고 불감증이 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오래 계속되면 여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 임신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여옥은 임신을 한 것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대치가 여옥을 만나 임신 여부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말없이 울기만 했다. 아직 눈에 띄게 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임신에 대한 지식이 있는 남자가 볼 때는 임신이 틀림없었다. 처자가 있는 어느 나이 많은 병사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여옥이 임신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와 대치가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사랑은 육체적 결합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이루어 놓았다. 이것이 임신을 가져온 것이다. 여느 병사들은 위안부와 관계할 때 으례 콘돔을 사용했다. 고무가 귀했기 때문에 콘돔도 부족했다. 그래서 병사들은 한번 사용한 콘돔을 버리지 않고 깨끗이 씻어 재사용하고 했다. 이들과 관계할 때 여옥은 최대한 자신을 다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그 나름대로의 기술을 낳았는데 그것은 여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체득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영리한 그녀는 나약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다른 위안부들과는 달리 불감증이나 임신 불능에 빠지지 않고 여자로서의 기능을 고스란히 지닐 수가 있었다. 바로 여기에 대치의 사랑이 깊게 작용한 것이다. 대치와 여옥은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로가 그것을 원한 것이다. 그들은 임신에 대한 두려움도 모른 채 자신들의 사랑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상대방에 탐닉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주었고, 또 서로 모든 것을 차지했다. 이런 관계에서 여옥이 대치의 아들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소문은 병사들 사이에만 나돌다가 급기야 상부에까지 올라갔다. 사실을 확인한 부대장은 놀랐다기 보다는 난처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임신한 위안부를 내쫓을 수도 없었고 수술을 하자니 군대 내에 산부인과 의사나 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귀찮다고 생각할 즈음에 부대이동 명령이 내렸다. 위안부를 데리고 가지 않는 이상 이젠 임신부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결국 상부층의 의견은 "그까짓 위안부의 임신, 군대가 관계할 바 아니다."라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남양군도의 어디론가 다시 끌려가게 될 위안부, 그 위안부의 임신 따위에 신경을 쓸 만큼 일본군이 그렇게 인도주의적일 리는 만무했다. 이제 고통은 여옥과 대치 두 사람만의 것이 되었다. 임신한 그녀를 두고 떠나게 된 대치는 몸둘 바를 몰랐다. 자신이 크나큰 죄를 짓고 말았다고 생각되었다. 자신이 떠나지 않는다고 해서 별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죽음의 늪 속에 혼자 남겨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픔이 좀 덜했을 것이다. 임신한 그녀가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남양군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는 극히 의문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치는 위안소 쪽을 바라보다가 호각소리를 듣고는 발길을 돌렸다. 내일 아침 출발을 앞두고 위안소 출입은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금지라고 하지만 출발 전에 여옥을 꼭 한번 만나야 했다. 취침나팔은 평소보다 두 시간 앞서 있었다. 갈 길이 멀었기 때문에 병사들로 하여금 미리 잠을 자 두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치는 옷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자정이 지나자 그는 화장실에 가는 체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위안소 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여옥의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여옥은 방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녀는 인기척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대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여옥이 그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그녀는 부대가 내일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치는 불을 끄고 자리 위에 그녀를 눕혔다. 그녀는 전신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소리를 집어삼킬 때마다 몸이 격렬하게 떨리곤 했다. 비통한 흐느낌은 가슴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대치는 말을 잊은 채 그녀의 등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지가 않아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자신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저를 죽여주세요." 흐느끼던 여옥이 겨우 말했다. 대치는 그녀의 볼에 자기 볼을 비볐다. "그런 생각하면 안돼. 죽으면 안돼. 살아야 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여옥은 더욱 대치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살기 싫어요. 무서워요." "살아야 돼. 그래야 다시 만날 수 있어." 이 말에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대치도 침묵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오래도록 침묵했다. 뜨거운 가슴과 숨가쁜 호흡을 의식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달래줄 리는 만무했다. 서로를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그리고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욱 더 안타까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대치는 한손으로 여옥의 목을 휘어감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그들은 너무 서로를 밀착했기 때문에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몸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그들을 휩싸고 있었다. 어둠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어둠은 두텁고 칙칙했다. 그 어둠 속에 그들은 영원히 묻혀 버리고 싶었다. 어둠이 걷히면 헤어진다는 생각에 여옥은 온몸을 떨었다. 그녀는 대치가 허락한다면 그와 함께 죽어버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눈을 감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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