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3장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수 있는가?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 1)
히브리인들의 서사시, 창세기
이집트 학자 얀아스만(Jan Assmann)의 이론에 의하면 ‘문화적인 기억’은 한 집단의 정체성을구성하는 핵심이다. 문화적인기억을 잊어버리는것은 공동체의와해와해산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문화적인 결속을 강조한다. 디아스포라 상황에서도 정해진 시간을 기념하는 ‘안식일’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되었다.
“너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라!”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성서는 신이 왜 아브람을 선택했는지 침묵한다. 행간을 읽어야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2장은 히브리어로 ‘그리고’라는 접속사 ‘워(wᵊ)’로 시작한다. ‘워’ 앞에는 아브람이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며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수련한 무수한 시간이 숨어있다. 마침내 신은 오랜 침묵을 깨고 아브람에게 “모든 것을 버려라!”고 말한다.
신은 인간에게 두번째 탈출을 촉구한다. 첫번째 탈출은 아담과 이브가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신들의 DNA속에 신성을 습득한후 대담하게 세상으로 탈출한 것이다. 자유의지와 욕망이 없는 파라다이스는 지옥이다. 신은 아브람을 통해 인간에게 두 번째 탈출을 명령한다. 이 명령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감행해야 하는 의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까워하지 말라! 너 자신을 위해서!”
신이 아브람에게 한 첫 마디는 히브리어로 ‘레크 르카(lek lka)’다. 히브리어 동사 ‘레크’(같은 의미의 ‘할락’)는 첫째 ‘(어떤 장소로) 걷다/가다/(누구를) 따라가다’이며, 둘째는 ‘어떤 삶을 살다/누구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누구를 흉내내다’이고, 셋째는 ‘버리다/떠나다/포기하다’이다. 신의 첫 명령에는 이 세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있다.
두번째 단어‘르카’를 직역하면‘너를 위해서’인데, 이 명령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다. 신은 아브람의 믿음, 그의 삶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려 한 것이다. 신이 시험하는 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구어놓은 안전장치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고 신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시험한다. 그 이유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레크 르카 뒤에는 ‘~로부터 떨어져’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이 붙기 때문에, 전체 문장은 ‘네 자신을 위해 ~로부터 떨어져 모든 것을 포기하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민’은 우리가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명사 세 개와 함께 세 번 등장한다.
그렇다면 신은 아브람에게 무엇으로부터 떠나라고 말한 것일까?
유목민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다섯가지가 있다. 가장 작은 상징이자 최소단위는 ‘나’다. ‘나’를 결정하는 두번째 단위는 ‘직계가족’이다. ‘나’를 규정하는 세번째와 네번째 단위는 ‘친족’과 ‘부족’이다. 부족을 넘어선 가장 큰 공동체는 ‘백성’이다.
아브람은 기원전 20세기부터 한곳에 적을 두지 않고 식량을 찾기 위해 떠돌아다니던 ‘아모리인’이다. 아모리인을 사회적용어를빌려 표현하자면 ‘히브리인’이라 할수있다. 히브리인은 히브리어로 ‘이브리(ibri)’다. 이 단어는 ‘경계를 넘나들다’ 혹은 ‘(규율을)어기다’라는 뜻의 ‘아바르(abar)’라는 히브리 동사에서 파생했다. 히브리인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자율적인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새 이름을 얻다
신은 히브리인인 아브람에게 세 가지를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 첫 번째는 ‘아브람의 땅’이다. 땅은 우리의 삶의 기반이다. 땅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땅’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중력과 같은 자기애와 이기심이다.
두 번째는 ‘태어난 곳’을 떠나라는 주문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하며, 그 고향은 자신의 이기심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단단한 공동체다. 이들의 이기심은 상부상조라는 이름으로 유연하게 적용된다. 고대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는 일은 곧 죽음이다. 특히 유목 사회에서 자신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일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은 아브람의 모든 것이 달려있는 그 도시, 그가 태어난 곳을 자발적으로 버리라고 명령한다.
신은 세 번째로 ‘아버지의 집’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아버지의 집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유목사회에서는 개인으로 불리기보다 ‘누구의 아들’로 불린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자신이 속한‘집’에 의해 결정되기때문이다. 신은 아브람의 절대적인 순명을 요구하며 점점 범위를 좁혀간다. 버려야 할 대상을 땅에서 고향으로, 다시 고향에서 부모로 옮김으로써 자신의 명령이 비상식적이며 동시에 절대적임을 충분히 표현한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어디로가야 하는가? 신은아브람에게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여줄’은 미래형이다. 아브람이 가야할 곳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미지의 장소다. 그곳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장소가 아니다. 이 장소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유일무이한 장소다.
아브람이 자신의전부를 포기하라는명령을따른다면 복을 내리겠다고 신은 약속한다. 복을뜻하는 히브리어‘버러카’의 어근은‘b-r-k’인데, 이단어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무릎’이다. 복은 무릎을 꿇고 신의 뜻에 순명하는 것, 또는 순명의 결과로 얻어지는 어떤 것을 뜻한다. 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는 삶은 과거로부터의 단절, 삶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
자신의 순명을 따르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아브람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순간 이름을 잃는다. 그러나 75세의 아브람은 과감하게 떠난다.
낯선 자를 대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 사회에서는 ‘復讎同態法’(‘피의 보복 원칙’으로 살인을 당한 자의 부족이 가해자 부족의 한 명을 살해할 수 있는 법으로, ‘눈에는 눈으로 뼈에는 뼈로’의 원칙이다)이 통용되었으나, 이방인은 그 사회에서 위험한 존재로 여겨져 이 복수동태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러한 생존법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의 직관에 따라 행동했다. 아브라함은 주위 사람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처음 보는 이방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이했다. 한순간에 자신은 없어지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라고 하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엑스터시(ecstacy)’라 했다. 엑스터시는 ‘ex(밖으로)’와 ‘stasis(자아에 몰두된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합쳐진 말이다.
아브라함은 신의 음성을 들었던 75세때부터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사람의 입장에서는 연습을하여, 남의처지를 이해하는것뿐만 아니라 그사람의 제2의 자아가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단순히 감정이 일치하는‘공감’의 단계를 넘어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남이 기쁘면 나도 기쁜 혼연일체의 ‘신비한 합일(unio mystica)’을 이루었다. 이것은 신비주의 전통의 최고 단계였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신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이라고 말을 꺼냄으로써, 신의 기준으로서의 선의 판단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내 밖의 상태(엑스터시)’인 ‘당신’에게 있음을 말한다. 선은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덕목으로 그 기준이 타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토브(tob)’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선하다’이며, 두 번째 의미는 ‘좋은 향기를 내뿜다’이다. 토브를 지닌 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저절로 풍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향기를 맡으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품이다.
낯선 자가 곧 신이다
최고의 대접을 받은 낯선자들은 아브라함에게“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장막’이란 성서에서는 ‘신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사라는 신의 말씀 안에 거주하며, 신의 뜻을 실천하고 있습니다.”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때때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낯선 자’다. 우리가 낯선 자를 그냥 지나치거나 아무런 감정 없이 대하면 말 그대로 낯선자가 되지만, 우리가 그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대접하면 그는 우리에게 신이 된다. 신은 요란하게 천둥번개 속에서 등장하지 않고 땀과 눈물로 범벅된 일상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먼 곳까지 쫓아나가 이 낯선 자들, 아니 신들을 마중한다. 그리고 이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그러자 자신들이 그렇게도 만나기를 학수고대한 신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정성스러운 배려와 컴패션이 낯선 자를 신으로 만든 것이다.
‘거룩’이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의 원래의미는 바로‘다름’이다. 나와 다르거나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성찰의 기회이자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 때 그 다름이 바로 신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발견한 것이다.