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을 만나다|이도화-시집속 자선시
걸어가자, 바위야 외 4편
일어나라 바위야
흙구덩이에 묻혀 시골집 대문이나 지키며 평생 앉아 지
내겠다는 속셈이냐
머리 흰 노인이 기골 장대한 아들과 야생마보다 날렵한
손자를 데리고 더운 순록의 피를 바치던 땅이 있다
바이칼 청잣빛 호수가 얼어붙기 전에
시베리아 푸른 하늘이 하얗게 부서지기 전에
선조들의 성소를 찾아가자, 바위야
검은 동토 흰 숲속
무너진 제단 모퉁이 돌이라도 되어
아침 해를 맞는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캄차카 설산 연봉 사이 막 터진 햇살이 마르기 전에
나서자 바위야
실한 종아리가 야위기 전에 흥안령 긴 산맥을 넘고
툰드라의 벌판과 아무르강을 건너가자
일어나라 바위야, 탄탄하던 걸음걸이가
흘러가던 박자를 놓쳐버리고
놓친 박자에 얼어붙어
산 채 죽은 화석이 되려 하는구나
한 모서리쯤 깨지는 일이 있더라도
걸어가자 바위야
어깨를 잡고 비틀어 줄 테니 발만 성큼 내밀어라
발은 다리를 잡고 다리는 골반을 잡고
골반은 어깨를 잡고
춤추는 광대가 되고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불어오는 바람은 콧등 세워 가르며
걸어가자, 바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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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꼬리로소이다
늘어져 있든 서 있든 개 꼬리는 개 대가리 반대편에
붙어 있다
큰형님의 구린 곳을 마지못해 가리거나 닦아주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편이 낫지 않았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변소 지기에 머물렀다면
조선에까지 들어와 씻지 못할 무거운 죄는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히데요시는 주군의 심기가 흡족하도록 달랑달랑
꼬리를 잘 흔들 줄 알았다
주군의 심기는 꼬리 끝에 예쁜 색색 리본으로
매여져 있었고 사람들은
개 꼬리만 쳐다보게 되었다
나름 영악해서 대가리가 꼬리를 흔들려 할 때
꼬리 밑동을 꽉 부여잡고 어쩌나 한 번 버텨보기도 했다
꼬리가 꼼짝하지 않자 휘둥그레 놀란 대가리
눈을 까집고 보더니
둔한 머리를 흔들어보고 몸뚱이를
부르르 떨어보기도 하는데
머리를 흔들면 꼬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몸통을 움직여도 그렇게 보이는 때가 있었다
현실에 눌려 착각을 믿어보기로 하였으니
세뇌된 대로였다
개 지나간다 설렁설렁 개 지나간다
꼬리가 흔들리고 몸통이 흔들린다
멀쩡하던 사지가 흔들흔들, 컹컹 짖던 개 소리마저
낑낑
아, 어쩌나, 천하의 판도가 이미 바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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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하우스
거목으로 자란 은목서, 번잡한 속가지를 쳐내자
둥글게 부푼 공간이
아이들 작은 꿈 하나 들이기에 넉넉하다
아이들은 꽃다발과 가시에 갈수록 길이 들고
할아비가 줄 수 있는 토끼풀 반지와 찔레 가시는
별것도 아니라서
너른 나무의 품에도 안기게 해주고 싶어졌다
바닥을 뚫고 올라온 줄기와 가지는
살아있는 기둥과 서까래,
잡고 있는 손등에 푸른 피가 돌고
발바닥과 발등은 새 가지가 터져 나올 것처럼 근질거린다
아이들은 나무 위에서도 위험한 장난을 치고
서로 싸워 울기도 하지만
한 번 느려진 심장 박동은 쉬 빨라지지 않는다
내리쬐는 햇빛에 푸른 허파가
대장간 풍로처럼 불룩불룩 부풀어 오르는 시간,
아이들은 편한 대로 누워있기도 하고
줄기에 기대거나 매달리기도 하는데
찌르라기 한 마리가 날아든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날아다녀 나는
얼른 가슴을 풀어헤친 다음
흉곽 한 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이웃 화포천 물가에서 옮겨 심었다는 아름드리 버드나무
봄이 오지 않는 가지에는 눈곱 노란 도깨비 행색만 역력
하다 행여 동티날까 나서는 이도 없는 동네 흉물,
껍질부터 벗겨낸다
몇 날 며칠 전골에 손도끼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매끈히 굳은 살집과 여문 뼈대는
휘감아 오르던 물, 회오리쳐 내리던 불길이었다가
속을 비워 궁근 자리, 공력 높은 수도자라면
들어가 좌선 입적해도 좋을 목관이 되었는데
석룡산 비구니스님은 달마대사 모습이 여실하다며
합장하고 지나간다
동쪽을 바라보는 이, 침묵의 달인이여
옹이와 뼈대와 부라린 두 눈으로 당신 모습 보이소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이여,
버드나무에 한 마디 안부라도 물어 주오
물소리 바람 소리 혹여 까투리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리
거든 버드나무 인사인 양 들어 주오
개울가 축대 위에 버드나무 다라니
새들이 모여 읽고 있다
돌아가던 콜택시 기사님과 지나 가던 낮달이 함께 서서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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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위의 아이들
그때 철로 변 아이들에게 모여 노는 곳이라고는 따로 없었다 멀리 소실점 너머 열차 꽁무니가 사라지면 녹슨 못이나 동전 몇 개만 있어도 철길은 보물찾기 놀이동산, 알라딘의 열차가 마법으로 찍어내는 칼이나 브로치 온갖 무늬 장식물들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쇠붙이를 구하지 못한 날에는 대신 자갈을 레일 위에 올려두기도 했는데
어느 형 손에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가 들려 있던 날, 그 형은 “나쁜 새끼들” 욕을 하며 전의를 불태워보았지만 창백했던 안색은 더욱 노래져 있었다 에워싼 아이들의 궁금증도 한몫한 날, 멀리 우레 소리를 내며 달려와 판자촌을 흔들고 지나가던 무적의 특급열차가 기우뚱 넘어질 뻔했던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몰라서 두려웠고 두려워서 미웠던 세상에 대한 철로 변 철부지들의 사보타지, 같이 불려들어간 부모들이 손이야 발이야 빌어 끝이 났지만 이 아이들은 녹슨 쇠붙이의 변신처럼 훗날 자수성가한 인물들로 성장하였다
그중에는 세상의 주인을 가리자며 정치에 투신하여 민의의 전당에 진입한 이들도 있는데 옛날 철로 변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난다
폭군 열차를 돌 하나로 제압했던 기억이 아직도 짜릿한 듯 추억의 늪에 빠져 열차 박물관을 점거하고 내일을 향해 쏘고 있다*
* 미국 서부 영화(1969), <내일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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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화 시인은 경북 달성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재학 중 토론∙봉사 써클에 참여, 문학과 철학을 꿈꾸었지만 학창시절의 꿈을 뒤로하고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 후 연습선 교관과 상선의 이등항해사로 일하며 살아있는 바다를 체험했다. 이후 ‘사람 관리’와 경영학에 대한 실용적∙학문적 관심도가 높아져 미국 메사추세츠대에서 경영학석사, 퍼듀대에서 경영학박사(인사조직전공) 학위를 마치고 포스코경영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있었으며, 후학양성에 뜻을 두어 인제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6년 전 파킨슨병 증상을 처음 감지하였으나 태극권을 수련하며 현직에 머물다 정년을 3년 앞두고 귀촌에 이어 명예퇴직하였으며 현재는 땀 흘리는 정원 일과 시 쓰기로 최대한 독립적인 삶을 이어가려 노력하고 있다.
시인은 뒤늦게, 줄곧 놓지 못하고 가슴에 담았던 학창시절의 문학의 꿈을 펼치고자 文靑 시절로 돌아가 2017년 《부산시인》과 《부산시조》 신인상, 2023년 《사이펀》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사이펀의 시인들’ 회원이며 시집으로 『출항』(2017), 『온-오프는 로봇명령어가 아니다』(2024)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