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0. 제갈공명 사당, 논공 무후사(武侯祠)·영모재(永慕齋)
글·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삼·국·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0년 전 광활한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위·촉·오 3국의 패권 다툼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삼국지. 삼국지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을 한 명 들라면 단연 ‘제갈공명(諸葛孔明)’이다.(공명은 자字요, 이름은 량亮이다) 촉한의 군주였던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응해, 죽는 날까지 주군(主君) 유비에게 충성을 다한 제갈공명. 그런데 혹 아시는지? 40년 전만 해도 대구 달성군 논공읍 소도촌(蘇塗村)에 제갈공명 후손들의 세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논공읍 남리에 제갈공명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제갈씨·제씨·갈씨’ 3성은 모두 제갈공명의 후예다
우리나라 ‘제갈씨(諸葛氏)·제씨(諸氏)·갈씨(葛氏)’ 세 성씨는 모두 제갈공명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물론 보학(譜學)계에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 세 성씨 종족은 누가 뭐라 해도 스스로를 제갈공명의 후손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남양(南陽) 제갈씨 득관조(得貫祖)는 제갈규(諸葛珪)라는 인물이다. 제갈규는 제갈공명의 아버지로 한나라 헌제 때 태산군승(泰山郡丞)을 지냈다. 그는 슬하에 제갈근·제갈량·제갈균 3형제를 두었다. 장남 제갈근(諸葛瑾)은 삼국지에서 오나라 손권의 책사(策士)로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이다. 둘째 제갈량(諸葛亮)은 우리가 잘 아는 제갈공명이고, 셋째 제갈균(諸葛均)은 제갈공명과 함께 촉한에서 벼슬을 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남양 제갈씨 시조는 제갈공명의 증손자인 제갈충(諸葛忠)이다. 남양 제갈씨 족보에 의하면 제갈충의 입국 시기는 서기 266년(미추왕 5)이라고 한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고려 현종 조에 이르러 제갈씨는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이 나눠진다. 현종이 제갈한의 아들인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에게 각각 ‘제씨’와 ‘갈씨’를 사성(賜姓·임금이 성을 내림)한 것이다. 지금의 칠원 제씨와 남양 갈씨는 각각 이들을 시조로 한다. 조선말에 이르러 ‘제갈씨·제씨·갈씨’ 3성은 다시 ‘제갈씨’로 합쳐진다. 이때 미처 복성(復姓)하지 못한 일부 문중은 지금도 여전히 ‘제씨’나 ‘갈씨’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3성이 모두 스스로를 제갈공명의 후손이라 믿고 있다는 점이다.
남양 제갈씨 대구 입향 내력
우리나라 남양 제갈씨 중시조는 제갈성룡(諸葛成龍)이다. 호는 우은(愚隱), 시호는 충일(忠一)이다. 그는 여말선초 인물로 태조 이성계와 함께 무공을 많이 세웠다. 하지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태조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낙향해 여생을 마쳤다. 제갈씨로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로는 고려 공민왕 때 화순군에 봉군된 제갈매(諸葛邁), 조선 태조 때 대구부원군에 봉군된 제갈원(諸葛薳)과 청주군에 봉군된 제갈과(諸葛薖),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영천전투에서 순절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 시호를 받은 제갈호(諸葛灝),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조선과 명나라를 오갔으며, 임란 때는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와 유격대장으로 활약한 명나라 장수 제갈봉하(諸葛逢夏) 등이 있다.
남양 제갈씨 대구 입향조는 충의공 제갈호의 증손자인 제갈자경·제갈중경·제갈연경 3형제 중, 제갈자경(諸葛自慶)과 제갈중경(諸葛重慶)이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증조부인 제갈호가 영천전투에서 전사하자 각자 살길을 찾아 고향 진주를 떠났다. 이때 제갈자경과 제갈중경이 각각 달성군 구지면 덕곡과 논공읍 소도촌에 정착했다. 이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논공문중은 둘째 제갈중경의 후손이다. 참고로 막내 제갈연경(諸葛連慶)은 서울에 정착했다.
논공문중이 처음 정착한 곳은 소도촌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 지역에 달성공단이 조성되자, 어쩔 수 없이 400년 세거지를 포기하고 지금의 위치로 세거지를 옮겼다. 이때 제갈공명 사우(祠宇)인 무후사와 문중 재실인 영모재도 함께 이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갈공명 사당 무후사, 문중 재실 영모재
문중 재실 영모재는 1947년, 제갈공명 사당인 무후사는 1970년 소도촌에 세워졌다. 이중 먼저 세워진 영모재는 6·25사변 때 소실됐다가 1960년에 중건했다. 이후 1981년 소도촌이 달성공단부지에 편입되자 두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솟을대문인 대녕문(大寧門)을 들어가 뜰에 서면 좌측에 영모재, 우측에 무후사가 있다. 무후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전체에 단청이 칠해져 있고 전면으로 반 칸 퇴를 두었다. 전면 처마 중앙에는 무후사 편액,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별도 감실이 있는데 제갈공명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 처마 아래에 화수헌(花樹軒)·숙청당(肅淸堂), 안쪽 대청 북벽에 영모재 편액이 걸려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 전국의 제갈공명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향사를 모시고 있다.
에필로그
소도촌은 소도벌(蘇塗伐)로도 불렸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삼한시대 천신에 제사 지내던 성역으로 죄인이라도 소도에 숨으면 잡지 못했다”고 배운 바로 그 소도다. 현재 옛 소도촌이 있었던 돌구산 남쪽 기슭 근린공원에 ‘소도벌마을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인근 절티골에는 할아버지 나무로 불렸던 수령 400년 소도벌 당산 소나무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대구에서 소나무로서는 가장 잘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신령스럽기 그지없다. 이 나무는 400년 전 소도촌에 정착한 제갈씨가 심었다고 전한다.
필자는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라는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암송(暗誦)도 가능하다. 예로부터 효에는 이밀의 「진정표(陳情表)」, 충에는 제갈공명의 「출사표」, 우애에는 한유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이라 했고, 이 글을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출사표는 두 종류가 있다. 「전출사표(前出師表)」와 「후출사표(後出師表)」인데 통상 출사표라고 하면 「전출사표」를 말한다. 참고로 「출사표」, 「진정표」, 「제십이랑문」은 ‘중국삼대명문(中國三大名文)’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