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철이 없다는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자식을 낳은 부모가 여기 있다. 지금 서른네 살이 된 아름이의 부모와 자신을 낳았던 부모의 나이인 열일곱 살이 된 아름이. 거의 누워 살다시피 하는 조로증 환자인 아름이의 신체나이는 여든의 노인이다. 이가 빠지고 주름이 생기고 머리숱이 적어지고 점점 눈이 안 보이고, 아름이가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움직이는 손으로 책을 읽고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것밖에는 없다. 아름이 자신은 몰랐던, 부모보다도 더 빨리 늙어가서 그 시절의 부모를 알아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아름이가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엄마 아빠에게 들어오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한다. 마음보다도 몸이 더 빨리 늙어가는 자신이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써가는 글이, 부모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자신을 부모님은 역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이라고 말씀하시던 아빠의 말씀이 진정 진심이었음을,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님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행복의 순간을 놓지 않는다. 트램벌린 위에서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던 그 순간처럼.
이야기의 많은 순간들이 페이지가 계속 넘어가는 것을 자꾸 멈추게 만든다.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시간들을 만들어내면서 내 가슴 속 어디선가 잠자고 있었던 감정들과 기억들을 끄집어내느라 분주하고, 묻어두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가고 싶었던 마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언제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자신을 두근대게 한다는 아름이의 말은 충격이자 공포였고 나 자신을 너무나도 부끄럽게 만들기까지 했다. 하루하루가 무료하다고 투정부리고, 지루하다는 말을 하는 게 일상이었던 지난 시간들이 아름이의 저 한마디로 하여금 다시 보게 했다. 더불어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부모님께 대꾸하던 그 많은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알지도 못하면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부모는, 부모의 자식이었고 지금은 자식의 부모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아직은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나는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고 있는 분명한 입장이었는데 나만 그걸 모르고 투정을 부리고 억지를 부렸나 보다.
마음보다 몸이 더 빨리 늙어가서, 몸의 속도에 맞추려면 마음도 빨리 어른이 되고 늙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름이의 말이 기억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나이라는 숫자가 늘어가고 겉모습이 늙어가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인 것처럼 살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했는데, 아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도 더 빨리 늙어갔던 아름이는 그만큼 더 성숙한 아이이면서 동시에 어른이었다. 부모가 되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름이는 분명 어른으로서 그 생을 마감했던 것이리라.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결코 만나거나 느낄 수 없었던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아름이는 그 누구 못지않은 성숙한 인격체였던 것이라고. 문제는 조로증이라는 병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의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인데 말이지.
인생의 속도, 나이를 먹어가는 속도, 늙어가는 몸과 마음의 속도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무언가가 간절히 되고 싶었던 아름이의 바람도 이루어주고, 슬픔이어서 기쁘다는 부모님의 사랑도 좀 더 받아보고, 거짓으로 끝났지만,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대상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아름이에게 좀 더 만들어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름이에게 두근두근 뛰고 있었던 심장의 울림을 더 들려주고 싶었는데 마냥 아쉬운 것투성이다.
어쩌면 시간이 삶과 죽음의 그 모호한 경계에 걸쳐지면 느낄 수 있을지 모를 감정들을 나는 이 책 한 권에서 다 느낀 듯하다. 공중에 떠 있는 오선지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음표를 보는 듯한 즐거운 웃음과 허를 찌르는 진심이 담긴 농담 같은 아름이와 부모님의 대화, 그들의 생각과 말 한마디마다 느껴졌던 그 재치, 아름이의 가슴 속의 말들을 들을 때마다 흘릴 수밖에 없었던 눈물까지. 아프다는 것은 결코 죄도, 고개 숙일 일도 아니고 슬픔은 더더욱 아니며,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슬픔과 동시에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던 아름이의 이야기였다. 부모가 될 때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시간들, 부모가 되어서야 볼 수 있는 모습들, 부모와 자식이기에 당연히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아름이를 통해서,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배우게 된다.
아름아, 사랑스러운 그 이름 아름아.
이제는 멜로디가 되고, 하늘이 되고, 바람이 되고, 바다가 되렴.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네 안에 가득 쌓아두었던 부모의 정을 나누어주렴. 너의 부모님이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온전한 기쁨과 슬픔이 되어…
# 출처: 네이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